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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폭격을 거부한 조종사

朴正培(박정배) 2012. 1. 22. 17:41


해인사 폭격을 거부한 조종사

명사탐방

제9대 공군참모총장 장지량 장군

장지량 : 제9대 공군참모총장

김순용 : 상.하수도 신문 사장

 

김순용 총장님 바쁘신 중에도 이렇게 시간을 내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 합니다.

장지량 참 오래간만이요. 물산업 발전에 이처럼 노력과 신문도 발행 하시고 애쓰십니다.

 

김순용 총장님을 모시고 우리나라 격동기에 공군발전에 크게 기여 하시고 6.25전쟁당시 참전하시어 공개되지 않은 비사를 온 국민이 알아야 하고 많은 후배들에게 소중한 자료가 될것 같아서 이렇게 모셨습니다. 먼저 총장님께서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대해서 공개되지 않은 비사부터 한 말씀 해 주십시오.

장지량 어느날 골프를 끝내고 대통령 앞에 커피를 한잔씩 하고 점심을 먹을려고 가다리는데 대통령께서 나를 부르시는거요 “이리 좀 와” 앞에가서 이양반이 웃으시면서 이야기를 할까 말까 망설이면서 한참을 있다가 “그 여의도 비행장을 서울시 한테 줄수 없나?” 아! 턱 이렇게 나온단 말이요.

김순용 대통령 말씀은 박정희대통령을 말씀 하시는거죠?

장지량‘ 그렿지요 얼마나 제가 놀랐겠어요! 하이구! 이게 무슨 얘기야 왜 그렇게 말씀하시느냐고 얘기를 잘 못하시면서 “여의도 비행장을 서울시에 줄수 없냐?” 이거요. 제가 “하이구 이거참 여의도 비행장은 서울의 생명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그때 서울의 인구가 500만 정도예요

김순용 네에 그때가 500만였습니까?

장지량 그렇죠 서울을 위해서 필요 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대화 과정에서 김현옥서울시장이 병풍처럼된 킨막이 뒤에 숨어있다가 턱 나오더군요. 갑자기 나타나서 “각하 여의도 보다도 더 좋은 비행장을 만들어 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르는 겁니다. 저는 보지두 않고 대통령을 보면서 너까짓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인지 저는 안보고

김순용 그 당시 김현옥시장은 안하무인 격으로 좀 심했지요.

장지량 그래서 김현옥 서울시장을 보고 아니 여보시오. 여의도 보다 더 큰 비행장이 서울 어디에 있단말이요? 서울인구가 500만인데 말이요. 그랬더니 김시장이 ”아니 염려 말라구 내가 해 놓았단말이요“이렇게 몰아 부치는데 대통령이 결정을 못해 머뭇거리잖아요. 비행장이 얼마나 중요해요. 대통령은 ”그럼 두사람이 한번 상의해봐” 하길래 “예 알겠습니다. 참고적으로 한번 의논하고 빨리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월요일 참모회의에서 그얘기를 내 놓았더니 야단이요. 세상에 그런말이 어디 있습니까? 아니 여의도를 없애요. 서울시장이 그럴수가...회의석상에서 나오는 말들이 그놈두 아니야 그놈의 새끼야 그놈의 새끼가 집을 지을라구 그럽니다.이렇게 야단이였어요.

김순용 그렇게는 누가 말씀하셨습니까?’

장지량 우리참모들이지요. 제가 총장이니까 “뭐 집을지어 집지을려면 다른데 짓지 왜 우리 비행장에 건축하려 하나. 딴 얘기 없나 안됩니다 절대 안됩니다 여의도 비행장은 서울의 생명을 좌우 할수 있는 비행장이며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이 대세 였답니다.제가 왔다 갔다 하면서 미국, 대만을 가만히 생각하니 그 수도에는 반드시 하나,둘 비행장이 꼭 설치되어 있어요. 제일 대표적인 것이 워싱톤 입니다.워싱턴이 강이 하나 흐르고 있어요. 그 강가에 비행장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서 약 2~3km도 안되게 바로 그곳에 백화점이 하나있어 화이트 하우스가 그 강건너가 바로 미 국방성 펜타콘이에요.

그걸 내가 얘기를 했단 말이요. 그런데 이것은 국가안보차원에서 수도에 비행장이 있어야 된다. 서울의 인구가 그때 500만이니까. 그런데 우리 6.25전쟁을 겪었지 않소. 한강다리 폭격해 버려서 수십만명이 죽었단 말이요. 그 얘기를 하면서 수십만명이 죽을때

김순용 그때가 6.25때죠 많이 죽었지요.한강다리 폭파해서

장지량 그 얘기를 또 하나 하지요. 그러니까 다들 반대하는거요. 그래서 김현옥서울시장이 시장실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왔어요. 만나서 그 얘기를 하고 반드시 서울시장한테 서울시의 시민은 500만이지요. 6.25때 생각이 안 납니까? 한강폭파로 그때 얼마나 많이 죽었소? 그러니 이거 다시 생각해 봐아한다. 했더니 끝끝내 그사람이 고집을 부리는거요.

김순용 네 그랬었군요 김현옥시장이 각종아파트 등으로 많은 문제가 있었지요.그분이 군생활시절 공병장교 출신입니다.

장지량 김현옥서울시장이 그곳보다 더크고 더좋은 비행장을 할수 있기 때문에 그걸 내가 생각하는거요”하길래 ”거기가 어디냐? "했더니 “그것은 나중에 이것 해결되구 얘길 하겠다” 하면서 얘길 안해요. 한달은 안돼고 삼사주일뒤에 대통령께 말씀을 올리니 대통령은 시장의 의견에 상당히 동의를 하고 계시는듯 했어요.

김순용 대통령께서 사전에 서울시장과 사전협의 해놓고 역설적으로 동의를 구하려는 거군요

장지량 그러다가 나중에 서울시장이 내가 고집을 워낙 피우니까 “만납시다”해서 만났어요.단둘이 만났어요. 내가 첫째로 여의도 만한 비행장 할곳이 어디요?‘ 어디를 말하지요 ? 그랬더니 지도를 가져왔어요 지도를 가져온곳이 지금의 성남비행장을 얘기 하는것이요. 성남이라는 곳이 옛날 일본군들이 포병 포사격 하는곳이에요. 그래서 내가 그까짓것 가지고는 비행장이 안된다고 하는데 계속 이야기 하길래 “그럼 좋소” 내가 한달동안 봅시다. 그다음날부터 내가 점심을 먹고 참모들 한테는 내가 대구에 좀 갔다 올테니까 그렇게 알라 내 비행기 쌍발비행기를 타고 대구를 간다구 갔단말이야 대구 가는척하며 수원에내려 수원서 제트비행기로 갈아타 거기 간다는 말은 않고 대구에 갈일이 있으니 대구간다 하고 대전까지 가서 낮게 비행하면서 다시 돌아오다 뜨는 시늉을 하고 내리는 흉내를 내고 저쪽에서는 돌아가지고 내리는 행동을 약 한달을 했어요.

김순용 총장께서는 특별작전으로 다 조사 하셨네요

장지량 이비행기가 내릴수 있느냐 또 이 보다 더 큰 비행기가 내릴수 있느냐 내리면서 어떤 결점이 없는지 한달을 했단말이요. 그러니까 괜찮은것 같아 그래서 처음으로 참모 찾아가고 참모부장을 들어오라하고 얘기를 한거요 ”너희들 한번 해봐!“ 이렇게 해가지고 이렇게 해봐 ” 내가 보기엔 돌아가지고 벌써 서울쪽에서 내릴때 거기가 뭐 자꾸 걸리지 않나 그것두 한번 봐 그래서 거의 한달을 시켰어요

김순용 한달만에 전부 검토를 해서 이상이 있나 없나 조사를 한 내용은 무엇이 였습니까?

장지량 그래서 물어보니까 점점 생각이 저 남쪽에 가서는 확 틀어버리고 그렇게 하게되면 저쪽은 가는게 좋겠습니다. 저쪽에 산이 하나 있거든 지금도 있어요 그산을 깎아버려야 하는데 확 깎어버리고 활주로를 만들어라구 하는데 활주로가 두개가 있는데 하나는 똑바로 가는데 하나는 이렇게(곡선) 되어 있더라구요.

김순용 그럼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이군요”

장지량 그렇지요 제가 그때 해외에 가고 없을때요. 이것을 깎아 버려야 똑 바로 가는건데 활주로가 이렇게 되어 있단말이야 이게 뭐냐 하면 롯데호텔 지금 있는곳 그 상공으로 바로 가게 되어 있거든요. 그것은 나중에 또 얘기를 하고 그래서 그것을 해가지고 한번 해 보자 여의도 비행장을 내 놓고 그것을 우리가 해보는거야

김순용 그때가 몇 년도 입니까?

장지량 그때가 66~67년 이요. 제가 총장되고 한 1년 되었으니까. 그담에는 뭐냐하면 그러나 여의도 비행장은 완전히 다 닫아버리면 안된다.우리 인구가 너무 많다. 어느나라든지 수도에 가면 다 비행장이 2-3개는 있다. 많은 인구가 살기 때문에 그걸 보호 할수 있는 분대가 빨리 올수 있게. 또 많은 사람을 빨리 다른 곳으로 옮길수가 있고 그리고 유사시에는 많은 식량과 약품을 빨리 수송 할수 있는 그런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김현옥 시장과 다시 만나서 현재 까지는 좋은데 서울에 인구가 지금 500만이요. 당신이 6.25때 그 생각이 나겠지 알겠지만 만약에 이북 군대가 또 그렇게 되면 막대한 사람들이 대피(피난) 가고 또 많은 군대가 갑자기 많이 투입되어야 하는데 그땐 어떻하겠느냐? 그때 나는 5만평을 얘기했는데 지금 보니까 6만 9천평이요

김순용 수원을 5만평을 얘기 했군요

장지량 아니 그곳은 수원은 5만평이 안되고 그것은 그대로 하고 여의도 비행장은 다 줄수 없다 한군데는 최소한 헬리콥터가 몇백대가 뜨고 내리고 할수 있어야 북한 인민군들이 와도 서울의인구를 다른곳으로 대피하고 식량을 운반한다거나 다른곳으로 군대가 빨리 이동한다든지 할수 있는곳이 필요하다는 것이지

김순용 요인들을 빨리 이동시킨다든지 등등이죠.

장지량 그렇지요. 이것을 사실은 골프장이라고 내가 얘기를 했지만 라인홀 그건 믿음이 그런 것이지 내용즉선 헬리콥터 공항이요. 그래야 수십대의 헬리콥터가 내리고 뜨고 할수 있지 않느냐 그러자 김현옥시장이 이해를 했어요. “아 정말 그렇다”고 말이야. 그래서 내가 처음에 5만평을 얘기를 했어요 ”이거 전부다 몇만평 입니까?“ 여기는 굉장히 큰것이지 그런데 5만평이라는것은 뭐냐하면 표준을 가지고 얘길 하는 것이지 라인홀 골프장이라고 얘길 했기 때문에 사실은 골프장이 아니요. 그렇게 하고는 나는 총장을 그만두고 대사로 해외에 갔단 말이요. 나중에 보니까

김순용 그때 대사로 나가셨죠?

장지량 대사로 나갔지요. 갔다와서 보니까 5.16광장이 있잖소. 그곳에서 퍼레이드도 하고 굉장히 좋았단 말이요. 필요할땐 비행기도 띄우고 내리고 좋았단 말이요그래서 나는 이만 하면 됐다 이렇게 생각하고

김순용 그게 참모총장님께서 얘길 해서 나온게 5.16광장이군요” “알고 보면 행사하기 위한 도로가 아니라 역사적인 전투 활주로네요”

장지량 그럼 활주로지요. 활주로

김순용 정말 대단하셨네요.

장지량 그럼 그걸 막 없앨려고 하니까 5.16이라고 하는것은 여기서 이름을 지은 것이요.

김순용 5,16이라는것이 혁명아닙니까 각종 큰행사 정도나 하는 그런 장소로 알고 있는 것을 알고보니 중요한 활주로네요.

장지량 활주로지요 그런데 이제 이만 하면 되었다하고 생각하는데 그때 조순이라는 사람이 시장이 됐단 말이요. 내가 해외에서 돌아와 가지고 국회의원을 하고 있을때

김순용 제가 기억이 나는데요. 그때 유정회 국회의원이 셨지요.

장지량 예 제가 10년만에 돌아오니까 그때 유정회 국회의원을 하라고 해서 했지요. 그걸 가지고 국가 위원회라고 했지요. 그것 끝나고 12.6사건이 낫잖소.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나중에 보니가 다른사람은 국회의원으로 다 해 주는데 우리는 다 빼 버렸어?”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만 다 국회의원 해준거요. 나는 개인 친척회사에 들어가서 한 10년동안 있었지요. 그런데 한 중간쯤해서 돌아와 보니까 공군에 보람회가 있어요. 보람회 전 예비역 장교들을 모아 가지고 모임을 만든것이 있어요 지금도 있어요. 보람회도 내가 누구에게 해서 미국것을 따가지고 만든것이지 보람회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 조순이라는 분이 시장이 되어서 소문이 그사람이 대통령을 나갈려구 한다는 소문이 막 도는거요 그리고 보니까 5.16 광장을 팔아버린 장본인이여.

김순용 국가안보의 근본 뜻도 모르면서 말이지요

장지량 제가 그 내용을 처음부터 알고 있으니 시작부터 아는 사람이기에 조순을 찾아갔단 말이요 찾아가서 얘길 했단 말입니다. 저하구 얼마나 싸웠는지 몰라요.

김순용 그럼 전 조순서울시장은 경제전문학자로 알려졌는데 알고보니 국가관이나 안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네요”

장지량 그렇다면 지금 그사람 정신이 뭐냐 하면은 자기가 대통령을 나갈려고 지금 준비 하고 있는 처지라 돈이 필요 하잖아요” 그래서 5.16광장을 다른명칭으로 해서 팔아 버릴려고 하는거요

김순용 아니 팔아버리면 돈이 자기와 관계가 없잖습니까?

장지량 아니지 그래야 본인도 돈이 있어야 모든것이 될것 아니요.

김순용 사업을 벌려 놓으면 돈이 된다는 것이군요

장지량 그렇지요. 그래서 내가 그말은 따질수가 없고

김순용 장래는 내다 보고 하는 것인데 참 딱한 노릇이군요

장지량 내가 한참 싸움을 했어요. 할수없이 내가 시간이 어려우니까 보라매공원 보라매회장이 있거든 그것두 내거 만들어 놓은거요. 옥만호장군이 회장을 하고 있었어요. 내 후배인데 보라매 회장이 표면에 나서라 내가 지금 개인 회사에 있으면서 하니 말을 안 듣는다 임기가 2년인데 2년을 더해 그래서 연임을 시켰어요. 그리고 여의도 비행장을 마무리 해 보아라. 그러나 결국은 못하고 말았어요 조순시장이 결국은 다 팔아버렸어요 조시장 손에 다 들어가 버렸어요. 지금 내가 전번에 가 보니까 6만 9천평이더군요

김순용 조시장이 그렇게 팔아 버렸군요.그리고는 공원을 만들었었죠 일부 공원을 만들게 된것도 그다음이죠

장지량 아 그러니까 5.16 그것을 묵살 해버리고 나머지 그것이 있는것이 흔적인데 그것은 다 풀밭이고 거기다 난 무엇을 계획을 했느냐 하면 구리파나 해외에서 볼때 자기들이 처음부터 쓴 각종 비행기 ,항공기를 조립식으로해서 전시를 해 놓았어요.

김순용 전투기 폭격기 각종비행기를 전시하여 국가관과 안보관을 심으려 하였군요.

장지량 제가 폴란드니 이곳 저곳 가보았더니 잘해 놓았어요. 저도 그렇게 하자 해서 비행기를 좀 전시를 했어요.그랬는데 해외에서 돌아와 보니가 비행기는 없고 이것이 조시장 말대로 말이야 전부 소나무나 갖다 심고 조그만 호수 만들고 붕어 기르고 완전히 딴판을 벌려 놓아 버렸더라구요. 5.16광장두 없어져 버리고 나머지 공항도 없어져 버리고 조시장이 팔아가지고 뭐 한다고 하면서 해버린거요. 자신이 대통령한다고 해서 해버린거요 지금도 내가 조시장을 보면은 저리 돌아서 버려

김순용 허허허 그랬었군요.

장지량 고얀놈의 자식 고얀놈의 자식 지금 말이야 천만명이 사는 사람의 생명을 말이야 이렇고 저렇게 목적을 기지고 한곳을 다 팔아버리고 소나무 심고 뭐 완전히 없어져 버렷어요. 요즘 내가 가 보았어 6만 9천평이요.

김순용 남이 볼땐 5.16광장이지만 실제는 국가 안보를 위한 활주로인데 그런 깊은 뜻은 모르고 그냥 나무심고 붕어새끼 키우고 참 문제였군요.

장지량 아 그럼 “ 이런거야 한강강가에 얼마든지 할수 있잖느냐 말이야. 왜 이걸 없애느냐구 나쁜놈의 자식. 내가 밤낮을 욕을 했지

김순용 욕도 안하는 양반이 욕을 배우셨네요

장지량 할수 없어요 지금도 제가 가끔은 가 봐요 그래서 여의도 비행장이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가보면 저가 속이 상해요. 이 시내에 1,000만 인구가 사는데 제일 핵심 중요한 작전을 하는곳 을 참 생각해봐요. 6.25때 어땠는지 아시나요.

김순용 저도 6.25때 참전군으로 잘 싸웠다고 화랑무공훈장 받았습니다.

장지량 그렇지요 6.25.일요일날 그날이 전쟁 시작 아니요 그때 내가 잠깐 다른데로 갔었는데 김신장군이 작전국장을 햇는데 그때 6.26일날 열명이 선발이 되어서 일본으로갔어요 F51전투기를 받으로 갔는데 미군이 안줘요. 정말 안줘 처음으로 열대를 준다고 열명을 보내라 해서 간거요. 그래 작전국장 김신 중령이 그곳을 갔단 말이요. 내가 작전국으로 다시 왓어 그래 가지고 육군본부에서 회의를 한거야 26일 27일 그리고 마지막이야

김순용 그때 참모총장 최병덕장군 있을때 입니까

장지량 아니 그후지요.

김순용 그 이후군요.

장지량 그래서 27일날 6.25때 마지막 회의를 하는거야 그땐 미군이 안 왔을때니가 인민군이 막 들어오고 할때니까 그럴때야 27일날밤에

김순용 그땐 최병덕 장군이 사망하신 후군요.

장지량 6.27일 밤중에 인민군이 막 들어오고 할때야 그런데 27일날 마지막 회의에서 김 백일 장군이 육군의 마지막 공병관 친동생이요 그분이 일본 육사 선배요. 그런데 명령만 하는거요. 나도 그때 있었어 내일 아침 새벽에 한강인도교 그곳을 폭격을 해라 그시기는 새벽에 이야기 한다 그래가지고 공병관님에게 나는이제 아이쿠 다 틀렸구나 하고 우리는 수원으로 빠져서 남쪽으로 갈려구 해서 공군본부로 돌아오고

김순용 그때 공군본부에 계셨나요”

장지량 공군본부에 있었지요

김순용 저는 그때 대방동 특별부대에 있었습니다.

장지량 특별부대에 있었나요“

김순용 그때 저는 최병덕 장군을 모시고 있다가 그분이 참모총장으로 발령받아 갔습니다.

장지량 그래가지고 가서 준비를 해가지고 27일날 오후 5,6시경에 적군이 때려서 수원으로 후퇴를 해 수원에 가는것은 뭐냐하면 수원에 식량도 많고 농과대학에 쌀이 많아

김순용 수원농대군요.

장지량 그렇지 농대 그곳에서 먹고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죽는다 죽는것이 싫으면 나가라하니 다 있어 한놈도 안나가. 수원에 가니 밤 9시가 된거야 조그만 초등학교에 전부 간거요

김순용 그런데 저는 그때 상황을 남기고 싶은 말씀은 이북의 군대에 그때 우리가 너무 어이없이 당하고 육.해.공.의병력이나 무기가 너무 초라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좀 말씀해 주시는것이 앞으로 젊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 합니다. 또 안보에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장지량 아 초라하지요

김순용 인천에 병창기지 사령부에 있었고 김기임 대령님을 모시고 있었죠.

그때 별안간에 6.25전쟁이 발발하여 인천 부평은 북한군이 탱크로 진격하여 아수라장이 되고 엉망이었습니다.

장지량 그때 제가 책임자요 제가 자세히 이야기 할 수 있어요.

김순용 이번에 6.25를 말씀 하시는것은 한번에 끝나지 않고 시리즈로 계속 연재 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누군가가 남겨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속 말씀 하시죠.

장지량 제가 최근에 작년 일년동안에 쓴 책도 있으니까.

김순용 그것두 좀 주시죠

장지량 그것도 내가 한권드리지 그것말구 여러가지 문제도 있는데 일일이 들면은 6.25일이야 아무도 몰라요. 저는 그때 6.1.일부터 작전부장을 그만두어요 김신준장이 작전국장으로 와요. 저는 어디를 가느냐 하면 그당시에 미국대사관에서 미국사람이 돈을 안 받구 영어를 가르키는거예요. 신문사장들 또 기업사장들 이런사람들 20~30명 희망자를 모아서 영어를 가르키는거예요. 작전국장을 그만두고 그때 그곳에 영어배우로 들어갔거던요.

김순용 작전국장이었으니 정보를 잘 아신거죠

장지량 6월 25일 이었으니까 두달과정에 한달있으면 끝나는거예요. 25일날 새벽이요 일요일 참 옛날 얘기 나오네

김순용 아 그것은 우리 후손들이 알아야 되죠

장지량 그때 우리 집사람이 첫딸을 출산하여 두달이 되었어요. 4월에 태어나 6월이 전쟁이 되잖아요. 태어나고 단성사에서 유명한 영화를 한다구 해서 일요일날 10시 가족과 같이 가기로 되어 있었어요. 그러자 6월 25일 새벽이 되었오. 김포관사에서 새벽 5시 30분 밖이 휜한데 비행기가 김포비행장을 두 서너대가 빙빙 돌더라구요. 비행하는 소리가 다르단 말이요 우리비행기 하고 말이요.

김순용 미국비행기 인가요?

장지량 아니요 몰라 뭔지 그때가 비행기가 돌아 오면은 김포관사가 바로 비행장이요. 꼭대기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소리가 다르다고 생각을 했어요. 새로운 비행기가 “아 영국의 새로운 비행긴가 미국의 새로운 비행기 인가”하고

김순용 북한쪽은 전혀 생각 하지 않으신 거죠?

장지량 이북생각은 전혀 안 했지요. 그리고 보니 한 두바퀴를 돌더니 휙 하더니 서울쪽으로 날아갔어요. 한 20분인가 있다가 그 비행기가 또 돌아왔어요. 김포상공을 또 돌더라구요

김순용 김포 비행장을 말입니까?

장지량 휭 하더니 없어졌어 그런데 그 비행기가 소리가 약하더라구요 처음듣는 것이에요.

김순용 소리만 들어도 아시는 분이니까요

장지량 그런데 그 비행기가 여의도로 갔어요

김순용 녜!?

장지량 여의도 비행장으로 갔단말이요. 그때 여의도에는 비행기 격납고가 2개 있었어요. 큰것이 하나 있고 그리고 집이 몇채 있고 다리고 뭐고 하나두 없었어요. 그때 영등포에 사는 시민들이 전부 새벽에 나오지요. 김포로 가는 도로에 풀밭에서 담배두 피우고 앉아서 서로 이야기도 하고 수백명이 쭉 나와서 서로 얘기도하고 그사람들이 보니 갑자기 비행기가 와서 쭉 돌더란 거예요. 여태까지 보지도 못한 비행기예요. 그러더니 나중에 조금 밝으니까 그 비행기가 말이요. 우리격납고를 사격을 하는거요

김순용 그럼 비행기 둔곳을 사격한 것이군요

장지량 그게 처음이요.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 비행기가 그러는줄 알았지요. 인민군 비행기가 그러는 줄 몰랐단 말이요. 그래서 우린 욕을 막 했답니다. “이놈의 새끼들 우리가 여기와서 담배를 피우는줄 뻔히 알면서 친다구 바로 옆이 우리 비행장 아닙니까 그러니 얼마나 초라 했습니까 바로옆에 비행장이 있고 하사관들이 경비를 서고 있는줄 알면서 총을 쏴! 이놈의 새끼들아! 하는데, 인민군이 또 와서 빠빵하고 또 쏜단말이요. 우리공군 보병경비병 있잖습니까? 우리 시민과 싸움이 났어요. “야 아놈의 자식아 너희들이 알면서 총을 쏴 ” 그렇게 하고 있는데 세번째 인민군 전투기 4대가 또 와서 다시 격납고에 꽈광하는데 그때 쓱 보니까 비행기에 배밑에 빨간 별이 붙어있어요. 비행기에 인민군 인공기가 붙어있단 말이요. 아 그제서야 알았어요 저 비행기가 우리 비행기 아니다 인민군 비행기다 그때 그곳 사람들이 5~60명 다치고 죽지는 않았어요. 나중에 보니까 우리 비행기 한대가 박살이 났어요

김순용 그때 우리비행기의 현황과 무장현황의 말씀을 해 주시지요

장지량 AT16이예요.

김순용 AT16 이라면 훈련기? 그거 2차대전때 버린 비행기 프로펠러 전투비행기는 아니죠?

장지량 물론 그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돈을 모아 기지고 살려구 해두 미군이 팔지를 않아요 그나마 없다고 하니 할 수없이 상의를 해서 캐나다에서 사왔어요.

김순용 그러니까 몇대가 있었습니까?

장지량 똑같은 비행기인데 캐나다 회사를 통해서 10대가 들어왔지요. 5월 15일날 육이오 한달전에

김순용 그당시 훈련두 제대로 안되었을 텐데요

장지량 아 그렇지요 그러나 우리가 일본군대에서 조종해본 경험있어서 우리가 탈수 있는것이니까 5,15일 이승만 박사를 모시고 자랑하구 비행기에 다가 이것을 전라도호 경기도호 경상도호 강원도호 등등 각 도명을 비행기 명칭으로 하여 그때부터 시작을 했어요.

김순용 그땐 우리 국력으로 그것하나 구매 하는데도 굉장 했겠군요

장지량 아 그렇지요 전국을 돌아다니며 연설하고 돈 모아산거예요 그렇지요 그것두 미군은 안팔아요

김순용 국가간의 외교도 우리가 부족했다는 얘기군요 다시 말씀하면 초라했군요.

장지량 할수 없어서 캐나다 대사를 통해서 산거요. 그런데 그사람들이 비행기를 말이요. 비행기에 기관총을 두정씩 달게 되어 있는데 기관총을 안달고 별도로 나중에 보낸다는거요. 기관총이 없는 비행기를 팔았단 말이요. 참 내 그러니 뭐 뭘 그래서 할수 없이 수류탄을 비행기에 싣고 올라가서 비행하면서 적군에게 수류탄을 던졌단 말입니다.

김순용 얼마나 초라 했습니까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장지량 아 말이 안돼 그 고생은 다 말로 다 못해요. 그래서 우리는 할수없이 아 인민군이 왔구나 26일 27일날 국방부에서 회의를 하는거요. 참모회의 김백일장군이 그때 차장이요. 준장이고 나는 공군의 작전국장이지만 공군에는 그런 정보가 없어 육군에는 사단이 있으니까

김순용 육군도 중요한 정보는 미군에서 얻어 왔다고 봅니다.

장지량 그렇지 나도 그때 참석을 해요. 공군 작전국장이지만 내옆에 바로 최종식씨요 최종식씨 그때 그시람이 육군의 공병단장 이에요

육군 사관학교 나보다 4년 선배요. 둘이 나란히 앉았어요. 그리고 저쪽엔 김백일장군 , 인사국장, 장창국 작전국장 대령이요. 저 한테는 일본 육사 1년선배예요. 우리는 늦게해서 대위고

김순용 그때 대위 였어요

장지량 그래 육군 그 시기는 겨우 소령이되고

김순용 우리 특별부대 있을때 그때가 소령이 공군을 또 창설 했잖습니까? 특별부대 있던 사람이 그분 이름을 잊어 버렸습니다.

장지량 누군지 내가 다 알아요. 그래가지고 참모회의를 하는데 육군도 확실히 몰라 어느사단이 어디에 얼마있는지 어떻게 있는지 몰라 황해도 제일 끝에 섬 있잖아요. 그것이 38선이 그리 동해 옹진 거기가서 꼭 38선이 그리 통한단 말이요. 그런데 인민군들이 그곳에 가서 자꾸만 진격을 하니 그러면 우리가 가는데 우리 비행기가 그 모양 이니까 수류탄을 싸가지고 가서 휙 던지고 휙 던지고 이런 전투를 했어요

김순용 얼마나 초라합니까

장지량 기가막히지 참

김순용 그 고생 많이 하신 우리의 산증인 아니십니까? 그런걸 아는 분이 없어요

장지량 없지요 그기에 한 스토리를 하기로 하지요. 김구 선생이 그때가 6.25전에 49년 말인가 일요일날 그때 마침 김신중령이 여기 옹진에 가 있었거든요. 정찰하고 그렇게 하고 있었지

김순용 김구선생의 아들이지 않습니까?

장지량 그렇지 그분이 중령이었어요. 그때 당시 나는 여의도에 와 있었거든요. 그때 우리에게 소식이 왔어요. 김구선생이 총살 되었다고 범인은 안두희 육군소위요 포병부대 소위요 평소에 안두희가 김구선생을 많이 찾아 다녔거든요. 선생님,선생님하고 다녔어요. 그래서 김구선생이 평소에 손자처럼 대했는데 그놈이 가서 말이요 일요일날 어쩌구 ,어쩌구 하고는 총으로 쏴 버렸데요. 아 그때 전화가 있나 전보가 있나 비행기가 있나

김순용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지량 모르지 그래서 내가 두사람이 탈수있는 비행기를 옹진으로 보냈단 말이요. 옹진으로 가서 빨리 모셔와라 한 두시간 후 아니 3시간쯤후에 왔어 여의도로 그때는 김구선생이 세상을 뜨고 난 다음이요. 돌아가신 그날이요 우리하고 다섯명이 멤버가 있었거든 김신, 장성환, 신우윤, 중국에서 나온 김영철 다섯명이 형제 처럼 지내는 사이였어요 그러니까 6.25전 49년 가을이였지요. 자세히 말하면 정말 억울한 일이 한둘이아니요

김순용 이북 김일성정권 국방력은 6.25당시 남한과 북한의 군사무기를 비교 해주시지요

장지량 북한은 200대나 있었어요

김순용 그당시 환경을 설명 해 주시죠 이북은 얼마나 무장이 잘 되었고 우리는 얼마나 되었는지 캐나다에서 무장하나 없이 구입한 비행기 10대에 기관포 하나 없이 수류탄을 또 후퇴하는 좀 그건 정말 우리 후배들이 알아야 합니다.

장지량 이야기를 하지요. 제가 책을 썼지만 그렇게 자세히 까지는 못썼어요. 특별히 6.25 전쟁발발부터 휴전때 까지 평양 제주 우연히 사천비행장

김순용 그땐 총장님께서는 조종사 였지요?

장지량 활주로가 대구에 었었어 아무도 몰라요. 제주에도 활주로가 없고 전부 풀밭이요..

김순용 그땐 제주도는 조그만 했죠

장지량 남쪽에 있는것 일본해군이 만든 조금만한 것이 있는데 그것을 쓰지도 못하고 북쪽에 있는것을 썼는데

김순용 모슬포 있는데 말이죠

장지량 3월경에 대구로 왔어 박렬이라고 아무도 몰라요. 실망을 하고 박대령이라고 뒤에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돌아가는거요. 그런데 바람이 조금 불었는지는 모르는데 우연히 해인사 산 위로 지나 가는데 왼쪽으로 사천비행장이 보인단말이요. 활주로가 콘크리트포장으로 되어 있고 유도 도로도 조성되어 있고 얼마나 기쁜지 위에서 보니 박대령이 자고 있어 흔들어서 보란 말이야 그러니 쓱 보더니 엄지 손가락으로 이거다 좋다 이말이야 오케이 알았다 내린다 알았다 이거야 사천에 내렸다 활주로가 다 콘크리트로 되어있고 그것은 처음보는거요.

김순용 그곳에 진주가 옆에 있는데요.

장지량 그땐 진주가 뒤에 있는줄 몰랐어요.오정석이라고 그 친구는 경비행기 타는 사람인데 저쪽에서 경비행기로 조종사들 훈련 시키느라고 조금타고 있더라구 가만히 보니 쫓아 왔어요. 전쟁나구 처음 만나는거요. 웬일이냐구 아니야 비행장 좀 볼려구. 찦차 가져오라구 하고서 찦차타구 비행장을 돌아보니 기가 막히는거요. 제주도의 풀밭생각을 하니 얼마나 좋아 그땐 사천이라는데가 세상에 그렇게 그런 시골이 없어요. 길두 없고 그리고 초가집이고

김순용 일본사람들이 비행장만 만들고 도로는 없이 엉망이었군요

장지랑 꼴이 아니요 삼천포에서 생선이 많이나 나중에 가보니까 생선 잡아서 생선장사하는 사람이 있었어 사천에서 우리가 시작 하는거요. 그 곳에서 여러가지가 있지만 우선 한가지만 얘길 하겠습니다. 한달반이 됐는데 보니까 그전에 인천에 상륙을 했다가 인천상륙으로 서울을 수복 하니까 대부분이 낙동강까지 왔다고 하니 인민군들이 도망을 가는중이야 대부분은 동쪽 산을 통해서 도망을 가고 1개사단은 남쪽에 있는 사천 진주 지리산으로 도망을갔어요.

김순용 우리군이 연합군의 도움으로 후퇴만하던 우리 군의 진격하는 인천상륙작전으로 낙동강 근처 북한군들이 사방으로 흐트러져서 도망을 가는중 이었군요.

장지량 인천상륙작전으로 사방으로 도주하는데 북쪽으로는 못가지요. 대구까지는 못가고 낙동강까지 남진하여 점령해 왔어요. 그런데 우리는 제주-사천으로 왔다 대구에서 20-30명 을 먼저 보내고 대구는 미군이 많으니 우리는 사천으로가라

김순용 그때 육,해,공군의 전투력은 다 아시잖습니까? 공군의 그때 그곳 상황은 국민들은 왜 전투도 못했느냐? 왜 계속 어이없이 후퇴만 했느냐?

장지량 육군도 북한 인민군이 여러군데서 공격해오니까 패배할게 뻔하니까 후퇴를 했지요. 무기가 있나 뭐가 있나요. 공군은 L4, L5 잠자리 비행기 그리고 10대의 F16을 도입했는데 무장 안된것 이건 나중에 얘기하고 더 중요한것 오정석 이라구 일본 군대 지원병 출신인데 조종사 노릇을 좀 했거든 우리 SD비행기들을 타고 있는데 그 집이 사천이요 그리고 그 경비행기 훈련대장을 맡았거던 활주로가 쭉 있는데 그 넘어서 지금 훈련을 시키고 있었어요. 조그만 젊은친구들을 L9, L6 우리가 P6로 내리니까 오정석이가 왔다.차를 타고 쫓아왔어 와보니 내가 턱있거든 그곳에서 반가워 가지고 우리가 봤다 제주도로 올라가야 겠다는데 나를 붙잡고 가기는 어디로 갈려는가 이친구야 여기 내고향이야 여기서 10리에 진주가 있어 진주서 저녁먹구 그리구 가 하고 나를 붙잡는거요. 아니야 나는 가야돼 나를 붙잡더니 진주에는 다 있어요. 저하고 같이간 박대령이 자고 갑시다 그런단 말이야 그곳에서 하룻밤을 자는거야 하룻밤을 자고 그다음날 제주로로 갔어요 제주에 단장이 장덕찬씨라고 민간 조종사가 있어 40시간을 탔어 부단장이 김영택 작전참모 야! 너희들은 비행장을 보러 간다더니 맨 술만 쳐먹구 왔느냐 아놈들아 하는데 할말이 있어야지요 간것은 사실이구 그 근방에 사천으로 가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장단장이 평안도 사람이고. 일본시대에 비행기를 어떻게 많이 탔는지 10,000시간이나 탔어요. 10,000시간이나 탄사람이 일본 전체에서 한사람이 있을까 말까 하지요. 아니 일반 비행기로 그러면서 그분이 사천을 가 이놈아 사천이라는데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시골 땅인데 어디 비행 하는데 사천을 가. 우리가 벼락을 맞았어 그만 참 기가 막히는 거요.

장지량 진주에서 저녁에 저녁식사를 하는데 그 진주의 음식이 다 전주음식이더군요. 아 그기가 전주음식 비슷해요

김순용 똑같진 않아도 좀 닮았어요

장지량 아니 그것은 그럴 이유가 있어요. 그곳에서 일본 군대와 싸워서 진주에 있던 유명한장군이 싸우는거요. 둘다 밀고 당기고 하다가 그곳을 일본에 뺏겨서 일본이 그곳을 점령해서 술한잔을 먹는거요. 그곳에 있는 기생들을 다 불러 올것 아니요.

장지량 그중에 한 유명한 부잣집 딸이요. 옛날에는 부잣집 딸을 보낸데 붙잡혀서 그곳에 있었단 말이요 그아가씨가 대단한 아가씨인데 내심 일본놈들은 내가 가만히 안둔다고

김순용 애국정신이 대단한 아가씨네요

장지량 그렇지요. 술을 잔뜩 먹여 밖으로 나가자고 바람도 쐬고 참 경치도좋다고 하면서 술 잔뜩 먹은 일본장을 데리고 나와서 바위 위에 일본장을 안고 손 깎지를 끼고 강으로 뛰어 들었 잖아요.

김순용 아 그 이야기가 논개 그 여자입니까?

장지량 그 여자란 말이요 아 논개 논개단 말이요.

김순용 아무튼 부잣집 딸이였네요

장지량 일본놈도 죽이고 자신도 죽고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논개가 전라북도 전주 근처 산중에 있는 유명한 부잣집 딸이라고 해요. 일본군대가 막 와서 전부 서울로 올라갔지요. 전라남도 ,경상남도 서쪽은 버려놓고 나중에 여유가 생기니 진주를 점령을 했어요. 일본군대가 가만히 두겠어요. 그때 그곳에 있는 여자들은 전부 내꺼 내꺼 할때다 거기에 논개가 그전에 있던 기생들이 죽고 난 다음에 남아 있었데요 거기서 술을 부어라 할 것 아니요. 하는 수 없이 술을 붓고 그중에서 일본군의 제일 높은 놈에게 술을 붓고 했단 말이요. 그놈이 기분이 좋았겠지

김순용 논개 집안이 운영하는 한정식에서 식사를 하셨군요

장지량 그렇지요. 알고 보니까 놀고 난후 나중에 자세한 얘기를 들었단 말이요. 진주의 음식이 전주음식이 대부분이요.

김순용 논개가 그리가서 그렇게 되었군요. 그말씀은 그정도 하시고 아까 그사천을 말씀 해 주시지요.

장지량 아까 그 사천 그래서 사천으로 옮겼단 말이요. 그다음날 단장이 우릴 불러 너희들 그 술먹구 놀다왔냐 이놈들 “아닙니다 올려고” 뭐야 얘기해봐 옛날 논개가 있던곳이 잖습니까 지금 보니가 논개보다 더 한 논개가 많아요 엣끼 이놈들 딴소리만 하고 자고 그 다음날 이리와 비행기 준비해 우리가 사천을 가보아야겠어 그래서 비행기를 준비했지 단장 과 부단장이 사천을 갔네 나하고 같이간 박대령하고 둘이앉아서 이봐 영택이 그자식 말이야 영감님 오늘밤 딱 붙잡고 그곳에서 하룻밤 재우고 하면 생각이 달라질거다 하고 웃고있었어 아니나 달라 그사람 안와 영감이 하룻반 지나고 오질 않아 우리처럼 진주서 하루 자는거예요. 당장하는 소리가 그전날에는 아놈들이 야단하더니 하는 소리가 야 우리 사천으로 가자

그것이 유명한 에피소드가 되었어요 그놈의 영감이 처음엔 야단 하더니 하룻반 자고 오더니 당장 가자고 그러는거요. 우리가 시천을 갔어요 사천에 갔는데 한달정도가 되었어요.

김순용 북한 인민군 패잔병이 군량미를 수급하기 위하여 지리산 사찰을 가서 식량을 탈취 하는군요

장지량 그렇지요. 인민군은 북쪽으로 도망가고 지리산으로 간 놈은 숨어있고 인천을 상륙해서 갈수가 없었습니다. 맥아더장군이 상륙을 하니 북한 인민군 1개사단이 지리산 정예군대로 해서 그때 식량이 없으니까 전부다 사찰에 가서 식량을 탈취 해오게 하는 겁니다. 사찰이 있고 식량을 뺏어 먹어야 되니까 거의 다 점령을 했어요 지리산을, 산청 경찰서장이 저에게 왔어요. 해인사근방 부근 북한 인민군들이 사찰이란 사찰은 다 폭격 해버리고 식량을 뺏어가고 지금 현재 해인사를 1개 대대가 점령을 하고있다.해인사에 식량을다 털어갈려고 온것 같다

김순용 라크 전투때 폭격등 초토화 시킨뒤 점령하고 다음은 흩어지 패잔병들과 싸우고 있는것과 비슷한 현상이 군요

장지량 제가 가만히 생각 해보니 전투기 1개 편대만 있으면 되겠다 1개 편대가 4대거든요 폭탄 장착해서 아니요 F50프로펠러 2차대전 때 미국 비행기 4대를 가지고 1개 편대를 편성해서 고문단을 통하여 보고를 했어요. 대구에 있는 본부에다가 그 때는 작전을 해야 하니까. 이틀후에 명령이 떨어졋어요 오케이 해인사를 폭격하라. 폭격 할려고 준비를 다해 놓았어요. 그다음날 오후에 우리가 폭격을할려고 그거야 그런데 그것이 내가 잘해서 한것두 아니구 내가 많은것을 아는것도 아니요. 그때는 해인사에 뭐가 있고 팔만대장경도 몰랐어요

김순용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요

장지량 그것두 운수야 작전은 내가 주로 하는데

김순용 그때 잘못 잘못 판단 하셨으면 해인사 국보 팔만대장경이 다 박살 날뻔 했습니다.

장지량 제가 그것을 얘기하려는거요. 김영환대령이 부단장이고 그 위에 장덕한장군이 단장이였어요. 제가 중학교 입학해서 4학년 때 일본 월간지를 본적이 있습니다. 그 월간지에 실린 2차대전때 독일군들이 프랑스 파리를 점령 할려고 그곳에 진격을 해서 파리시 전체포위를 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주력부대는 북쪽으로 도망가고 프랑스 방위군의 방위사령관이 있는데 사령관 스토리를 내가 소년일때 읽은적이 있어요. 독일군이 파리를 점점 점령하니 무조건 항복을 할것인가 불란서의 방위사령관 레이젼장군이 생각해보니 이 병력으로 아무리 해도 독일군에게 점령될,것이니 전쟁을 해서 총쏘고 칼쓰고 해도 점령이 된다고 판단에 이르게 되니 파리를 전부 다 초토화 되게 하느니 방위사령관은 차라리 무조건 항복해서 파리를 그대로 보존 했다는 전사를 중학교 때 읽은 스토리가 우연히 생각이 났어요. 미군대위와 제가 싸움이 붙었는데 나에게 시간이 되었는데 왜 출격을 안하느냐고. 다 준비 해 놓고서 출격을 안하는 저를 보고 있길래 제가 영어가 시원찮으나 ”헤이 유노 파리(Hey You know Paris?) 생각나냐구 물으니 대위 윌슨이 생각이 나겠어요. 오케이 유 노 제펜니스 교토(You know Japanese Kyoto?) 하니 샤너 미 비취 있이즈 코리아 유노 제펜니스 교토(Son of bitch, This is Korea. you know japanese kyoto ) 얘길 왜 하느냐? 이거지요. 처음에 미국이 일본을 점령하기 전에 B19로 엄청나게 폭격을 했는데 미국이 2개소는 제외하라고 했다. 1개소는 경도 (일본의 파리와 같은곳)와 또다른 1개소는 동경에 있는 금성 (천황이 있는곳) 이 2개소 폭격을 제외했다. 파리두 마찬가지고 미군의 폭격을 멈춘것도 생각이 나고 그래서 파리라고 해도 잘 알아듣지를 못해서 ‘제펜니스 교또(Janpanese Kyoto)’ 그러니대위가 ‘ (Son of bitch , This is Korea 이 자식아, 여긴 한국이다)‘여긴 한국인데 왜 일본 이야기를 하느냐고 한다. ‘유 노 파리(You know Paris?)’ 해두 내가 영어가 딸리니 알아듣지를 못하는것이지요. 미군대위 신분이니까. 위에서 한 내용을 잘 모르는것 같아 안타까웠는데 그때 마침 부단장인 김영환대령이 나타나서 다가와 왜그러냐고 해서 내가 대위에게 파리라고 해도 못 알아듣는다고 하니 김대령은 나보다 영어를 더 잘하니 영어로 설명을 하니까 미군대위가‘너두 마찬가지다’ ‘우리말 안듣고 너희들끼리 마음대로’이렇게 몰아 부친다. 이러다 보니 해가집니다. 우리공군 규정은 해가 지면은 폭격을 하지 않기로 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그 때 ‘헤이 캡틴(Hey Captain)’시계를 봐‘ ’ It will be sunset time when we get over target’ (해가 지므로 더 이상 폭격을 해선 안된다..) 이렇게 얘길 했습니다. 미군대위가 화를 낸다. 일몰이 되면 폭격을 안하는 것을 대위도 알거든요. ‘You know, It will be sunset time on target 당신도 알지 않은가. 해질 무렵의 공격이 될 것이다. (지금공격하면 규정을 어기는 것임?) 그러다 대위두 할수 없이 ’오케이(Okay)‘했다. 그래서 끝났어요.

해인사 폭격은 안했으나 그로인해 인민군들이 해인사에 있는 식량을 1개 대대병력이 다 탈취해서 달아났습니다. 밤새 도주 하면서 인민군들이 진지로 돌아 가는데 진지 가까이 몇 십리 갔는데 그때 미군이 출격을 해서 다 폭격을 해버렸다.

김순용‘ 그럼 해인사를 살려놓은 장본인이 장지량 참모총장이 맞지 않습니까? 당시는작전참모지만

장지량 내가 그 얘길 일부로 안한다 그래서 대위가 (Ok, I will report to Seung-Man Lee 이승만에게 보고 하겠다.) 그 당시는 이승만 대통령이 아닌 박사였다. (I will cut to your neck 너희둘다 목을 자르겠다.) 그리고 가버렸다. 미군대위가 보고를 했는데 이승만 박사가 화가 나서 “이 두놈을 포살해! 이놈들이 명령을 안듣고 하니까”

김순용 자초지종은 묻지두 않고 포살이라니 이승만 대통령도 무자비 하군요?

장지량 그렇지요 미군말을 안들었다는 것이지요. 총살두 아니고 포살이요. 그 다음날 참모총장이 찾아 와서는 용환이(참모총장의동생)와 나(일본육사후배)에게 “이리와 도대체 너희들은 전쟁은 않고 고문단들과 싸움만 하는데 너희가 군인이냐? 내가 대통령의 명령을 받았다 너희는 포살이야!“ 아! 그만 눈앞이 캄캄하고 나의 머리가 다 없어지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전쟁에서 죽으나 여기서 죽으나 마찬 가지다 라는 생각을하면서“좋습니다 포살 하십시오“ 하고는 제가 말씀을 드릴테니 들어 보십시오.하고 오늘날 왜 파리가 남았습니까? 처음부터 남았습니까? 알엔지 사령관이 무조건 항복을 해서

김순용 그렇지요. 어차피 승전하지 못할 바에는 전쟁 상대가 안될 것 같으면 항복이 오히려 좋은 결과로 나타날 수 있겠지요.

장지량 사람도 덜 죽고 파리도 남았다. 파리가 남은 것이 그사람 때문이다. 내가 미군대위에게 경도,동경의 예를 들어도 못 알아듣고 미국이 일본에 그렇게 많은 폭격을 했어도 그 두곳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해인사에 무엇이 있느냐? 팔만 대장경이 있는데 이것이 1개 편대가 가면 해인사 초토화 되는건 자명한 사실이다. 미군이 팔만 대장경을 압니까? 그렇게 하면 됩니까?

김순용 1개 편대가 가면 다 초토화 될 정도의 화력 입니까?

장지량 그때는 무장을 하고 있으니까 좋습니다 언제든 죽을 각오를 하겠습니다. 포살 좋습니다 하면서 우리가 대들었다

김순용 어차피 죽을 각오가 되어 있으니까 참모총장에게 항변 했군요.

장지량 그렇지요. 참모총장은 한사람은 자기 친동생이고 한사람은 후배의 말을 들어보니 내 말이 맞거든 그렇잖아요. 그렇다면 대통령에게 또 변명을 해야 되겠네요 했더니 “알았어 그것은 너희들 말이 맞다.그러나 고문단과 싸우면 되겠나?” 하길래 아니 우리가 싸울려구 갔습니까 아무리 얘길 해도 못알아 듣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그렇게라도 다투지 않으면 폭격을 해야 하는데 폭격을 하면 그것이 문제다 하니 “알았어 내가 각하에게 가서 말씀을 드리겠다. 그러나 고문단들과 싸우지마라.” 이승만 박사에게 가서 얘길 하니 대통령은 가만히 얘길 듣구 보니까 잘한 것이거든 “그런일이 있었나 알았어“ 그러나 전쟁을 도우려 온 사람들과 싸우면 안되지 않느냐. 그래서 그것으로 해결이 되어 오늘날 내가 살아있게 된것이지 대포 두방만 폭격하면 흔적도 없이 초토화 된다.

이것이 해인사의 첫 번째 문제였다. 그 이후 내가 2년 지나서 그곳에 가보았다. 내가 그곳을 보니 아! 이것은 내 힘이 아니고 하느님이 우리를 도왔구나 내가 참 잘 했구나 하는생각이 드는 겁니다. 해인사 법당(대적광전)에 참배를 하고 뒷편으로 돌아가면 언덕에 수십 계단이 있는데 그곳에 가면 창고가 있다. 그곳에 팔만 대장경이 있었다.

김순용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국보인 팔만대장경과 해인사 폭격문제는 큰공을 세우셨는데 그곳의 주지스님이나 불교계통에서 감사하다는 상패나 공로패같은 뭐 그런것은 없었습니까?

장지량 제가 세월이 흘러 50년 하고 16년후니까 1966년도에 공군 참모총장이 된후 1주일이 지났을때, 서울 조계사에서 3사람이 아! 이사람이 공군 참모총장이 되었구나 하며 찾아왔다.. 제가 불교는 아니지만 아는척 하며 극진히 인사를 했어요. 그때 그 사람들이 위에 사항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김순용 총장님! 우리가 모든 불교의 발전과 불교에 관한것을 명예롭게 생각합니다 총장님 같은 분이 계셨기에 우리나라 국보 제32호 팔만 대장경이 그대로 보존 될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장지량 그래서 아니 내가 무얼 했길래 당연히 하는것 아니냐 했더니 ”아니죠 군인이면 당연히 부셔버려야죠“ 3사람이 울먹이며 말했어요.

김순용 원칙은 부셔야죠? 대수롭찮다니요. 아닙니다 우리나라 역사에 팔만 대장경이 지금 현재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 총장님의 어려운 결단이 였다고 생각 합니다.

장지량 아뇨 아뇨 아닙니다 김영환 장군에게 내가 시켰습니다. 김영환 장군이 내 뜻을 그대로 해서 지켰어요. 같은 고문단 대위인데 그분이 나보다 더 잘 했는데 그분에게 공을 돌려야지 나보고 합니까? 내가 그렇게 말을 했다.

김순용 김영환장군은 먼저 퇴임을 했습니까?

장지량 아니 김장군은 그후에 나와 같이 강원도 강릉으로 출격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주로 육군과 북한 인민군이 싸우는 곳 이에요

김순용 그때 왜 어느 장군이 전사 했잖습니까. 비행기 타고 죽은 사람이 ...

장지량 제가 지금 그 얘길 할려는 거요. 그때 죽은 사람이 김영환 장군이 죽었습니다. 그 당시 둘다 대령이요. 제가 단장이구 김장군이 부단장이요. 강릉에서 많은 전투를 했어요. 동해안에 있는 북한 인민군을 폭격으로 섬멸하고 우리가 항구 북쪽으로 351고지가 있는데 이고지를 가지고 인민군과 뺏고 뺏기고 도망 가기를 서로가 6번을 했습니다. 그때 육사 1기 출신인 우리선배 이형근 단장이 저에게 부관을 보내서 좀 만나자고 내가 강릉에서 찾아갔다. 선배니까. 그때 부단장이요. 그 부단장하고 미군의 고문단이 대령인데 대령 스마트 라는 사람하고 둘이 앉아서 나에게 설명을 하는거요. 뭐냐하면 옹진이 있는데 351고지 이것이 38선 바로 위에 있어요.

김순용 좋은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죠

장지량 그렇지요. 그것을 뺏아서 점령하는 부대가 그 상당한 지역을 점령하는겁니다. 우리가 점령하게 되면 언덕에서 부터 북쪽에 평야가 있어요. 평야를 전부 장악하는겁니다. 그러니 굴을 파고 진지를 구축했습니다.

김순용 그때 휴전을 앞둔 시점 이군요

장지량 그렇지요 휴전하기 전이지. 그때가 53년 2월이니까 몇 개월 남았지요. 이형군 장군이 잘 왔다면서 반기더라구. 그분은 나보다 육사 4년 선배요. 미국의 대령 스마트라고 그때 그분이 나중에 유엔기구에 위원장까지 됩니다. 한번 우리가 가서 점령하면 인민군을 몽땅 섬멸시키고 또 인민군들이 공격해 오면 우리가 당하고 그때 엄청나게 전사 했어요.

김순용 그곳에서 전사자가 많이 생겼죠.

장지량 그럼요 한번은 미국의 해군이 와서 함포사격을 했어요 함포사격은 포탄이 돌면서 가다가 탄환이 폭발하지 않고 땅속에 박히면 이것은 불발이거든. 그러니 공군이 직접와서 폭격을 해 주어야 되겠다 그거요. 다 안된다고 하는데 저는 폭격을 시도 했어요. 인민군들의 터널을 파괴해 버렸는데 안타갑게도 휴전직전에 점령 되었어요. 지금도 북쪽으로 조금 가면 기념탑이 있어요.

김순용 고성 근처 이군요

장지량 아니 고성에서 더 북쪽으로 휴전선이 남방한계선 북방한계선 두줄이 있어 이곳 가운데 선이 휴전선이다 휴전선에 기념탑이 있어요. 그것이 오늘날 휴전 3개월 전 일이요.

그때 집에서 전보가 왔어요. 저의 부친이 위독하다는거요. 기지대장이 있었어요. 김 대위라고 김대위가 “큰일 났습니다 아버님이 위독 하시다는데요.” 알았어 내가 지금 작전중이니까 조금 기다려 했는데 두 번 세 번이나 찾아 왔어요. 그래서 내가 김대위를 불러 야 이놈아! 지금 전장에서 우리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데 아버지가 죽는다고 전쟁을 하다가 가야 하느냐? 너 이놈의 자식 군대에서 뭘 배웠어 임마. 앞으로 전보 나에게 가져오지 마라 알았어! 나 한테 4번을 온것인데 대위가 가지고 있었어요.

김순용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것은 총장님께서는 외유내강형으로 소문이 나있었어요. 부드러우면서도 한번 하며는 강하게 밀고 나가시는 총장님은 그런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우선 아버지가 위독하면 급히 갈판인데 오히려 기합을 넣어서 보내 버렸으니 전투를 잘 이끌어 놓으신것 아닙니까?

장지량 이건 두 번째이야기 이고 앞에 장남이야기가 있어요. 그애가 지금 매일경제 사장이요.

김순용 매일경제 사장은 참 처세가 좋찮아요”

장지량 아니 그때 사천 비행장에 있을 때 대전에서 임시 거처에 살다가 전쟁이 나서 그 와중에 장남은 52년 대구에서 태어났어요. 부대가 사천이니까 사천으로 이동을 했다. 아버지께서 나주에서 광주를 거쳐 군산에서 배타고 여수로 오셔서 여수에서 배타고 사천으로 리어카를 타고 오셔서 사천 우리집까지 고생 고생해서 아버님이 찾아오셨다

김순용 어르신의 손자 사랑하는 마음과 집념이 대단하시네요. 그 손자가 지금 매일경제사장이군요.

장지량 아 그럼 대단하시지요. 그때가 장남이 한 살박이인데 나이로는 두 살이지

아버님이 오셨는데 방이 있어야지.

김순용 저 같으면 못 갑니다.손자를 보기위해서 정말 대단하십니다.

장지량 그당시엔 모든게 잘 안 되어있던 시절이다. 산천시골에서 방 하나 구해서 겨우 마누라와 꼬맹이가 살고 있는데 그래서 저는 부대에서 자고 아버지는 아기하고 자고 애미는 장모님하고 조그마한 방에서 자고

김순용 아! 장모님도 같이 오셨군요

장지량 아니! 저는 장모님을 쭉 같이 모셨어요. 한 40여년 모셨어요. 장가가서 돌아가실 때 까지 내가 모셨어 아! 나두 대단해!

김순용 정말 대단하십니다.

장지량 아버지가 조금 계시다가 “나, 가야되겠다”고 그러시니 그양반이 양주를 좋아 하셨어요. 제가 집에 가면 양주1병하고 담배 한박스하고 꼭 가져 갔는데 전장에 무엇이 있단 말인가? 없어? 술 한잔 못 드시구 이틀을 방에 계시다가 나주로 돌아 가셨어요. 그래서 두달 반 후에 강릉 351고지로.

김순용 그러니 부친께서는 자식사랑으로 참모총장님을 그렇게 아끼시고 또 손자를 그토록

사랑 하셨네요.그거 보통 힘든것이 아닌데요

장지량 그렇지요. 지금 생각하면 보통 힘든게 아닐텐데 그때가 언제요. 전쟁중인데,우리 같으면 엄두가 안날거요.

김순용 할아버지가 복을 손자에게 많이 쏟아 부었는네요.

장지량 여수에 갔는데 여수에 철도가 있어요. 뭐가 있나요 조그마한 배타고 삼천포까지 와야돼요.

김순용 할아버지의 복을 받아서 그런지 지금 그분(매일경제 사장)이 상당히 평이 좋아요 장사장이 아버지의 부전자전도 있지만 힐아버지의 정을 듬뿍 받았으니 대단한 사람같아요.

장지량 아버지가 꼬맹이를 안고는 다른 사람들은 못 오게 하고 꼭 안고 이틀밤을 지내시구 그러다 집으로 돌아 가셨어요. 351고지 있을때 어머니가 전보를 띄우셨는데 전쟁중이니까 351고지에서 작전 끝내고 북한 인민군을 다 섬멸과 터널을 파괴하고 돌아오니 생각이 났어요. 전보가 또 왔지? 하고 물으니 ”왔습니다 3번째 왔습니다“ 다섯 여섯 번째 전보가 세상을 떠날 때 였어요 ”마지막에 돌아가실 때 그래도 내가 한번 보고 싶다고‘

장지량 돌아가시는 순간에 전보를 안 보낼수가 없잖습니까?

김순용 조그만 내용 같지만 총장님께서는 뼈를 깍는 아픔이였겠습니다.    

 

▲ 위에 글은 마당쇠가 상하수도신문사 편집국장 하면서 신문에 연재한 내용임

● 자서전 : 빨간마후라  하늘에 등불을 켜고 1권 기증받음.

(내용을 보면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일본육사에 입교해서 나라를 구해야 된다고 밤마다 비밀회의를 하는 피나는 구국정신이 그대로 나타남) 서점에 판매가 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