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보공간 ▼/★.그때 그시절

중국 역사적으로 이름난 미인들

朴正培(박정배) 2012. 3. 10. 20:00


 

조비연(趙飛燕)

중국 한나라 황후 조비연

 

동서고금을 통해서 가장 날씬한 여인으로 불렸다. "날으는 제비"라는 뜻으로 본 이름 "조의주" 대신 조비연으로 불렸다. 뛰어난 몸매에 가무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 그녀는 한나라 성황제의 총애를 받아 황후의 지위까지 오르게 된다.

 

한번은 황제가 호수에서 선상연을 베풀었는데, 갑자기 강풍이 불자 춤을 추던 조비연이 휘청 물로 떨어지려 하지 않는가. 황제가 급히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는데 춤의 삼매경에 빠진 조비연은 그 상태에서도 춤추기를 그치지 않아서 조비연은 황제의 손바닥 위에서도 춤을 추었다.

이런 연휴로 "비연작장중무(飛燕作掌中舞)" 라는 고사의 주인공이 되기까지 했다. 이렇게 임금의 총애를 받은 비연은 세상에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 세월은 겨우 10년, 황제가 죽자 조비연은 탄핵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평인으로 걸식을 하다가 자살로 그 생을 끝맺고 만다.

중국에서 미인을 표현 하는 대표적인 어휘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 침어낙안(沈魚落雁) 폐월수화(閉月羞花) 』이다. 그중에서 각각 "침어(沈魚)", "낙안(落雁)", "폐월(閉月)", "수화(羞花)"의  대명사 격인 4명의 여인을 골랐으니 이들을 일컬어 [ 중국 4대 미인] 이라 칭하였다.
그런데 아쉽게도 4대미인에서 탈락한 미녀가 있으니 그녀가 바로 조비연(趙飛燕)이다. 탈락한 이유는 그녀의 특징이 아름다움보다 몸가짐이 가벼움에 치우쳤기 때문인 듯 싶다. 대신 그녀를 지칭할 때는 항상 4대 미인의 한 사람인 양귀비와 더불어 거론된다.

 

바로 "연수환비(燕瘦環肥)"라는 성어인데 그 뜻은 다음과 같다. 조비연(趙飛燕)은 말랐으나[瘦] 미인이었고, 양귀비[본명: 양옥환(楊玉環)]는 뚱뚱했으나[肥] 미인이였다. 또한 흔히 일컬어 조비연(趙飛燕)은 날씬한 미인의 대명사로 임풍양류(臨風楊柳)형 미인, 양귀비(楊貴妃)는 풍만한 미인의 대명사로 부귀모란(富貴牡丹)형 미인.이라 한다.

 

물고기가 미모에 놀라 헤엄치는 것을 잊고 가라앉았다는 "서시" 기러기가 나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지게 만든 "왕소군" 달이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었다는 "초선" 꽃이 부끄러워 잎을 말아올렸다는 "양귀비" 등 이 4대 미인들의 미모에 얽힌 고사는 워낙 유명한 이야기들이 많다.

 

채문희(蔡文姬)

 

蔡邕(채옹)은 조조와 매우 절친한 사이로 그에게는 文姬(문희)라는 딸이 있었다.
그녀는 총명하기 이를 데 없어 그 소문이 자자하였다. 삼국시대 때의 대학자였던 아버지 채옹은 동탁이 한달만에 벼슬을 세번이나 올려줄 만큼 뛰어난 인물로이 당시에 이름을 날렸던 인물이었고(그러나 그는 생전에 수천권의 저서를 남겼다고 하는데 몇 차례의 전쟁을 거치면서 모조리 소실되어 한 권도 남지 않게 되었다.),

 

아버지만큼 그녀 또한 시와 탄금에 능한 재원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동탁이 조정을 떡 주무르듯 할 시기에 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 노략질을 일삼던 흉노병에게 잡혀 흉노의 좌현왕의 첩실로 보내진 여인으로서 그녀는 그곳에서 좌현왕과의 사이에서 두 자녀를 낳았다. 그리고 채옹은 동탁이 살해당해 그의 시신이 저자거리에 내버려지자 그 시신곁에서 통곡했다는 이유로 왕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채옹이 사망하자 채씨의 혈통을 염려한 조조가 천금의 돈을 흉노의 좌현왕에게 주어 그녀를 12여년만에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해주었다. 채문희가 돌아오자 조조는 옛날 절친했던 채옹과의 정분을 생각했음인지 동관근처 남전 땅에 장원을 세우고 그곳에서 살도록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의지할 곳 없는 채문희를 염려해 둔전도위(벼슬이름)로 있는 동사에게 개가시키는등 특별히 애우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동사는 법을 어겨 조조 수하의 사람에게 사형 판결을 받고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데 채문희가 조조에게 달려가 남편의 죄를 사면해 줄것을 부탁하니 조조가 흔쾌히 허락한 일화도 있다.

 

그리고
이때 조조의 부탁으로 아버지가 남긴 저서중 몇 백권을 기억하고 있던 채문희가 다시 기억을 되살려 복원하게 되었다고 하니 실로 머리가 아주 좋았나 보다. 이로 인해 조조가 채문희를 데려옴으로써 고대 문화를 보전하는 업적을 세웠다는 일부의 평가도 있다. 또한 채문희는 <비분시(悲憤詩)>와<호가십팔박(胡家十八拍)>이란 시에 원한의 글귀를 남겼는데 이 시에는 좌현왕과의 미묘한 정과 두 아이들과의 생이별을 처절하게 읊고 있다.

 

억지로 간 타향이지만 이미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된 그녀이니 사랑하는 아이들을 남겨 두고 떠나자니 발이 떨어지지 않고, 그렇다고 원수인 흉노의 땅에 남아 있기도 싫어서 많이 망설였다고 한다.
 
문희가 9살 때의 일이다. 채옹이 밤에 거문고를 타는 도중 줄 하나가 끊어졌다. 옆에서 조용히 이를 듣고 있던 문희가 채옹에게 말했다.
 
"아버님, 거문고의 둘째 현이 끊어졌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거문고의 어느 현이 끊어졌는지 정확히 알아내는 딸의 재주를 비범히 여긴 채옹은 이번엔 일부러 거문고의 현을 아무거나 하나를 골라 끊었다. 
 
"이번에는 네번째 현이 끊어졌습니다."
 
 이에 채옹이 불을 켜고 보니 과연 네번째 현이 끊겨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채옹은 그녀의 총명함을 널리 자랑하였다고 한다. 
 
어느날 조조가 한중의 장로를 공격하러 가기에 앞서 채옹의 집을 잠시 들른 적이 있었다. 조조는 채옹의 극진한 접대를 받는 도중에 그의 등뒤에 있는 병풍에 쓰인 기이한 글귀를 발견하였는데 曹娥碑文(조아비문) 끝에 채옹이 '黃絹幼婦外孫臼(황견유부외손제구)'라고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조조는 익히 문희의 총명함을 듣고 있었던 터라 그녀를 불러 그 글귀가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黃絹(황견)은 노란 비단, 즉 실(絲)에 색(色)을 입힌 것이니 絲와 色을 더한 絶자가 되고, 幼婦(유부)는 어린(少) 여자(女)이니, 妙자가 됩니다. 外孫(외손)은 딸(女)의 아들(子)이니 好가 되고, 薺臼(제구)는 五辛(오신 : 맵고 짜고 시고 쓰고 아리고 한 것)을 받아들이는 그릇이니, 즉 풀어 말하면 受와 辛을 뜻하므로 두 글자를 합치면 ?(辭자와 동자)가 됩니다. 곧, '絶妙好辭(절묘호사)'로, '절묘하고도 아름다운 좋은 글이다'라는 뜻을 나타내옵니다."
 
(참고로 薺는 '고추냉이 제'자로 간혹 다른 글에는 ? '회 제'자로 쓰여있다. 파, 부추 따위 매운 채소를 잘게 다져 간장 기타 조미료에 버무린 것을 나타내는 글자이다. 그러므로 薺臼(제구)란, 짜고 시고 쓰고 아리고 하는 五辛을 받는 그릇, 즉 양념그릇을 뜻한다.)

이 풀이를 듣고 조조뿐만 아니라 듣는 사람 모두 그녀의 총명함에 감탄하였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총명함을 자랑해 왔던 그녀가 헌제 때, 북방의 흉노족에게 잡혀가 흉노의 좌현왕과 강제로 결혼하게 되었으니 미모와 지성을 함께 갖추었으나 참으로 박복하였다 할 수 있다.  

 

탁문군(卓文君)

가도사벽     

집안이 네 벽뿐이라는 뜻으로 집안 형편이 어렵다는 것을 이르는 말.

 

가도벽립()이라고도 한다. 《한서()》 〈사마상여전()〉에 나오는 고사성어이다.

'탁문군()이 밤에 사마상여에게로 도망쳐 나오자 사마상여는 탁문군과 함께 말을 타고 달려 쓰촨성[] 청두[]로 돌아왔는데, 집안에는 아무것도 없이 네 벽만 세워져 있었다[ ].'

중국 전한()의 문인으로 시를 잘 지은 사마상여는 관직에서 물러나 쓰촨성 린충[?]에 있는 왕길의 집에 머무르는 동안 린충의 대부호 탁왕손()이 베푸는 연회에 초대를 받았다. 연회에서 사마상여의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탁왕손의 딸 탁문군이 사마상여를 사모하게 되었다. 사마상여와 탁문군은 서로 사랑하였으나, 사마상여의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탁왕손은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하였다.

 

탁문군은 사마상여를 따라 청두에 있는 그의 집으로 한밤중에 몰래 달아났다. 사마상여의 집이 찢어지게 가난해 살림살이가 없고 방안에는 네 벽뿐이었으므로 탁문군은 사마상여와 결혼하여 선술집을 차려 생활하였다. 그뒤 한()나라 무제()가 사마상여의 《자허부()》를 읽고 감동하여 그에게 벼슬을 내렸는데, 사마상여가 이름을 떨치자 그때부터 탁왕손의 집안에서도 사마상여를 얕보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진원원(陳圓圓)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황제는 전귀비를 몹시 총애했다. 이 때문에 황후는 전귀비를 몹시 질투했다. 그날밤도 전귀비한테로 가버린 황제를 생각하며 황후는 질투와 고민에 모대기고있었다. 그때 딸의 거처로 황후의 부친 가정백이 찾아왔다. 요즘 딸이 고민하고있는 영문을 알고있는 가정백이 한가지 계책을 드렸다.


《황후마마, 차라리 예쁜 기생을 하나 사서 황제페하께 드리면 황제페하는 그 기생에게 빠져 더는 전귀비를 총애하지 않을겁니다. 그리고 그녀는 한낱 기생출신이니까 황제페하께서 아무리 총애한다하더라도 황후마마께는 아무런 위험이 없을 줄로 아뢰옵니다.》


《그 계책이 괜찮기는 하나 어디 황제페하를 홀딱 반하게 할만한 기생이 있겠어요?》
《황후마마, 소신이 전귀비보다 백배는 더 미모가 출중한 기생 하나를 알고있사옵니다.》
가정백은 지난밤, 자기의 혼을 송두리째 뽑아놓던 그 아릿다운 기생을 생각하니 지금도 온몸이 나른해나며 황홀경에 빠져있는듯 했다. 황후는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방도가 없는지라 그 기생을 데려오로록 부친에게 명령했다.


가정백은 이튿날 곧 기녀원에 가서 그 예쁜 기생을 사서 숭정황제께 올렸다. 그 기생을 본 황제는 그 자리에서 혼이 빠져 달아나는듯 했다. 그 기생의 눈섭과 눈동자는 그린듯이 수려하고 용모는 말로 형용할수 없이 아름다웠다. 두 눈동자는 호수에 물결치듯 찰랑거리고 입술을 살짝 벌리고 웃는데 그 아름다운 자태는 양귀비도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울 지경이였다. 이 경국지색의 미녀가 바로 중국고대력사에서 4대 명기중의 하나로 불리는 진원원이였다.


《아아, 그야말로 천하제일의 미녀로구나!》
황제는 연신 감탄하면서 가정백이 물러나기 바쁘게 진원원을 끌어안고 침대에 올랐다.
한편 황후는 황제가 더는 전귀비의 거처로 찾아가지 않으니 몹시 기뻐서 진원원을 불러들였다. 진원원의 용모가 선녀같이 아름다운것을 보고 황후는 깜짝 놀랐다. 진원원의 옥같은 손을 잡자 황후는 온몸이 나른해지고 취해서 정신이 몽롱해졌다. (같은 녀자인 나도 이렇게 취하는데 하물며 남자들이야 더 말해 뭣하랴.) 황후는 이런 생각을 하며 질투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진원원을 맞아드린 숭정황제는 제정신이 아니였다. 진원원한테 넋을 송두리째 빼앗긴 황제는 진원원의 곁을 한시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조정으로 나가 정사를 돌보지 않고 침실에서 진원원을 안고 즐기며 그녀에게 연지를 발라주고 눈섭을 그려주기도 하고 그녀의 발을 씻어주고 혀바닥으로 그녀의 오이씨같은 발을 핥아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를 곧 귀비로 봉했다.


《짐의 보배 진귀비여! 짐은 앞으로 그대를 황후로 봉하겠소. 이제부터는 황후나 다른 귀비들 그리고 비빈이나 귀인들 가운데 한사람도 눈에 차는 녀인이 없소. 그대를 봉황이라 한다면 이 궁안의 아니, 이 세상의 다른 녀자들은 모두 오리나 게사니와 다름없소. 짐은 봉황같은 그대와 더불어 천년만년 살겠소!》


하지만 숭정황제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천하의 영웅 리자성이 맹렬한 기세로 쳐들어온다는 급보가 자꾸만 날아들었다. 진원원을 아쉽게 품에서 놓아주고 조정으로 정사를 돌보러 나갔다가 정오무렵에 들어온 황제는 안색이 창백했고 눈살을 찌푸리고있었다. 황제는 갑자기 진원원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너때문에 나라일을 망치게 되였어. 네가 궁안에 머무는 며칠동안 역적 리자성이 셋채의 성을 함락했어. 넌 나라를 망치는 요녀야! 짐은 녀색에 빠진 못난이가 될수 없어. 즉시 너를 궁에서 내보내고 정치를 새롭게 해야겠어. 아아, 그 리씨 도적놈은 정말 무서운 놈이야!》
진원원은 생각했다. (도데체 리자성은 어떻게 생긴 분일까? 황제마저 무서워 벌벌 떨다니. 그분은 꼭 영웅호걸일꺼야.) 진워원은 황제마저 벌벌 떨게 한 리자성을 영웅이라고 속으로 흠모했다.


진원원은 황궁에서 나온 후 주국장 저택으로 갔다. 어느날 주국장은 잔치를 크게 차려놓고 손님을 청했다. 잔치에 참석한 손님들은 꾀꼴새같은 목소리로 노래하고 나비처럼 춤을 추는 진원원을 보고 모두 넋을 잃었다. 그중에서도 정욕으로 이글이글 타는듯한 오삼계의 눈동자가 제일 로골적이였다. 오삼계는 그 즉석에서 주국장에게 진원원을 달라고 요구했다. 주국장은 진원원을 내놓기 싫었으나 오삼계의 권세가 무서워 찍소리 못하고 진원원을 내주었다.

 

진원원을 얻은 오삼계는 천하를 통째로 얻은듯 너무도 기뻐서 어쩔줄을 몰랐다. 진원원에게 혼을 송두리째 빼앗긴 오삼계는 밤낮 진원원을 끌어안고 황홀경에 빠져버리는 재미에 제정신이 아니였다. 그러다가 숭정황제의 명령을 받고 만주의 군사들이 쳐들어오는것을 막으러 산해관으로 갔다. 떠나면서도 오삼계는 진원원과 떨어지기가 아쉬워 출발시간을 지체하기까지 했다.


1644년 3월 19일, 리자성이 북경을 점령했고 숭정황제는 매산우에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 리자성의 부하가 오삼계의 집을 뒤지다가 천하미녀 진원원을 발견하고 곧 붙잡아서 리자성에게 바쳤다. 천하제일미녀를 본 리자성은 미칠지경으로 기뻤다. 그는 매일밤 진원원과 잠자리를 같이 하며 즐거운 신음을 뽑아냈다. 진원원은 이처럼 정력적인 남자를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흠모하던 영웅에게 기꺼이 몸을 내맡겼다.


한편 오삼계는 리자성이 북경을 점령하고 자기의 미녀를 가로채갔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분하여 만주사람들과 련맹하여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리자성은 싸움에서 패하였지만 진원원을 끌어안고 호탕하게 웃었다.


《나의 보배 진원원이여! 짐은 한평생 세가지 자랑할만한 큰일을 했어. 첫째는 명나라 황제를 핍박하여 죽게 만든것이고 둘째는 짐이 대순국의 황제가 된것이고 셋째는 천하제일미녀 진원원을 데리고 잔것이야. 이 세가지 일중에서 짐이 가장 의기양양하게 여기는것은 세번째 일이야. 진원원이여! 짐이 너를 안고 자봤으니 이제 죽어도 원이 없노라!》


리자성은 오삼계에게 패하여 도망치다가 눈물을 뿌리며 진원원과 혜여졌다. 오삼계의 부하는 진원원을 발견하자마자 그녀를 데리고 가서 오삼계에게 바쳤다. 진원원을 다시 안은 오삼계는 너무도 기뻐서 미칠지경이였다. 오삼계는 진원원의 속살을 파고들며 말했다.


《나의 귀염둥이 진원원이여! 다른 사람들이 나를 매국노라고 욕하지만 너를 다시 얻었으니 그와 같은 악명을 듣는것도 보람있는 일이야!》
진원원은 오삼계의 정에 감격하여 그가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은 역적이라는것도 잊고 기꺼이 그에게 몸을 내맡겼다.


그후 오삼계는 청나라의 평서왕으로 봉해졌다. 그때 천하제일의 무림고수로 불리는 호일지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당시 이름난 영웅호걸이였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사천성 성도에서 진원원을 보게 되였다. 아름다운 녀인은 소매자락속에 있는 옥과 같은 손으로 입술을 가리고 방긋 웃고있는데 온갖 교태가 뚝뚝 떨어졌다. 호일지는 온몸이 나른해지고 취해서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지경이였다.

 

진원원은 천하의 모든 남자들이 자기를 보기만 하면 하나같이 넋을 잃는 광경을 수없이 많이 보아서 호일지가 자기를 보자마자 얼이 빠지는것을 보고도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호일지는 그후부터 혼백을 빼앗겨 정신을 차릴수도 없게 되였다. 몰래 진원원일행을 따라 운남에까지 간 그는 곧 신분을 감추고 평서왕부에서 원예사노릇을 하며 진원원을 위해 꽃을 심고 잡초를 뽑아주곤 했다. 그는 진원원의 미색에 빠져 기꺼이 그녀의 하인노릇을 하며 그녀를 위해 채소를 가꾸고 땅을 쓸며 나무를 하고 물을 길었다. 그는 매일매일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볼수 있는것만으로도 무상의 쾌락을 느꼈다.


그는 이렇게 줄곧 23년동안 진원원의 하인노릇을 하며 아침저녁으로 그녀를 보기만 하면 만족할수 있었다. 이 23년동안 진원원은 그에게 쉰다섯마디를 건넸을 뿐인데 그는 진원원이 자기에게 한 마디마디를 한마디도 빠짐없이 모두 기억했다. 어느날 진원원은 그를 보고 꽃을 꺾어오라고 했다. 그는 너무도 행복했다. 진원원을 위해 꽃을 꺾는 일이 그의 일생에서 제일 행복한 일이였다.

 

그는 가슴을 들먹거리며 꽃중에서 제일 탐스럽고 제일 예쁜 꽃을 꺾어왔다. 그가 넘겨주는 꽃을 봤던 진원원은 무심결에 그의 손목을 잡았다가 놓았다. 그 순간 호일지는 너무도 감격스럽고 행복하여 넋을 잃을 지경이였다. 그후 호일지는 천하제일미녀의 섬섬옥수가 닿았던 자리에 코를 대고 미녀의 향기를 맡으며 련 사흘동안 흥분되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아아, 천하제일미녀 진원원이여!》하고 크게 부르짖고는 곧 숨을 거두었다.

 

견황후(甄皇后)

 

한나라 무제(武帝 : 한무제)는 한나라 황제들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보위에 있었는데, 궁녀들은 무려 8천명에 이르렀고 61세 때에도 젊은 여인 첩여( : 후궁의 직위) 조씨(趙氏) 여인을 총애하여 불릉(弗陵)이라는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한무제는 자신의 건강을 관리하는 비결(秘訣)로 하늘의 일정(日精)과 해와 달의 정기(精氣)를 복용하였다고 하는데, 이를 위해 장안의 궁에 백량대(柏粱臺)를 세우고 그 위에 동인(銅人)을 세웠다고 합니다.
  
  백량대는 높이는 20장(丈), 구리기둥의 둘레는 10아름이고, 이 동인은 승로반(承露盤)이라는 쟁반을 손으로 받쳐 들어 삼경이 되면 북두칠성의 영이 서린 이슬을 받습니다. 황제는 이 이슬에다가 옥(玉)을 갈아서 가루를 내어 타서 마셨다고 합니다.
  
  황제들의 삶은 항상 여인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여인들의 매력에 쉽게 빠지기도 하지만 이내 싫증을 내기도 합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남녀간의 가슴 뛰는 사랑이 지속되는 것은 18개월~30개월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남녀가 만난 지 2년 정도가 지나면 대뇌에 항체가 생겨 사랑의 감정에 관여하는 화학물질인 도파민과 페닐에틸아민, 옥시토신 등이 더 이상 생성되지 않고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1999년 신디 하잔 교수(미국 코넬대)의 연구결과 남녀가 서로 얼굴을 익히고 데이트를 하고 육체적으로 결합해 아이를 낳는 과정은 18~30개월이면 끝나는데, 이 단계가 지나면 남녀는 더 이상 가슴이 뛴다거나 손에 땀이 나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하잔 교수는 “애정이라는 것은 대뇌에서 도파민과 같은 화학물질이 분비되어 형성되는 일종의 생리적인 상태”이며 사귄 지 2년쯤 지나면 대뇌에 항체가 생겨 애정 효과가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문제지요. 여자는 남자의 아기를 낳았으니 더욱 그 남자에게 의지해야 하는데 남자의 사랑은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식기 시작하니까 얼마나 많은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즉 아이를 낳고 나면 애정 화학물질은 더 이상 생성되지 않고 30개월 정도가 지나면 남녀가 헤어지거나 헤어지지 않더라도 애정이 습관으로 변질된다는 것이죠. 이 조사는 남자가 여자에 비하여 쉽게 사랑에 빠지며 여성의 대뇌에 있어서 애정 화학물질의 생성이 남성에 비하여 느리고 둔하다고 합니다.
  
  (1) 업(業)의 시작 - 견황후, 그 후
  
  나관중 ‘삼국지’에는 매우 흥미로운 사랑이야기가 있습니다. 조조가 원소를 정벌했을 때 조비는 원소의 집 후당으로 들어갑니다. 그때 울고 있는 두 여인을 보던 조비는 그 가운데 한 젊은 여인에 반하고 맙니다. 그 여인이 바로 원희의 아내 견씨(甄氏 : 182-221)였습니다. 조조가 견씨를 보더니 과연 며느릿감이라고 인정하여 조비는 이 여인을 아내로 삼아 허도로 돌아갑니다(나관중 ‘삼국지’ 33회).

 

  견씨는 이후 등장하지 않다가 조비가 죽을 무렵에 다시 등장합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추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견씨를 아내로 맞은 조비는 위나라를 건국하고 황제위에 오르는데 이 때 견씨는 황후가 됩니다. 그런데 조비는 날이 갈수록 곽귀비를 총애합니다. 곽귀비는 수작을 부려서 ‘견씨가 조비에게 위해를 가하려 한다’고 모함합니다. 결국 조비는 견씨에게 사약을 내려서 죽게 하고 곽귀인을 황후로 삼습니다.(나관중 ‘삼국지’ 91회)
  
  정사에는 곽귀인이 “지모와 술수가 있다(위서 : 후비전)”는 말만 있습니다. 견황후전에는 “곽후(郭后)ㆍ이귀인(李貴人)ㆍ음귀인(陰貴人) 등이 모두 황제의 사랑을 받자, 견씨는 실의에 잠겨서 황제를 원망하는 말을 하였다. 이에 문제(조비)는 크게 노하여 견씨를 자진토록 하였다(위서 : 후비전)”라고 합니다.
  
  견씨, 이 파란만장한 여인의 삶이 끝나는 순간입니다. 조비와 더불어 수많은 남성 독자 여러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상상의 나래를 펴게 했던 여인의 삶이 조금은 어이없이 끝이 납니다. 이 때 견씨는 38세의 나이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견씨에 대해 잠깐 알아보고 지나갑시다. 견씨는 중산(中山) 무극(無極) 출신인데 빼어난 미모로 원래는 원소(袁紹)의 둘째 아들 원희(袁熙)의 아내였다가 원소가 멸망한 후 조비(曹丕)가 아내로 맞았습니다.
  
  정사에 따르면 견씨는 명문가 후손으로 빼어난 자색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비범하였다고 합니다. 견씨는 세살 때에 아버지를 여의는 불행을 겪기도 했지만, 합리적이며 총명하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상당한 애정을 가진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나라 전체가 전란에 휩싸이고 기근이 들자 견씨는 어머니를 설득하여 집에 쌓아둔 곡식을 향리에 풀어 칭송받기도 합니다.
  
  견씨는 자신의 남편인 원희가 유주(幽州 : 현재의 베이징) 자사로 임지에 가 있을 때 시어미를 봉양하기 위해 업도에 남아 원소의 부인 유씨(劉氏)를 봉양하던 중 업도가 조조군의 침공으로 함락되자 조비를 만나 구애를 받았고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이 부분이 매우 드라마틱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견씨는 조비와 재혼하여 위(魏) 명제(明帝 : 조예)와 동향공주(東鄕公主)를 낳았습니다. 견씨의 일생은 한편의 드라마입니다.
  
  ‘삼국지’ 시대에 여인들은 일종의 전리품(戰利品)으로 취급을 당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의 승장(勝將)들은 패장(敗將)일지라도 명문의 귀족들의 부인에게는 분명한 예우를 해주는 것을 미덕(美德)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 당시에는 여인들이 전리품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정사의 내용 가운데 여인들의 정조(情操)를 중시하는 많은 대목들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여러 남자를 거친 경우를 좋지 않게 생각한 것은 분명한 듯합니다. 따라서 견씨가 자신의 남편을 죽인 원수의 자식인 조비와 다시 결혼했다는 것은 당시로는 상당한 충격이었겠지요.
  
  조비가 견씨를 선택했다는 것은 조비가 당시의 모든 편견과 질시를 무릎 쓸 만큼의 애정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조비는 황위 계승권자인데 그의 아내가 황비가 되고 그들의 소생이 다시 황제가 된다는 것은 신하들에게는 매우 위험한 도박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견씨와 조비의 사랑은 당시로 보면 천하의 입에 오르내리는 참으로 ‘세기의 사랑’이었거나 ‘세기의 스캔들’이었을 것입니다.
  
  원래 남자의 불같은 사랑이 식는 것이 결혼 후 3년이라고 합니다. 아마 조비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견씨는 내심 결혼 초기부터도 아마 전남편 원희에 대해 미안한 감정이 있었을 것이고, 이것이 때로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작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원희의 아들일 가능성이 많은 조예의 출생과 더불어 두고두고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입니다(제 12강의, 삼국지 최대의 미스터리 참고).
  
  사실 조예의 출생에 관한 비밀을 가장 정확히 아는 사람은 견씨와 조비뿐인데 초기에 조비는 견씨를 충분히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개의치 않았겠고 조비는 조조와 마찬가지로 원소 집안을 멸문시킨 것에 대하여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조조와 원소의 관계로 볼 때 이들은 상당한 왕래가 있었을 것이고 이들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을 가능성도 있죠.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견씨에 대한 조비의 사랑이 식어가면서 오히려 견씨를 싫어하는 것만큼 그의 맏아들인 조예(명제)에 대해서도 매우 싫어했을 가능성이 큽니다(제 12강의, 삼국지 최대의 미스터리 참고).
  
  결국 조비가 등극한 지 한 해 만인 221년 여름 조비는 견황후를 스스로 죽게 만들었고 그녀의 시신(屍身)은 업성에 매장합니다. 견황후의 일생은 황실에서 흔히 나타나는 대표적인 비극적 모델이죠. 견황후는 두 지아비를 섬긴 사람으로 그 이름도 후세에 영예롭게 전해지지 못하였습니다.
  
  견황후의 사건을 두고 일부의 사람들은 조조와 그의 일가를 비난하는 좋은 구실로 삼았습니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가장 불명예스럽게 이 부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야담집 ‘세설신어’의 ‘혹닉편’(惑溺編)에 따르면 조조가 원소의 본거지인 업군(?郡)을 점령하자마자 총명하고 자색이 예쁜 원희(袁熙)의 처인 견씨를 불러오라고 독촉합니다. 그러자 좌우 신하들이 “오관중랑(五官中郞 : 조조의 아들 조비를 말함)께서 이미 데리고 가 버렸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조조는 “금년 적을 격파한 것은 바로 그 놈을 위한 것이었구먼!”이라고 탄식했다고 합니다.
  
  이 대목은 조조의 중원정벌의 가치를 폄하하고 마치 미인을 취하기 위해 아들과 다투는 식으로 묘사한 부분으로써 조조에 대한 가장 악랄한 비방의 하나죠. 여기서 말하는 ‘혹닉편’(惑溺編)이란 사랑에 홀려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말합니다.
  
  이것은 조조와 그의 가문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견씨를 이용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죠. 조조는 자신의 오랜 라이벌이자 호형호제하던 원소의 며느리를 취할 만큼 분별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제17강의 참고).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번 살펴봐야 할 것은 견황후의 일생은 위나라의 멸망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점을 살펴봅시다.
  
  (2) 황제의 죽음
  
  나관중 ‘삼국지’에 보면 다소 의아한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지난 강의에서 원소의 손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조예 즉 위 명제의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먼저 나관중 ‘삼국지’에 나타난 조예의 죽음을 보시죠.
  
  어느 날 밤, 위황제 조예가 궁중에 있는데 3경 쯤 갑자기 음산한 바람이 세차게 불더니 등불이 꺼졌다. 그러자 죽은 모황후가 같이 죽음을 당한 수십 명의 궁녀들과 함께 어전에 나타나 ‘내 목숨을 내놓으라’고 하면서 울었다. 이 때문에 조예는 그만 병이 나고 말았다(나관중 ‘삼국지’ 106회).
  
  이후 조예는 시름시름 앓더니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납니다. 제위에 오른 지 13년 만에 36세의 나이로 요절한 것이죠. 그런데 위의 표현은 어떨까요? 마치 공포 영화를 보는 듯합니다. 물론 정사에 기록된 바는 없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이 부분은 가장 사실적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때로 소설가들은 행간의 의미나 사라진 내용을 복원하는 데 놀라운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하는데 이 대목은 아마 조예의 병에 대한 예리한 해석일 수가 있습니다. 나관중 ‘삼국지’가 보여주는 몇 안 되는 예리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제 역사 속으로 먼 여행을 떠나도록 합시다.
  
  조예의 죽음은 위나라의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만약 조예가 10년을 더 살았으면 조상(曹爽)과 사마의(司馬懿)가 권력을 전횡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진(晋)나라가 건국될 일도 없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조예는 왜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 정사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정사를 보면 238년 12월에 “조예는 예상치 못한 질병으로 병상에 있었다(帝寢疾不豫 : 위서 명제기)”라고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예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불러들인 사람은 의원(醫員)들이 아니라 부춘 출신의 등녀[登女 : 일종의 무녀(巫女)인 듯]입니다. 정사에 조예는 이 여인에게 신비의 물을 주문합니다. 그러나 그 물의 효험이 없자 이 여인을 죽입니다(위서 :명제기).
  
  즉 정사의 내용으로만 보면 조예는 지병(持病)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라 원인을 알 수 없는 어떤 마음의 병 때문인 듯합니다. 정사에는 조예의 죽음과 관련하여 모황후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런데 나관중 ‘삼국지’에는 모황후가 조예의 죽음의 원인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물론 여러분들 가운데는 이 바로 앞 장인 나관중 ‘삼국지’ 105회에 있는 내용으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 부분을 보시죠.
  
  237년 조예는 크게 토목공사를 일으켜 여러 궁전을 지었다. … <중략> … 그리고 갖가지 기이한 꽃과 나무들을 심고 기이한 동물들로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어 이를 방림원(芳林園)이라고 했다. … <중략> … 조예는 곽부인과 함께 정원을 거닐고 있었는데 궁녀에게 이 사실을 모황후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 <중략> … 그러나 이 일을 모황후는 궁인을 통해 알게 되었고 다음날 조예를 만나자 따지기 시작했다. … <중략> … 조예는 당장 이를 알린 궁인들을 잡아 목 베어 죽이고 모황후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나관중 ‘삼국지’ 105회).
  
  이 부분은 정사의 내용과 거의 일치합니다. 즉 정사에 따르면, 다음날 명제가 모황후를 만나니, 모황후는 “어제 북쪽 정원에서 연회를 열어 노시니 즐거웠겠군요?” 라고 하자 명제는 측근들이 이를 고해바친 것이라고 보고 10여명을 죽이고, 동시에 모황후에게도 자진(自盡)할 것을 명령합니다(위서 : 명도모황후전).
  
  물론 조예는 모씨를 죽이고 난 뒤 큰 후회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황실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기도 한데 이 일로 조예가 마음의 병이 깊어 죽는다?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이 문제를 추적해 갑시다.
  
  (3) 모황후, ‘삼국지’의 장희빈
  
  ‘삼국지’에 나타나는 비극의 주인공으로 조예의 아내인 모황후(毛皇后 : ? - 237)가 있습니다. 나관중 ‘삼국지’에서도 모황후에 대하여 “조예가 제위에 오르기 전, 즉 조예가 평원왕(平原王) 시절에 총애한 여인이었는데 조예가 즉위한 후 곽부인과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조예의 사랑을 잃었다.”라고만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만으로 전반적인 상황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일단 모황후라는 여자를 알아봅시다.
  
  정사에 따르면 모황후는 하내(河內) 사람으로 미모가 뛰어나 조예가 평원왕으로 있을 때부터 총애하여 후에 조예가 보위에 오른 후 황후로 삼은 여인입니다.
  
  모씨(毛氏)는 가난한 목수의 딸로 어린 나이 즉 위나라 문제(文帝 : 조비) 때 선발되어 동궁에 들어옵니다. 조예는 명문가의 우씨(虞氏)를 왕비로 맞이하였지만 조예는 모씨를 더 사랑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외로운 평원왕 조예는 자신의 고독과 고뇌를 위로해주는 모씨를 총애하여 항상 자신의 수레에다 태우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 후 조비가 죽고 조예가 제위에 오르자 조예는 모씨를 귀빈(貴嬪)에 봉하고 우씨를 황후로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씨는 이를 위로하는 태황태후인 변씨(황제의 할머니 : 조조의 아내)에게 울면서 다음과 같이 하소연합니다.
  
  “태황태후 마마, 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조씨(曹氏)들은 미천한 출신으로 황후를 삼기를 좋아합니다. 그 동안 조씨들이 도리에 따라 사는 것을 본 일이 없습니다. 예로부터 황후는 궁전 내부의 일을, 황제는 궁궐 밖의 일을 관장하여 이 안팎이 서로 맞아야 하는 것인데 이번에 천자(天子 : 조예)께서는 또 도리와 법도에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황제가 되신 처음부터 이 같은 일을 하시니 어찌 그 끝이 좋겠습니까? 아마 나라가 망하여 사직(社稷)이 끊어지는 조짐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말을 들은 태황태후 변씨는 크게 분노합니다. 변씨 자신도 미천한 신분이었는데다, 이제 막 즉위한 손자에 대하여 사직이 망하느니 하는 대역무도한 말을 늘어놓았으니 변씨가 격분한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그러나 어째 위나라의 장래에 대한 복선인 듯 들리기도 합니다). 결국 우씨는 쫓겨나서 업성의 궁전으로 돌아가고, 모씨는 조비가 즉위하던 해 황후에 올랐습니다(227). 이 때까지는 모씨는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씨는 조예에게 있어서는 조강지처(糟糠之妻)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 황태자가 무슨 어려움이 있어서 조강지처가 있겠느냐고 하실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조예의 삶은 참으로 위태로웠던 점을 아셔야 합니다. 제가 제12강의 [최대의 미스터리 : 원소 손자, 위황제 되다(?)]에서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조예는 그 아버지인 조비로부터 사랑을 받지도 못했고, 그 어머니는 조비에 의해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상태였을 것입니다.
  
  조예가 등극할 때까지 가장 큰 정신적인 버팀목이 된 여인이 바로 모황후인 듯합니다. 그래서 모황후가 신분이나 출신이 비천한데도 불구하고 조예는 등극한 후 모씨를 황후로 삼습니다. 그리고 모황후의 아버지인 모가(毛嘉)를 기도위에 임명하고 동생인 모증(毛曾)을 낭중에 임명합니다. 조예는 미천한 가문으로 수레를 만드는 목수였던 모씨 일가에게 대거 벼슬을 줍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은 막을 수 없고 남자의 사랑도 식어가 조예가 곽씨(郭氏)에게 빠지는 바람에 모씨는 외로운 밤을 보내야 합니다(조비와 조예가 조강지처를 죽이게 한 여인이 모두 곽씨라는 게 재미있네요). 특이한 것은 조예가 모씨를 대신하여 새로 가까이한 여자는 명문가의 여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궁중에서 자꾸 웃음거리가 되는 모씨 일족에 대한 반발은 아닐까요?
  
  곽씨(郭氏 : 조예의 후비)는 서평군(西平郡) 출신으로 대대로 호족인 가문의 딸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 시대에 서평군에서 반란이 일어나 곽씨는 관노(官奴)가 되어 황궁으로 들어왔다가 조예의 총애를 받아 부인(夫人 : 후궁들의 지위)의 직위를 하사 받습니다.
  
  곽씨는 용모와 자태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지성도 갖추어 날이 갈수록 조예는 미천한 가문 출신인 모황후를 멀리하게 됩니다. 조예는 재색을 겸비한 곽씨의 처소에 들어가면 여러 날을 나오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서기 237년 음력 3월, 늦은 봄 조예는 많은 후궁들을 모두 모아놓고 아름다운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정원에서 연회를 베풀었지요. 조예는 술과 음악을 준비하여 방림원에서 흥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조예는 곽씨를 데리고 이들 후궁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희롱을 하면서 보내는데 이 사실을 안 모씨가 황제에게 무례하게 달려들자 조예는 천자에 대한 능멸의 죄목으로 모 황후에게 자진(自盡)할 것을 명합니다. 모황후가 인생을 마감하자 조예는 곽씨를 황후의 자리에 앉힙니다.
  
  어떻습니까? 중국판 장희빈의 일생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녀의 일생은 조선의 장희빈과 큰 차이가 없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후의 역사적 전개는 전혀 다릅니다. 장희빈의 남편인 숙종은 장희빈을 죽이고 아무 탈 없이 다른 여인을 아내로 맞아 말년을 잘 보내고 정치도 잘 합니다. 그러나 조예는 숙종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고 위나라는 이제 깊은 수렁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은 모씨가 조예의 어머니인 견씨의 삶과 거의 유사한 전철을 밟고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씨가 죽은 후 조예도 2년도 못되어 원인도 모를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죠. 참 이상하죠. 조예는 아마 스스로 가장 경멸했을 아버지(조비 : 위나라 문제)가 한 행동을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 모두 가슴 아프게 사랑한 첫사랑을 버리고 다른 여인과 사랑에 빠지고 자신의 첫사랑을 냉정하게 죽이고 맙니다. 사람이 가진 성적인 욕망은 정말 끝없고 강렬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견씨와 모씨의 삶은 조예를 중심으로 많은 연결 고리들이 있습니다. 정사에 따르면 조예는 어머니 견씨를 항상 그리워했으며, 경우에 따라서 꿈속에 어머니를 보면 외가 식구들 가운데 어머니와 상대적으로 가까웠던 사람들을 더욱 우대하기도 했다고 합니다(위서 : 후비전). 그런데 여러 가지 점에서 모황후의 일생이 견황후와 유사하고 상황도 비슷한데다 모황후의 죽음에 조예가 직접 관계했기 때문에(조비가 견황후를 죽였듯이), 조예가 어떤 마음의 병(심인성 질환)에 걸리지는 않았을까요? 조예는 내성적이며 꼼꼼한 성격(위서 : 명제기 주석)이었죠.
  
  조예의 경우는 죄의식이 병으로 전환되어 나타난 경우라고 볼 수는 있지 않을까요? 즉 심리적인 과중한 압박감(또는 죄책감)이 실제의 물리적인 병으로 전환되어 파멸에 이르는 경우는 많이 있으니까요. 현대의 심리학에서도 심리적인 스트레스와 신체적 질병 사이에 특정한 관계가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이 때 사용하는 척도를 사회 재적응 평정척도(SRRS)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심리적 스트레스를 수치화한 것인데(예를 들면, 배우자의 사망은 100, 이혼 73, 가족의 사망 63 등으로 수치화), 이 생활 스트레스를 합한 값이 300 이상이면(가중치를 포함) 그 가운데 79% 정도가 신체적인 질병이 나타난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살펴보고 지나갑시다. 위나라는 조조를 비롯하여 조비, 조예에 이르기까지 그 황후의 신분이 매우 미천하였습니다. 조조(曹操)의 황후였던 변태후는 가기(歌妓) 출신이었고, 조비의 황후인 견씨(甄氏)는 원소의 며느리였던 사람(원희의 부인)으로 초혼(初婚)이 아니었고, 조예가 황후로 삼은 모씨(毛氏) 역시 미천한 가문 출신으로 웃음을 사는 일이 잦았습니다.
  
  왕후의 신분이 미천하다는 말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만큼 세력이 없다는 의미이므로 중앙 정부 내에서 인맥(human network)이 없으므로 정치세력화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죠. 사실 왕자가 신데렐라들을 선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정략적인 결혼을 피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를 고를 수 있고 여자 또한 오로지 황제에만 충성할 수 있기 때문이죠.
  
  물론 이것이 반드시 성공적이라고만 할 수 없습니다. 신분이 낮다는 것은 그만큼 상류사회에 대한 적응력이 떨어지기 때문이죠. 특히 미천한 신분에서 황후에 오른 사람들은 황제의 사랑이 식어가면서 극심한 좌절과 몰락을 밟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왜냐하면 이들은 여인으로서 투기(妬忌)를 잠재울 수 있도록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고 가문의 일원으로 황궁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개인으로 황궁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에 따른 책임감도 적기 때문이죠.
  
  (4) 위나라의 황혼 : 모황후의 죽음과 조예의 최후
  
  모황후가 죽은 후 조예는 더욱 우울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자신의 조강지처(糟糠之妻)를 죽인 것은 아버지였던 문제(조비)의 전철을 그대로 밟은 꼴이었기 때문이죠.
  
  조예의 어머니 견씨가 아버지인 조비에게 죽임을 당했고 조예는 그 슬픔을 가눌 길이 없었는데, 그때 조예를 위로한 여자가 바로 모황후였지요. 당시 조예의 나이로 보면 모황후는 사실상 조예에게는 첫 여자였을 것이고, 그녀를 통하여 성(性)에 눈을 떴으며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었던 것인데, 이제 그 여자를 자신의 손으로 죽게 만들었던 것이죠.
  
  물론 이것만이 조예를 죽음으로 몰고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조예의 죽음에는 두 가지 원인이 동시에 작용했을 것입니다. 하나는 간접적인 원인으로 어머니인 견황후의 죽음, 다른 하나는 직접적인 원인으로서의 사랑하던 자식의 병사(病死)와 모황후의 죽음이겠죠.
  
  232년 조예의 아들 조은(曹殷)과 딸 조숙(曹淑)이 죽었습니다. 이것은 조예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조예로 봐서는 이 같은 슬럼프들을 이겨나갈 돌파구가 필요하였을 것입니다. 조예는 자신의 고독과 고뇌를 여인을 통해 해소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궁전을 짓는 데 몰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군주가 정사를 돌보지 않고 아름다운 건축물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죠.
  
  한나라 이전만을 보면, 하(夏)나라의 걸왕(桀王)은 구슬로 궁실을 꾸미고 상아로 마루를 꾸몄으며,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은 궁전 누각을 옥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꾸미다가 사직을 망쳤다고 합니다. 초(楚)나라의 영왕(靈王)은 장화궁(章華宮)을 짓다가 재앙이 내려 몸에 화를 입었고, 진시황이 불로장생을 위해 아방궁(阿房宮)을 지었지만 그 아들들은 모두 죽고 3세 황제인 자영(子?) 대에 이르러서 천하의 민심을 잃어 멸망하고 말았죠.


  조예는 모황후가 자신에게 한 불경스러운 행동들을 용서할 수가 없었겠지만, 모황후가 죽고 난 뒤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모황후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날로 커져갔을 것입니다. 조예는 모황후가 죽은 지 2년도 채 못 되어 죽고 맙니다. 아마 죽기 전까지 조예는 악몽에 시달렸을지도 모릅니다. 조예가 꿈속에서 본 것은 죽은 어머니와 죽은 아들과 딸, 모씨의 모습 들은 아니었을까요? 조예의 죽음으로 위나라의 황혼이 깊어갑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견황후와 모황후의 삶을 통해서 위나라 궁중여인들의 비극적인 일생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들의 삶이 천오백년 뒤 조선 숙종비 장희빈의 일생과도 흡사하여 놀라게 됩니다. 이 여인들의 이야기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나 ‘맥베드’, ‘오셀로’보다도 더 드라마틱한 이야기입니다. 그 동안 수많은 ‘삼국지’가 있었는데 이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만들어 세계 문화시장에 내놓지 않았는지가 궁금합니다. 이들 여인들의 삶을 보면서, 봉건 왕조의 내적 모순이 해결되지 않은 채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국가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한, 역사는 얼마든지 되풀이 될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좌분(左芬)

 

후부인(侯夫人)

 

류여시(柳如是)

 

곽애(郭愛)

 

당완(唐琬)

 

리사사(李師師)

 

주숙진(朱淑眞)

 

사도온

 

위자부

 

화예부인

 

황아

 

설도

 

반첩여

 

장덕두황후(章德竇皇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