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最初의 韓人 美國大使오는性金,個人事 話題

朴正培(박정배) 2011. 8. 26. 14:36

 

★ 最初의 韓人 美國大使 오는 性金, 個人事 話題


◆ 徐재필이 甲申政變에 失敗한 뒤 美國으로 건너가 市民權을 얻은
때가 1890年 6月19日이다. 이로써 徐재필은 첫 韓國係 美國人이 됐다.
그로부터 121年만에 韓國係 美國人이 駐韓美國大使에 內定됐다.


버락 오바마 美國 大統領은 次期 駐韓美國大使에 성김(51) 國務部
北核 6者會談 特使를 內定하고 韓國 政府에 아그레망(駐在國 任命同意)
을 要請한 것으로 3日 確認됐다. 성金은 1970年 代 中盤 父母를 따라
美國으로 移民, 1980年 美國 市民權을 얻은 在美僑胞 1.5世다. 성金이
아그레망에 이어 美 上院 認準을 通過해 8月쯤 22代 駐韓美大使로
赴任할 境遇 1882年 兩國 修交 以後 129年만에 처음으로 韓國人과
똑같은 얼굴을 한 美國大使가 서울에 오는 셈이다.


대사는 외국에서 자국의 이익을 대표하는 직책이다. 따라서 애국심과
충성심이 남달라야 한다. 그런 자리에 한국계 미국인을 내정했다는
것은 미국 주류가 한국계 미국인을 이방인이 아닌 보편적 미국인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성김의 한국 이름은 김성용이다. 1960년생인 그는 서울 성북동에
살면서 은석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녔고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갔다가
중학교 1학년 때 미국으로 이민갔다. 1994년 미국에서 작고한 그의
아버지 김재권씨는 1973년 일본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주일공사로 재직 중이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김재권씨가 당시
사건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성김은 펜실베이니아대, 로욜라 로스쿨을 거쳐 로스앤젤레스 검찰청
에서 검사 생활을 하다가 외교관으로 전직했다. 그는 2003년 주한
미대사관 1등 서기관으로 근무하면서 북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이후 6자회담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했으며, 북한을 10차
례 이상 방문했다. 2006년 주한 미대사를 지낸 크리스토퍼 힐 동아태
차관보에 의해 국무부 한국과장으로 발탁돼 전시전작통제권 전환,
북핵문제, 한국 대선 등과 관련된 업무를 처리했다. 2008년 상원
인준을 거쳐 ‘대사(ambassador)’ 타이틀을 얻은 이후 6자회담 수석
대표 겸 대북특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는 언론을 통해
한국민들에게 얼굴이 알려졌다.


그는 윗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만한 인성의 소유자다. 성격이
온화하고 겸손하며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다. 발언을 절제하고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등 자기관리가 철저하다.
성김이 조지 W 부시 정부 때에 이어 오바마 정부에서도 고속 승진을
하는 것은 이같은 장점 때문이다.


물론 북한 문제에 대한 그의 전문성도 신임을 받는 주요한 이유다.
커트 캠벨 동아태 차관보,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는
대북정책 결정과정에서 성김에게 의존하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
장관은 그를 “성”이라고 부르며 친근감을 표시한다고 한다. 성김은
한국어로 웬만한 의사소통은 가능하지만, 아무래도 ‘네이티브 한국인’
만큼의 완벽한 어휘는 구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북한과의 협상 등 공식
석상에서는 영어를 쓴다.


그는 2男3女 中 넷째다. 어머니는 LA에 살고 兄弟들도 모두 美國에서
辯護士 等으로 活動한다. 성김은 梨花女大 美大 出身 韓國 女性과 結婚
해 두 딸을 두고 있다. 外三寸은 60∼70年代 아나운서로 名聲을 떨쳤던
任택근 前 MBC 專務다. 그의 아들인 歌手 任재범씨와는 外四寸 間이
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