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섬마을 선생님
03. 흑산도 아가씨
04. 황포돗대
06. 지평선은 말이없다
07. 한번준 마음인데
08. 낭주골처녀
10. 찔레꽃
11. 아씨
12. 빙점
14. 여자의일생
15. 저강은 알고있다
16. 임금님의 첫사랑
배우 <엄앵란>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작품이자,
<을지극장>개봉시 흥행에 크게 성공한 작품이다.
특히 동명의 영화주제가 <이미자>가 부른
<동백 아가씨>는 <이미자>의 불멸의 히트곡으로
그녀를 톱가수로 떠오르게 한 노래이자,
현재까지도 널리 애창되는 국민가요다.
당대의 청춘스타 <신성일>과 <엄앵란>이 주연을 맡았고,
<김승호>, <황해>등의 배우들이 조연으로 등장하여
“섬 처녀와 서울 청년의 이루어 질 수없는 비극적인 사랑”을 그렸다.
<김기>감독의 성공적인 데뷔작으로
이 영화 이후 수많은 멜로드라마를 연출하였으며,
70년대에는 작가 <김수현>과 콤비를 이루어
<청춘의 덫>, <상처>, <마지막 밀애>, <유혹>,
<여자이기 때문에>등의 작품들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동백꽃잎에 새겨진 사연 말못할
그 사연을 가슴에 안고 오늘도
기다리는 동백 아가씨 가신 님은
그 언제 그 어느 날에 외로운
동백 꽃 찾아오려나
외진 섬마을에 교사로 온 청년(오영일)이
섬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을 한다는 계몽성이 강한 이야기에
영화 <섬마을 선생>은 1967년 개봉되어
이미자의 노래만큼 흥행에 성공하였다
구름도 쫓겨가는 섬마을에
무엇하러 왔는가 총각선생님
그리움이 별처럼 쌓이는
바닷가에시름을 달래보는 총각선생님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가지를 마오
영화 <흑산도 아가씨>는 1969년 <권혁진>감독이 발표한 작품이다.
흑산도가 미국보다도 멀게 느껴졌던 시절에 만들어진 영화로,
당시, 많은 영화에 겹치기 출연을 하였던 배우들이
흑산도 현지 촬영에 부담을 느껴 출연을 거절하였다고 한다
. 그런 상황에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던 <윤정희>가 출연을 승낙,
<권혁진>감독을 감동시켰고,
권감독은 차기작 <기러기 아빠>의 여주인공을 <윤정희>에게 다시 맡겼다.
이 영화에는 <이예춘>이 <윤정희>의 아버지역을 맡아,
선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남진>, <유미>등의 배우들이 주요배역을 맡았다.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물결은 천번만번 밀려오는데
못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한없이 외로운 달빛을 안고
흘러온 나그넨가 귀양살인가
애타도록 보고픈 머나먼 그 서울을
그리다가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물결은 천번만번 밀려오는데
못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주연 : 이경희, 김진규, 태현실
제작 : 1966년
1966년에 발표한 같은 계열의 작품이다.
눈물의 여왕 <이경희>가 기막힌 운명의 여인으로 나와
그녀의 딸로 <태현실>이 나온다.
여인 2대에 걸친 사랑의 비극을 그린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 영화의 음악은 <백영호>가 맡았으며,
흘러가는 저 배는 어데로 가느냐
해풍아 비바람아 불지를 마라
파도소리 구슬프면 이 마음도 구슬퍼
아아 아아아 어데로 가는 배냐
어데로 가는 배냐 황포돛대야
순풍에 돛을 달고 황혼 바람에
떠나가는 저 사공 고향은 어디냐
사공아 말해다오 떠나는 뱃길
갈매기야 울지 마라 이 마음이 서럽다
아아 아아아 어데로 가는 배냐
어데로 가는 배냐 황포돛대야
05. 님이라 부르리까
님이라 부르리까 당신이라고 부르리까
사랑을 하면서도
사랑을 참고사는 마음으로만 그리워
마음으로만 사무쳐
애타는 가슴 그무슨 잘못이라도
있는것 처럼
울어야만 됩니까 울어야만 됩니까
님이라 부르리까 당신이라고 부르리까
밤이면 꿈에서나
다정히 만나보고 잊지못하고 언제나
가슴속에만 간직한
못난 이마음 그무슨 잘못이라도
있는것 처럼
울어야만 됩니까 울어야만 됩니까
영화 <지평선은 말이 없다>는 1966년 이신명 감독이 만든
일제 강점기 상해를 배경으로 한 활극영화다.
당시, 한국형 액션영화의 히어로로 인기가 높았던
<장동휘>가 주인공을 맡았고, <김석훈>, <이예춘>, <도금봉>, <강미애>, <김희갑>,
<김칠성> 등의 배우들이 주요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죽음을 당한 독립군 아버지의 복수를 위하여 상해로 간,
조선 사나이가 복수를 하고, 형제와 만난다는 이야기”로 서울/국도, 부산/대영극장 등에서 개봉되어 흥행에도 호조를 보였다
얼마나 멀고 먼지 가고픈 내 고향은
언제나 눈감으면 떠 오르는 그 모습
그리워 불러 보는 이름이건만
지평선은 말이 없다 대답이 없다
만나자 헤어지는 뼈저린 슬픈운명
차가운 이국땅에 쓰러져간 오빠를
가슴이 터지도록 불러보아도
지평선은 말이 없다 대답이 없다
줄거리
영화 <한번 준 마음인데>는 김영걸 감독이 발표한 통속 멜로드라마다.
“불임의 아내가 자식을 얻기위해 남편에게 여자를 붙혀준다는 설정”은
당시 <순정>(1968), <잠들면 떠나주오>(1970) 등
수많은 영화에서 다루어진 소재다.
<김진규>, <윤정희>, <고은아>가 공연한 이 영화는
“불임의 아내(고은아)가 사례비를 주고 여고동창(윤정희)을
남편(김진규)에게 접근하게 만들어 임신을 하지만,
친구와 남편은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고,
세 사람이 갈등하게 된다는 내용”인데,
참 말도 아니고 막걸리도 아닌 스토리다.
친구를 남편에게 소개한다는 설정이나,
부탁을 받고 친구의 남편과 동침한다는 것도 황당한 만화같은 이야기인데,
영화의 후반, 아이를 두고 울고 불고하는 장면들은
그야말로 황당함의 극치를 이룬다.
여튼 이 영화는 1969년 국제극장에서 개봉되어
흥행에도 성공하였다고 하니, 기가 막힌다.
<이빈화>, <박암>이 조연으로 아역스타 <김정훈>이 문제의 아이로 등장,
<윤정희>와 <고은아>사이에서 갈팡질팡 한다.
다만 <이미자>와 <은방울 자매>의 목소리로 흐르는 주제가
<한번 준 마음인데>만큼은 아주 훌륭하다.
이 노래 역시 크게 히트하여 60년대 이미자가 남긴 히트곡 중의 하나가 되었다.
밤하늘의 별빛은 꺼질지라도
한번 준 마음인데 변할수 없네
사랑이 미움되어도 바람속에 세월속에
그리운 얼굴 가슴깊이 새기며 살아갑니다
세월따라 꽃잎은 시들어가도
한번 준 사랑인데 돌릴수 없네
사랑은 흘러간대도 바람속에 세월속에
정다운 이름 영원토록 그리며 살아갑니다
천왕봉 바라보며 사랑을 했네
꿈 이뤄 돌아오마 떠난 그 님을
오늘도 기다리는 낭주골 처녀
노을 지면 오시려나 달이 뜨면 오시려나
때가 되면 오시겠지 금의환향 하시겠지
초수동 범바위에 이름 새겼네
영원히 변치말자 맹서를 했네
용당리 나룻배로 오실 그 님을
단장하고 기다리는 낭주골 처녀
노을 지면 오시려나 달이 뜨면 오시려나
때가 되면 오시겠지 금의환향 하시겠지
영화 <아네모네 마담>은 1968년 <김기덕>감독이 만든 작품으로,
<주요섭>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결혼 후 잠시 활동이 뜸했던
<엄앵란>이 이 작품으로 컴백하였으나,
“날마다 다방을 찾아온 대학생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줄 착각했음을 알고
서글픈 감정에 빠지는데...
다방마담의 역할은 결혼후 <엄앵란>의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남자주인공은 <신성일>이 나?으며, <김승호>,
<남궁원>, <안인숙>등의 조연으로 등장하여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엄앵란>은 이 영화의 출연을 계기로 영화활동의 시작을 알렸으나,
그녀 역시,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트로이카 여배우들의 높은 벽을 넘지못하고,
이 영화가 흥행에 호조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활동은 저조하였다.
다만 <이미자>가 부른
이 영화의 주제가 <아네모네>는 당시 크게 히트하였다.
.아네모네는 피는데 아네모넨 지는데
아련히 떠오르는 그 모습 잊을 길 없네
해가 져도 달이 떠도 가슴 깊이 새겨진
허무한 그 사랑을 전할 길은 없는가
.이슬에 젖은 꽃송이 아네모넨 지는가
별빛에 피어나서 쓸쓸히 시들 줄이야
마음 바쳐 그 사람을 사모하고 있지만
허무한 그 사랑을 달랠 길은 없는가
10. 찔레꽃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사람아
달 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동창생
천리객창 북두성이 서럽습니다
작년 봄에 모여 앉아 찍은 사진
하염없이 바라보니 그리운 시절아
1971년 영화 Ost
1970년 TBC-TV 일일연속극으로 방영되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드라마 <아씨>를 동명의 제목으로 영화화하였으며,
드라마 <아씨>가 종영되기 직전인 1971년 신년벽두에 개봉되었다.
영화 <빨간마후라>, <두 나그네>, <로맨스 마마>등
1960년대 많은 영화에서 단역배우로 활동한 경력이 있는 여배우
<김희준>이 여주인공을 맡아, 당대 최고의 스타로 발돋움하였으며,
그녀는 <아씨> 이후, 그분이 아빠라면>, <서방님 따라서>,
<팔도식모>등의 작품에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되는 행운을 맞기도 하였다.
<복혜숙>, <주선태>, <황정순>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들이 조연으로 나왔고, 바람둥이 남편역을 맡아
당시 많은 시청자들에게 미움을 받았던 김창세(이 드라마 이후
“김세윤”으로 개명)가 영화에서도 남편으로 나온다.
이 드라마에서 아들 봉구 역을 맡아
스타덤에 오른 노운영(이후 노주현으로 개명)도 이 작품 이후
<풋사랑>, <아무도 모르게>, <말썽난 총각>등
다수의 영화에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 그 외에도 <사미자>, <방수일>, <지윤성>, <김신재>, <여운계> 등 호화 배역들이 열연하였는데,
드라마가 191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이어지는 방대한 내용이라
영화는 1부 <아씨>(최인현 감독), 2부
<서방님 따라서>(진천 감독)로 나누어 제작하였고, 2부에서는 <최무룡>이 남자 주인공을 맡았다.
그러나 영화로 만들어진 <아씨>는 1,2부 모두 드라마만큼 인기를 얻지 못했으며,
서울에서는 2편 모두 흥행에 참패했고, 서울보다 먼저 1971년 신정푸로로 개봉된
부산(대영극장)에서는 당시 손익분기점이었던
기본관객 3만명 이상을 동원하는 호조를 보였다. <아씨>의 주제가는 드라마, 영화 1,2부 모두 <이미자>가 불렀던
동명의 <아씨>로 “한 많은 여자의 일생”을 담은 그야말로 심금을 울리는 노래다. |
옛날에 이 길은 꽃가마 타고
말 탄님 따라서 시집가던 길
여기던가 저기던가
복사꽃 곱게 피여 있던 길
한 세상 다하여 돌아가는 길
저무는 하늘가엔 노을이 섧구나
옛날에 이 길은 새색시적에
서방님 따라서 나들이 가던 길
어디선가 저만치서
뻐꾹새 구슬피 울어 대던길
한세상 다하여 돌아가는길
저무는 하늘가에 노을이 섧구나
영화 <빙점>은 <김수용>감독의 작품으로,
일본의 여류소설가 <미후라 아야꼬>의 장편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자신들의 딸을 살해한, 범인의 딸을 입양하여
키우는 부부의 이야기”를 거대한 설원을 배경으로 스크린에 펼쳐보였는데, <김진규>, <김지미>, <남정임>, <한성>, <전양자>등의 배우들이 주요인물로 등장하였다. 이 영화는 1967년 <아카데미>극장에서 개봉되어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로부터 14년후인 1981년, <빙점>은
<고영남>감독에 의하여 컬러로 리메이크되어
다시한번 관객동원에 성공하였으며, <남궁원>, <김영애>, <원미경>, <이영하>등의 배우들이 등장하였다.
1967년작 <빙점>의 주제가는 <이미자>가 불렀다.
쌓이고 쌓인 미움 버려주세요
못다 핀 꽃망울이 아쉬움 두고
서럽게 져야하는 차거운 빙점
눈물로 얼어붙은 차거운 빙점
마즈막 가는 길을 서러워 않고
모든 죄 나 혼자서 지고 갑니다
소중한 첫사랑의 애련한 꿈을
모질게 꺾어버린 차거운 빙점
보람을 삼켜버린 차거운 빙점
13. 박달재 사연
박달재의 사연 조선조 중엽 경상도의 젊은 선비 박달(朴達)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도중 백운면 평동리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집에는 금봉이라는 과년한 딸이 있었다. 그날밤 삼경이 지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해 밖에 나가 서성이던 박달도 역시 잠을 못이뤄 밖에 나온 금봉을 보았다. 그러나 박달은 고갯길을 오르며 한양으로 떠났다.
과장(科場)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상사병으로 한을 품은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금봉의 장례를 치르고 난 사흘 후에 낙방거사 박달은 풀이 죽어 평동에 돌아왔다. 땅을 치며 목놓아 울었다. 금봉이 고갯마루를 향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금봉의 이름을 부르며 뛰었다.
박달은 천길 낭떨어지로 떨어져 버렸다. 박달재라 부르게 되었다 (*) |
꽃처럼 곱게 웃던 검은 머리 새악시
연노란 저고리에 다홍치마 흩날리며
한 많은 박달재를 울고 넘는 사연을
여자의 우는 마음 남자는 모르오리
맹서한 사랑일랑 강물따라 가버리고
꽃처럼 곱던 얼굴 눈물 젖은 새악시
찢겨진 가슴 안고 맨발로 돌아보며
달이 뜬 박달재를 울고 넘는 사연을
여자의 맺힌 마음 남자는 모르오리
참을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
여자이기 때문에 말한마디 못하고
헤아릴수 없는 설움 혼자 지닌채
고달픈 인생길을 허덕이면서
아아~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견딜수가 없도록 외로워도 슬퍼도
여자이기 때문에 참아야만 한다고
내 스스로 내 마음을 달래어가며
비탈진 인생길을 허덕이면서
아아~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15. 저강은 알고있다
18세 때 초범(初犯), 교도소에만 25년 - 영화「저 강은 알고 있다」의 주인공
박태경(朴泰慶)(69)노인은 도로공사판에 인부로 나가고 있다.
일을 하는 데서 오래 산 보람을 느껴 보는 요즘 나날이다.
전과 16범, 일명「땅개노인」- 25년간,
그러니까 삶의 거의 3분의 2를 교도소에서 보낸 인생이
그 노경(老境)에 이르러 비로소 맛보는 평온이다.
주인꾸중 두려워 콩 사오다 도망쳤던 철부지 18세 초범이 그만
수년 전에『저 강은 알고 있다』라는 대중가요가 잠시 유행했었다.
이미자가 불렀다.
- 비 오는 낙동강(洛東江)에 저녁놀 짙어지면
- 흘러 버린 내 청춘이 눈물 속에 애달프구나
- 한 많은 반평생에 눈보라를 안고서
- 모질게 살아가는 이 내 심정을...
노래에는 숨은 사연이 있었다. 아성(亞星)영화사가 유동일(柳東日)감독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제목이 바로『저 강은 알고 있다』(일명 땅개 박노인), 그 주제가다.
바로 이 영화의「모델」이 오늘의 박태경씨였다.
영화촬영 당시 박노인은 15회째의 징역살이로
대구교도소에서 푸른 수의(囚衣)를 입고 있었다.
딸에게 주려고 고무신 한 켤레를 훔친 것이 죄였다.
땅개 박노인의 기구한 운명이 세상의 입에 오르내리게 됐다.
약삭빠른 영화사가 노인을「모델」로 해서
그럴싸한「최루탄(催淚彈)영화」를 만들어 보자고 노릴 만도 했다.
박노인은 이 영화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수의를 입은 채로.
1918년 10월 11일 - 지금부터 51년 전, 박노인이 18세 때 첫 번째 죄를 지었다.
일본주인 밑에서 자전거를 타고 두부 만들 콩을 사서 돌아오는 길에
논두렁에 넘어졌다.
콩이 쏟아졌다. 주인을 찾아 볼 낯이 없었다.
그만 콩 한 말을 10원에, 자전거를 10원에 팔아 버렸다.
전과 16범의「스타트」였다.
2번째, 이웃에 홀로 사는 오(吳)모 여인이 아기를 낳고도 굶주리고
있음을 보다 못해서 쌀 두 말과 미역 1단을 훔쳐다 주었다.
3번째, 1919년 6월 21일, 가택침입죄로 대구지방검사국 안동지청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았다.
4번째, 1921년 12월 23일, 역시 가택침입죄로 징역 2년.
5번째, 1923년 10월 16일, 징역 3년.
6번째, 1927년 11월 16일, 징역 4년.
7번째, 1931년 12월 26일, 징역 4년.
8번째, 1935년 12월 28일, 절도죄로 대구지방검사국에서 기소유예처분.
9번째, 1936년 3월 5일, 경범으로 구류 10일.
10번째, 1936년 4월 28일, 징역 3년.
11번째, 1940년 7월 16일, 경범으로 구류 10일.
12번째, 1940년 12월 23일, 징역 3년.
13번째, 1961년 7월 25일, 20년간을 고요히 지낸 것도 헛것이 되어
대구지법에서 야간주거침입, 절도죄로 징역 8개월.
14번째, 1963년 1월 29일, 또 절도죄로 징역 2년.
15번째, 막내 딸에게 주려고 고무신 한 켤레를 훔쳐서 징역 1년.
영화촬영은 이때였다.
16번째, 1967년 5월 5일, 절도죄로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낯익은 안동교도소에서 복역,
1968년 초에 출감했다. 인생의 가장 좋은 때를
몽땅 교도소에서 보낸 계산이다.
도둑질서 발 씻기는 영화 주제가 때문, 그 노래 들으면 눈물 나와
그 동안의 특징을 보면 고향인 경북 안동을 떠나지 않았다는 점과
죄명이 모두 절도 아니면 주거침입이라는 점.
사람을 해친 일은 한 번도 없다.
고향 땅에 고목 같이 굵은 뿌리를 박고 다만 살기 위해
범행을 저지른- 어쩌면 소심하고 선량한 농민의 아들인지도 모른다.
범죄회수가 늘어남에 따라 본명만을 쓸 수가 없게 되었다.
자기가 붙이기도 하고 남이 지어주기도 한 별명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 중 알려져 있는 것만 들어도(본인은 입을 다물고 열지 않는다)
상희(相熙), 상열(相烈), 춘근(春根), 태성(泰星), 봉근(鳳根),
송태성(宋太星), 임춘근(林春根), 땅개 박노인의 8가지.
본명과 또 다른 별명들을 합해 13가지 별명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가 앞으로는 굶어 죽어도 도둑질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은
바로 이「땅개 박노인」이라는 별명 때문이란다.
영화와 대중가요를 통해 행적이 알려지면서
「땅개 박노인」의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뜨끔해진단다.
문제의 노랫가락을 혼자 외면 헛되이 보낸 삶에 눈물이 흐른다.
그래서 그는 한때 안동과 대구 등지를 방랑하면서 구걸을 했다.
『땅개 박노인 왔습니다. 도와주십시오』문간에서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두 말 않고 도와주었다.
그러나 구걸도 한정이 있었다.
그는 작년 10월부터 안동시가 실시하는 구호양곡 근로공사장에
그 늙은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하루에 밀가루 3되씩을 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아버지 소문이 부끄럽던 아이들도 발 씻자 모두 일터 찾아
도둑질과 인연을 끊기로 결심한 것은
후세들의 앞날을 위해서라고 박노인은 말한다.
그의 현주소는 안동시 상아동의 속칭「진모래」라는 곳.
안동 김씨의 재사 안의 1평 반짜리 단칸방에서 박노인 이하
부인 박숙해(가명48) 장남(18) 장녀(16) 2녀(14) 3녀(10)의 5식구가 살고 있다.
도둑소리만 들어오던 아버지가 손을 씻자 아이들도
저마다 살 길을 찾아 힘차게 나섰다.
장남은 안동시 상아동 박모씨의 양계장에서 기술자로 일하면서
월수 5천원을 가지고 들어온다.
장녀와 2녀는「검」팔이로 하루 6백원 정도의 벌이를 하고 있다.
박노인 일가는 아침은 조밥을, 점심은 거르고 저녁에는
공사판에서 박노인이 가지고 온 밀가루로 국수를 쑤어 때운다.
비록 배는 고프지만 아이들의 얼굴에는 명랑한 웃음이 떠돈다.
이들에게는 또 새로운 꿈이 생겼다.
온 가족이 열심히 일해서 3년 후에는 50만원짜리 집 한 채를 마련하자는 꿈이다.
아버지가 도둑질만 하고 다녔을 때는 가져보지 못한 단란한 꿈이다.
[ 선데이서울 69년 2/2 제2권 제5호 통권19호 ]
흘러보낸 내 청춘이 눈물 속에 떠오른다
한 많은 반평생에 눈보라를 안고서
모질게 살아가는 이 내 심정을
저 강은 알고있다.
흘러가는 한세상이 꿈길처럼 애달프다
오늘도 달래보는 상처뿐인 이 가슴
피맺힌 그 사연을 설은 사연을
1967년 이규웅감독의 영화로 문희와 신성일 황정순씨가 출연하고 北村마을 산다는 우리 낭군은 어느 댁 도령인지 알 수 없지만 밤에만 살짜기 찾아오셔서 날 울려놓고 돌아가시는 무정한 우리 님은 알고 보니 임금님이래요 임금님이래요
하늘같이 높으신 우리 낭군은 어느 나라 임금인지 알 수 없지만 벽오동 사이로 달 걸어놓고 님 기다리는 애끓는 마음 무정한 우리 님은 알고 보니 임금님이래요 임금님이래요
↑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 |
'▼ 음악공간 ▼ > ★.대중가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자의자격 - 사랑해서 사랑해서 (0) | 2011.07.16 |
---|---|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픈 날에 (노래 모음) (0) | 2011.07.14 |
최진희노래모음 (0) | 2011.06.29 |
잊지못할 여인아 (0) | 2011.06.20 |
슬픈음악... (0) | 2011.06.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