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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정희 대통령 비난하는 젊은이들에게 /그분의 업적

朴正培(박정배) 2010. 4. 3.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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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아!!
금세기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인물,
세종대왕보다 더 존경받는 사람, 그것도 무려 20%가 넘는
최고의 인물로 존경받는 사람이 누군지 아는가?

국민소득 76불에서 1,500 불, 인류 역사상 그 유래가 없는
단기간에 20배 성장으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정치꾼'이 아닌
진정한 지도자이며, 애국자가 과연 누군지 아느냐 말이다.

실의 도탄에 빠져 나태한 국민에게 우리도 하면 된다는
새마을 정신혁명으로 잠재력을 일깨워 자신감을 안겨준 지도자,
그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다.

젊은이들아!!
그런 그가 독재자였음에도 각종 여론조사에서 민주화를 외치던
그 어느 지도자들보다도 가장 복제하고 싶은 인물,
가장 친근감이 있어 대화하고 싶은 지도자가 박정희라며
그리워하는 이유는 또, 왠지 아는가?

'행복지수'라는 것이 있다.
그때는 지금처럼 배불리 먹지도 못하고 새벽부터
손이 부르트게 일을 하였지만 내일의 희망과 비전이
있었으며 삶의 의욕이 충만해 즐겁고 행복했었다는 것을
젊은이들은 알아야 한다.

독재자 박정희라??
젊은이들아, 당시 독재 시대라 해도 일반 대다수 국민은
생활하고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런 어려움과 불편함이 없었다.

다만, 독재니 자유니 하며 이론적 정의만을 내세우는
소수의 사람들과 정치를 하겠다는 극소수의 '정치꾼'들을
제압하였으나 그 또한 누구를 위한 억압적 제압이었겠느냐?

부정 축재하려고 그랬느냐?
자식들과 친인척을 도와 주려고 그랬느냐?
아니면 출세하여 족보에 남기려고 억압적 제압을 하였느냐?

젊은이들아!!,
1960년대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대한민국 그때에서,
자유, 독재, 민주주의를 생각해 보고 박대통령을 생각해 봐라!!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이 식욕, 성욕, 금욕, 지배욕, 이라 했다.
그 첫째 '식욕', 먹는 것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우선 될 수 없다고 본다.

경제력이 뒷밭임 없는 민주주의!,
배고픔이 해결되지 않는 민주주의!,
모래사막 위에 탑을 쌓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당시 우리보다 몇 배를 더 잘 살던 필리핀과 북한을 보고,
타이, 말레이시아를 봐라, 지금 이들 국가들이 어떤가를…….
한 나라의 발전이 지도자가 누구냐에 따라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 것 아니겠나.

그래도 독재자 박정희라 폄하 하며,
그의 업적과 공을 깎아내리려 애쓰는 젊은이들이 많다.

왜, 그럴까?
16,000불에서 살다 보니 76불의 삶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것이다.

보릿고개가 뭔지 모르고 다이어트에 신경 쓰다 보니
과거 60년대가 실제로 어땠는지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고
자유니 독재니 하며 교과서적 정의만을 내세워 따진다.

젊은이들아!!
우리나라 정부 일 년 예산의 80%를 미국의 지원으로 살았고
춘궁기가 되면 굶어 죽는 사람이 흔하게 발생했지만,
뉴스거리조차 안되던 때가 바로, 60년대였다.

배를 곯아 봐야 인생이 뭔지 삶의 철학도 깨우칠 수 있음에
너무나 잘 먹어 뱃살 빼기를 고민하는 젊은이들아!!

그때는 여성은 살이 쪄야 맏며느리 감이라 인기가 있었고,
남자는 살이 찌고 배가 나와야 사장이며 인격, 신분 상승으로 여겨
겨울이면 옷을 많이 입고 살쪄 배 나온 시늉을 하던
그때를 아느냐 말이다.

오늘의 시각에서 본다면 웃긴다고 할까?
눈물겨운 일이라고 할까?

젊은이들아!!
과거가 없는 현재가 있을 수 없으며, 과거를 모르면 현재의
풍요로움 또한, 그 가치를 모르는 법!!.

1960년 4월19일 학생 혁명으로 이승만 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장면 과도정부가 들어섰을 때, 각종 단체들은 말할 것도 없고,
노동자, 농민, 상인, 이발사, 식당주인,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길거리로 몰려나와 데모…….

학생들도 교장 선생님 조회 시간이 너무 길다 데모,
짧은 머리 기르자 데모, 공부시간 단축하자 데모,
하다못해 초등학생, 선생들까지도 데모, 데모,…….

온 나라가 일 년 열두 달 365일 데모로 지새워 오죽하면
데모를 하지 말자고 데모를 하였으니, 나라가 어떻게 되였겠는가?

이를 지켜본 세계에서는 KOREA는 '데모 공화국'이라고 할 정도로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최루탄 가스를 소비하는 나라가 되었으며

사회는 극도로 혼란스러워 밤이면 마음 놓고 밖을 나다닐 수가 없을
정도로 치안은 여기서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이 무법이 판을 치던 그때,
하다못해 깡패도 주먹으로 정치를 하던 그때를 아느냐 말이다.

더욱이 기가 막힐 노릇은 이승만 독재로부터 자유를 찾았으니,
모든 것이 자유라며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런 이유 없이 발로 차거나
주먹을 휘둘러대며 '자유'가 뭔지도 모르는 어처구니 없는
무지의 국민들이 많았으며, (당시에는 초등학교 무학자가 대다수였다.)

더더욱 기가 막힐 노릇은 서울 광화문에서 데모하는 모습을 북한에서
라디오로 생중계하여 현장 실황을 남한에서도 들을 수 있었으니,
얼마나 많은 남파 간첩들이 포진되어 안보가 위태로웠는지,
그때를 아느냐 말이다.

김일성 자서전에 당시 남침하지 못한 것 후회한다 했지 않은가.
그때,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젊은이들아!!

이렇듯, 굶어 죽지 않으면 공산화되기 일촉즉발의 풍전등화였던
나라를 구하고자 구국에 일념으로 박정희가 나타난 것 아닌가.

역사에 만약 이란 없다 하지만 당시에 박정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당리당략과 사리사욕, 출세욕에 혈안이 된
정치인들이고 보면 지금 쭘 이 나라는 어떻게 되였을까?

너희들이 제일 좋아하는 축구가 월드컵 세계 4강에 올라 대한민국,~,
짝, 짝, 짝~, 하며 즐거움을 맞볼 수가 있었을 것이며,
올림픽을 개최하여 한국의 위상을 세계에 알릴 수가 있었을까?
또, OECD 경제 대열에 오르는 오늘의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을까?

젊은이들아,
사업가는 10년, 정치가는 최소한 100년 앞을 내다보는
안목과 지혜가 있어야 하며 냉철한 판단력과 결단력, 추진력이
있어야 된다고 한다.

당시 일본으로부터 대일 청구권으로 받은 돈으로 동남아 국가들은
호텔 짓고, 백화점 짓고, 선박 구입 등, 비생산적인 곳에 썼지만,

박대통령은 100년 앞을 내다보는 안목으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하며
이승만정권 때부터 14년간이나 지지 부진하게 끌어 오던 한일수교를,
결단, 결행, 단행하여

산업의 쌀이라 일컫는 제철공장 짓고, 고속도로 등, 경제 재건을 위한
생산적인 곳에 투자하여 지금은 조선업, 철강업, 기타, 중공업 분야에서
세계 1, 2위로 일본과 경쟁하고 있으며

경부고속도로는 지역간 격차를 줄이고 산업의 동맥으로 토목 건설
기술 축적으로 지구촌 곳곳에 건설수주 외화 획득, 매년 고도성장을
30년 이상 지속, 지금은 세계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박대통령의 업적을 기반으로 가 아닌가.

젊은이들아!!
그런 그를 사후 27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친일파청산이란 명제하에
알 수 없는 정치적 잣대로 재고 재단하여 매도하고자,

공(功)은 빼고 과(過)만 조명하는 '친일파 박정희' 만화책 만들어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 세뇌시키려 하고 살인범 김재규를
민주화인사 운운하며

세계 수십여 개 국가, 수만 명이 하루가 멀다 날아와
가르쳐 달라고 머리를 조아리며 배워간 새마을운동까지도
사실 왜곡되게 가르치고 있다 하니 도대체 이럴 수가 있느냐 말이다.

이웃 나라 중국에서도 박대통령에 탁월한 지도력을 배우고자 연수용
교재로 '박정희 전기'란 책이 중앙 위원회 산하 당정 고위 간부들의
교과서가 되였으며 서점에서는 베스트에 올라 인기리에 팔리고 있어
중국 천하를 통일했던 진시황에 비유하며 높이 평가함인데,

이 나라에서는 수백만 명을 굶겨 죽인 독재자 중에서도
가장 악독한 독재자 김정일에게는 '님'을 꼬박꼬박 붙여가며
존칭을 쓰고 통큰 지도자라며 추켜 세우면서도

박대통령에게는 '님'은 커녕, 그가 쓴 친필이라 해서 광화문,
운현각 현판을 뜯어내 부시고 빠개고, 하다못해 그 시절에
심어 젓 다해서 나무까지 뽑아내 그의 흔적까지 지워버리려 하니
이런 기가 막힐 노릇이 어디 또 있는가 말이다.

또, IMF 때보다도 살기 힘든다고 아우성인 경제는 뒷전이요,
진보라 자칭하며 개혁하겠다고 과거 캐기에 국론 분열을 일삼으며

국민 80%가 반대하는 국보법을 김정일이가 원하는 대로 폐기하겠다고
발버둥치는 그들!! 그래서 국민들을 극도로 불안하게 만드는 그들!!

결국, 이를 보다 못한 전직 국무총리, 대법원장, 국회의장 등을 비롯해
대한민국 건국이래 사상 최대 규모의 사회 각계 원로 9,000여 명이
시국선언을 하였으니 도대체 이들이 누구며,
왜 이러는 지 진짜 알 수 없는 노릇 아니냐?.

세대 간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좌파들에 부화뇌동하는 젊은이들아!!,

한 번의 실수는 5년이 아니라 10년이 갈 수도 있으며
한번 잘못 선택한 지도자로 겪어야 할 고통의 대가는
자손 대대로 후회할 수도 있음을 명심해라!!.

천하에 사기꾼 김대업을 이용하고 젊은이들을 선동하여 정권을
휘어잡고선 탄핵 땐 예수 부활을 비교하면서 다시 태어났다고
자랑하는 좌파정권, 그 배후세력들이 지금까지의 언행을 보면,

아마도 언젠가는 독재자 부인 육영수여사 살해했다고
살인범도 의인으로 추대하여 광화문에 이순신 동상 철거하고
문세광 동상 세우자고 촛불 든 젊은이들 선동할까 정말 걱정된다.

똑바로 알아라!!
비록 한 인간이 죄가 있다고 하여도 그 죄를 불공평하게 들추어내는
행위는 죄악이며 어떤 사회든 부조리가 있고 사회적 병리가 없는
문제없는 사회가 없는데,

역사 바로 세워야겠다며 유독, 하나만 싸잡아 성토하고, 그래서
갈아 치우고자 한다면 이는 인정될 수 없는 반, 민주적 행태가 아닌가.

개혁이란 명제하에 법을 현실보다 고도의 도덕적 가치 기준에
매달아 놓고 그 기준에 걸리면 모조리 갈아 엎어 버린다면,

칼자루를 쥔 쪽에서 의도적으로 휘둘러대는 알 수 없는 심판의 잣대로
매장시키려 한다면 이 어찌 민주를 부르짖던 자들의 행태란 말인가!!

그런 기형적 사고의 두뇌로 개혁이다 역사 바로 세우겠다 한다면
그 누구도 '왕따' 시켜 매장시킬 수 있으며,

세종대왕도 독재자로 몰아세우고 그분의 많은 업적을 모조리 비판하여
쓰레기통으로 집어넣어야 하며 한글도 때려 치워야 되는 것 아닌가.

젊은이들아!!
사람의 가치관은 정권이 바뀌고 물질 사회가 급격하게 변하며
세월이 아무리 흘러간다 할지라도 바뀔 수도 없고 바뀌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라!!.

권좌, 출세를 위한 일이면 그 어떤 가치와 업적도 부정하려 드는
부도덕한 정치인들과 그 배후 세력들, 그리고 이에 부화뇌동하는
일부 젊은이들이 오늘의 잣대로 비판하려 애쓰는 것을 지켜보면서,

두 손을 불끈 쥐고 '먼 훗날 우리 후손들이 오늘을 살던 우리가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을 때, 우리는 민족중흥의 신앙을 굳게 가지고
일하고 또 일했노라고 떳떳하게 대답하자.'라고 한 민족중흥의 시조,
박정희 대통령, 서거 27주년이 되어 생각해 본다.

젊은이들아!!
박정희 대통령을 제대로 알자!!

-촌장->(부정부패추방시민연합회) 

 

 

 

故 박 정희 대통령의 뇌물이라는 글을 읽고 감동이..




 

 



        故 박 정희 대통령의 뇌물
        (맥도널드 더글라스社 중역의 증언)
        


        한국의 월남전 참전으로 소원해진 미국과의 관계가 다시 우호적이 되었고, 한국은 젊은이들의 목숨을 버리는 대가로 많은 국민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만큼의 지원을 미국으로 부터 이전을 받게 된다. 그 지원중의 하나가 "M-16 자동소총" 이었다. 한국이 사용하는 무기는 단발식 카빈 소총으로서 M-16과는 비교할 바가 못 되는, 그야말로 장난감과 같은 수준의 무기였었고 우리는 그런 무기를 들고 남북대치 상황을 견디어 내어야만 했었다. 한국이 월남전에 군사를 파병하는 조건으로 얻을 수 있었던 M-16의 제조 수출업체는 맥도날드 더글라스社 였다.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으로의 수출 건을 따내게 된 뒤, 한국 을 방문한 맥도날드 더글라스社의 한 중역은 자신들의 무기를 수입 해주는 국가를 찾아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하게 된다.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것도 너무도 더웠던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나는(맥도날드 더글라스社의 중역) 대통령 비서관의 안내를 받아 박정희의 집무실로 걸음을 재촉 하게 된다. 그리고 비서관이 열어주는 문안의 집무실의 광경은 나의 두 눈을 의심케 만들었었다. 커다란 책상위에 어지러이 놓여 진 서류 더미 속에 자신의 몸보다 몇 배는 더 커 보이는 책상 위에 앉아 한손으로는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남은 한손 으로는 부채질을 하면서 더운 날씨를 이겨내고 있었던 사람을 보게 되었다. 한나라의 대통령의 모습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을 정도였었다. 아무리 가난한 국가라지만 도저히 대통령이라고 생각하기 조차 힘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보았을 때, 지금까지의 모순이 내안에서 사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손님 이 온 것을 알고 예의를 차리기 위해 옷걸이에 걸린 양복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그가 러닝차림으로 집무를 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각하! 미국 맥도널드 사에서 온 데이빗 심슨 씨입니다." 비서가 나를 소개 함과 동시에 나는 일어나 대통령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먼 곳 에서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소, 앉으시오." 한여름의 더위 때문인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긴장 탓인지.. 나는 무의식적으로 굳게 매어 진 넥타이로 손이 가고 있음을 알았다. "아, 내가 결례를 한 것 같소이다. 나 혼자 있는 이 넓은 방에서 그것도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에어컨을 튼다는 것은 큰 낭비인 것 같아서요. 나는 이 부채 하나면 바랄게 없지만 말이오. 이 뜨거운 볕 아래서 살 태우며 일하는 국민들에 비하면 나야 신선놀음 아니겠소." "이보게, 비서관! 손님이 오셨는데 잠깐 동안 에어컨을 트는 게 어떻 겠나?" 나는 그제야 소위 한나라의 대통령 집무실에 그 흔한 에어컨 바람 하나 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만나봤던 여러 후진국의 대통령과는 무언가 다른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 . 나는 그의 말에 제대로 대꾸할 수 없을 만큼 작아짐을 느낄 수 있었다. "아, 네. 각하." 비서관이 에어컨을 작동하고 비로소 나는 대통령과 방문 목적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예정대로 나는, 내가 한국 을 방문한 목적을 그에게 이야기를 얘기했다. "각하, 이번에 한국이 저희 M-16소총의 수입을 결정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한국의 국가방위에 크게 도움이 되었 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희들이 보이는 작은 성의.. . ." 나는 준비해온 수표가 든 봉투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이게 무엇이오?" 그(박 정희 대통령)는 봉투를 들어 그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흠. 100만 달러라. 내 봉급으로는 3대를 일해도 만져보기 힘든 큰돈이구려." 차갑게만 느껴지던 그의 얼굴에 웃음 기가 머물렀다. 나는 그 역시 내가 만나본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사람임을 알고 실망감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리고 그 실망이 처음 그에 대해 느꼈던 왠지 모를 느낌이 많이 동요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각하! 이 돈은 저희 회사에서 보이는 성의입니다, 그러니 부디.." 대통령은 웃음을 지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하나만 물읍시다." "예, 각하." "이 돈 정말 날 주는 거요?" "각하, 맞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소." "네, 말씀하십시오. 각하." 그는 수표가 든 봉투를 나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나에게 다시 되돌아온 봉투를 보며 의아해하고 있는 나를 향해 그가 말했다. "자, 이돈 100만 달러는 이제 내 돈이오. 내 돈 이니까 내 돈을 가지고 당신 회사와 거래를 하고 싶소. 지금 당장 이 돈의 가치만큼 총을 가져오시오. 난 돈 보다는 총으로 받았으면 하는데, 당신이 그렇게 해주리라 믿소." 나는 왠지 모를 의아함에 눈이 크게 떠졌다. "당신이 나에게 준 이 100만 달러는 내 돈도 그렇다고 당신 돈도 아니오. 이 돈은 지금 내 형제, 내 자식들이 천리 타향에서 그리고 저 멀리 월남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 내 아들들의 땀과 피와 바꾼 것이오. 그런 돈을 어찌 한 나라의 아버지로서 내 배를 채우 는데 사용할 수 있겠소." "이 돈은 다시 가져가시오. 대신 이 돈만큼 의 총을 우리에게 주시오." 나는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일어나서 그에게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각하. 반드시 100만 달러의 소총을 더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 나는 방금 전과는 사뭇 다른 그의 웃음을 보았다. 한나라의 대통령이 아닌 한 아버지의 웃음을. . 그렇게 그에게는, 한국의 국민들이 자신의 형제들이요 자식들임을 느꼈다. 배웅하는 비서관의 안내를 받아 집무실을 다시 한 번 둘러 본 나의 눈에는 다시 양복저고리를 벗으며 조용히 손수 에어컨을 끄는 작지만 너무나 크게 보이는 참다운 한나라의 대통령으로 보였다. 나는 낯선 나라의 대통령에게 왠지 모를 존경심을 느끼게 되었다. = 당시 더글라스 맥도날드사의 중역 / 데이빗 심슨 올림 = = 옮긴 글=

 

★** 故 朴正熙 大統領의 눈물 **★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눈물’ ]

글은
이미 받아 보신분 들이 계실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글은 한국 근대화의 바이블과도 같아 그 인기는 식지를

않고 있으며 읽으면 읽을수록 감동을 주는 오늘날 청소년들에게

도 감동을 주는 글리라 여겨집니다. 다음에 나오는 5,60대나이는

지금에 와서는 6,70대라야 맞을것 같군요.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더 많은 젊은이들에게 이글을 읽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 관 천

극소수엔 원수같은이가 대다수 국민의 희망이였다
박정희(朴正熙) 大統領追慕
(옮겨온 글)
두었든 자료와 신문에 새롭게난것 편집하였읍니다 꼭한번 정독하시고
사진도보시고 그때 그시절 회상도 해보시여 훌륭한 한분 의 영도자가 어떻게 조국을,
동포를 사랑했나를 보세요
 
최근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눈물’이라는 글이
인터넷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기성세대의 땀과 노력, 그리고 박 전 대통령의 일화를 담은 이 글에
20, 30대 네티즌들은 <우리 세대의 가벼움>을 반성하게 됐다.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났다’며 공감을 표명하고 있다.
이 글은 육군사관학교의 김충배 교장이
생도 교육에 사용해 그동안 ‘육사교장의 편지’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실제 작성자는 예비역 장성인 김유복(金遺腹·79)씨.
그가
로터리코리아(한국로터리의 기관지)에 기고한 글은
“60대를 수구 골통이라 몰아붙이는 젊은이들이여!
이 글을 읽어 보렴”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서독 간호학교 유학생 출발인사차 예방1(65.3.24) 청와대

우리 대한민국의 장래를 짊어질 개혁과 신진의 주체, 젊은이 들이여!
여러분들은 5,60대가 겪은 아픔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대들은 조국을 위하여 과연 얼마만큼 땀과 눈물을 흘렸는가?
지금 여러분들이 누리는 풍요로움 뒤에는
지난날 5,60대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5.16혁명 직후 미국은 혁명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을 인정한다면 아시아, 또는 다른 나라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그 때 미국은 주던 원조도 중단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존 에프 케네디,
박정희 소장은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 백악관을 찾았지만
케네디는 끝내 박정희를 만나주지 않았다.

호텔에 돌아와 빈손으로 귀국하려고 짐을 싸면서 박정희 소장과 수행원들은
서러워서 한없는 눈물을 흘렸었다.


가난한 한국에 돈 빌려줄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우리와 같이 분단된
공산국 동독과 대치한 서독에 돈을 빌리려 대사를 파견해서
미국의 방해를 무릅쓰고 1억 4000만 마르크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당시 우리는 서독이 필요로 한 간호사와
광부를 보내주고 그들의 봉급을 담보로 잡혔다.

고졸 출신 파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6천이 몰렸다.
그들 중에는 정규 대학을 나온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

면접 볼 때 손이 고와서 떨어질까 봐 까만 연탄에 손을 비비며
거친 손을 만들어 면접에 합격했다.

<항공기가 그들을 태우기 위해 온 김포공항에는 <사와 광부들의 가족,
친척들이 흘리는 눈물로 바다가 되어 있었다.


낯선 땅 서독에 도착한 간호사들은 시골병원에 뿔뿔이 흩어졌다.
말도 통하지 않는 여자 간호사들에게 처음 맡겨진 일은
병들어 죽은 사람의 시신을 닦는 일이었다.

린 간호사들은 울면서 거즈에 알콜을 묻혀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체를
리저리 굴리며 닦았다.
하루종일 닦고 또 닦았다.

남자 광부들은 지하 1000미터 이상의 깊은 땅 속에서
그 뜨거운 지열을 받으며 열심히 일 했다.

하루 8시간 일하는 서독 사람들에 비해 열 몇 시간을
그 깊은 지하에서 석탄 캐는 광부 일을 했다.
서독 방송, 신문들은 대단한 민족이라며 가난한 한국에서 온
여자 간호사와 남자 광부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억척스럽게 일 할 수 있을까? 해서
부쳐진 별명이 코리안 엔젤이라고 불리었다.

몇 년 뒤 서독 뤼브케 대통령의 초대로 박 대통령이 방문하게 되었다.
그 때 우리에게 대통령 전용기는 상상할 수도 없어
미국의 노스웨스트 항공사와 전세기 계약을 체결했지만
쿠데타군에게 비행기를 빌려 줄 수 없다는
미국 정부의 압력 때문에 그 계약은 일방적으로 취소되었다.

그러나 서독정부는 친절하게도 국빈용 항공기를 우리나라에 보내주었다.
어렵게 서독에 도착한 박 대통령 일행을
거리에 시민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뜨겁게 환영해 주었다.

코리안 간호사 만세!
코리안 광부 만세!
코리안 엔젤 만세!
<1963년 서독을 방문한 朴대통령이 두이스부르크 시민회관에서 광부들에게 연설하고 있다
대통령을 보고 울고있는 간호원들(右下)>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박 대통령은 창 밖을 보며 감격에 겨워 땡큐! 땡큐! 만을
반복해서 외쳤다.

서독에 도착한 박대통령 일행은 뤼브케 대통령과 함께 광부들을
위로, 격려하기 위해 탄광에 갔다.

고국의 대통령이 온다는 사실에 그들은 500 여명이 들어 갈 수 있는 강당에 모여들었다.
박 대통령과 뤼브케 대통령이 수행원들과 함께 강당에 들어갔을 때
작업복 입은 광부들의 얼굴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대통령의 연설이 있기에 앞서 우리나라 애국가가 흘러 나왔을 때
이들은 목이 메어 애국가를 제대로 부를 수조차 없었다.

대통령이 연설을 했다. 단지 나라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이역만리 타국에 와서
땅속 1000 미터도 더 되는 곳에서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려 가며 힘든 일을 하고 있는
제 나라 광부들을 보니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우리 열심히 일 합시다.
후손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 합시다.
열심히 합시다
눈물에 잠긴 목소리로 박 대통령은 계속 일하자는 이 말을 반복했다.

가난한 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이역만리 타국 땅 수 천 미터 지하에 내려가
힘들게 고생하는 남자 광부들과 굳어버린
이방인의 시체를 닦으며 힘든 병원일 하고 있는 어린 여자 간호사들.

그리고, 고국에서 배곯고 있는 가난한 내 나라 국민들이 생각나서 더 이상 참지 못해
대통령은 눈물을 흘렸다.
대통령이란 귀한 신분도 잊은 채...
소리내어 눈물 흘리자 함께 자리하고 있던 광부와 간호사 모두 울면서
영부인 육 영수 여사 앞으로 몰려나갔다.
어머니! 어머니! 하며..

육 여사의 옷을 잡고 울었고, 그분의 옷이 찢어 질 정도로 잡고 늘어졌다.
육 여사도 함께 울면서 내 자식같이 한 명 한 명 껴안아 주며
조금만 참으세요 라고 위로하고 있었다.


광부들은 뤼브케 대통령 앞에 큰절을 하며 울면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한국을 도와 주세요. 우리 대통령님을 도와 주세요.
우리 모두 열심히 일 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를 수없이 반복했다.

뤼브케 대통령도 울고 있었다.
연설이 끝나고 강당에서 나오자 미쳐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
여러 광부들이 떠나는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붙잡고 우릴 두고 어디가세요.
고향에 가고싶어요. 부모님이 보고싶어요
하며 떠나는 박대통령과 육 여사를 놓아 줄 줄을 몰랐다.
강당에 입장하시는 박대통령

호텔로 돌아가는 차에 올라 탄 박대통령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옆에 앉은 뤼브케 대통령은 손수건을 직접 주며 우리가 도와 주겠습니다.
서독 국민들이 도와 주겠습니다 라고 힘주어 말했다.

서독 국회에서 연설하는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돈 좀 빌려주세요.
한국에 돈 좀 빌려주세요.

여러분들의 나라처럼 한국은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여 이기려면 분명 경제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 돈은 꼭 갚겠습니다. 저는 거짓말 할 줄 모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돈 좀 빌려주세요 를 반복해서 말했다.

당시 한국은 자원도 돈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다.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20여 개국,
당시 필리핀 국민소득 170불, 태국 220불 등...
이때, 한국은 76불이었다.
우리 밑에는 달랑 인도만 있었다.

세계 120개 나라 중에 인도 다음으로 못 사는 나라가 바로 우리 한국이였다.
광부들의 숙소 방문

1964년 국민소득 100달러! 이 100달러를 위해 단군 할아버지부터
무려 4,60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이후 그대들이 말하는 이른바 우리 보수 수구세력들은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들어  외국에 내다 팔았다.
동네마다 엿장수를 동원하여 머리카락 파세요! 파세요!
하며 길게 땋아 늘인 아낙네들의 머리카락을 모았다.

시골에 나이 드신 분들은 서울간 아들놈 학비 보태주려 머리카락을 잘랐고,
먹고 살 쌀을 사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래서 한국의 가발산업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예쁜 꽃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곰 인형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전국에 쥐잡기 운동을 벌렸다.

쥐털로 일명 코리안 밍크를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돈 되는 것은 무엇이던지 다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1965년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다.
 

행사도중 눈물을 닦으시는 육여사님

세계가 놀랐다. 저 거지들이 1억 달러를 수출해하며 한강의 기적이라고
전 세계가 경이적인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조국근대화의 점화는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들과 광부들이었다.
여기에 월남전 파병은 우리 경제 회생의 기폭제가 되었다.
참전용사들의 전후 수당 일부로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한반도에 동맥이 힘차게 흐르기 시작됐다.

우리가 올림픽을 개최하고, 월드컵을 개최하고,
세계가 우리 한국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국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그대들이 수구 보수세력으로 폄훼 하는 그 때 그 광부와 간호사들,
월남전 세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명심할 것은 그 때 이방인의 시신을 닦든 간호사와
수천 미터 지하 탄광에서 땀흘리며 일한 우리의 광부,
목숨을 담보로 이국전선에서 피를 흘리는 우리 국군장병,

작열하는 사막의 중동 건설현장에서, 일한 5,60대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그대들 젊은 세대들이 오늘의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에르하르트 수상과 회담(1964.12.9) 수상관저 (사진 가운데 분이 백영훈 통역관)
반전과 평화데모를 외치며 거리로 몰려나와 교통질서를 마비시키는
그대들이 과연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를 수구세력으로 폄훼 할 자격이 있는가...
그대들이 그때 땀흘리며 일한 오늘의 5,60대들을 보수 수구세력으로 폄훼 하기에 앞서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라.

국가경영을 세계와 미래라는 큰 틀 전체로 볼 줄 아는 혜안을 지녀야 하지 않겠는가?
보다 낳은 내일의 삶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즐겨 참고 견뎌
국민소득 4만불대의 고지 달성 때까지는 우리들 신,구 세대는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
이제 갈라져 반목하고 갈등하기에는 갈 길이 너무 멀다.

이제 우리 모두 한번쯤 자신을 돌아보며
같은 뿌리에 난 상생의 관계임을 확인하고 다시 한번 뭉쳐보자.

우리 모두 선배를, 원로를, 지도자를 존경하고 따르며,
우리 모두 후배들을 격려하고, 베풀고, 이해 해주면서 함께 가보자.

우리 대한민국의 앞날에 더욱 밝은 빛이 비추어 지리니!!

뤼브케 대통령(70세)과 박대통령(47세) 의장대 사열 (서독 본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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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눈물

오늘도 참으로 좋은 날입니다.   찬반의 여론이 분분하지만

잘한것은 잘 한 것이기에 

 5천년 동안의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준  근대의 한 인물이기에

동문페이지에서 퍼다가 보내 드립니다.

 제가 고1때 즉 1971년 교내사회과 경시대회(제물포고의 장학퀴즈 프로그램)에 반 대표로 나가

 맞춘 문제 중의 하나가 1971년도의 우리나라 수출목표액을 맞추는 문제였는데 

  제가 맞추었기에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정답 : 13억 5천만달러 30년이 지난 오늘 2003년도에는 아마 5백억달러가 넘지요. 

박정희대통령 집권초기에  서독광부, 간호사, 가발, 등등...

공해산업이라도 가리지않고 들여와서 강력한 수출 드라이브정책으로 밀고 나갔고,

 60년대 중반의 월남파병, 기술자 파견, 이어서 70년대 초에 중동 건설붐 등등....  

이 모두 다  오늘의 견인차역할을 했지요.  

 박정희의 눈물 5.16혁명 뒤 미국은 혁명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을 인정한다면 아시아, 또는 다른 나라에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원조도 중단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죤 에프 케네디 대통령이었다

박정희 소장은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 화이트 하우스까지 갔었지만 ..

.끝내 케네디는 박정희를 만나주지 않았다. 호텔에 돌아와 빈손으로 귀국하려고 짐을 싸면서

박정희 소장과 수행원들은 서러워서 한없는 눈물을 흘렸다.

 가난한 한국에 돈 빌려줄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우리와 같이 분단되어 공산당과 대치하고 있는 서독에 돈을 빌리기 위해 대사를 파견해서, 

 미국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1억4000 만 마르크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서독에 간호사와 광부가 필요해서  그들을 보내주고 

그들의 봉급을 담보로  잡혔다.

고졸 출신 파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6천이 몰렸다.  

그들 중에는 정규 대학을 나온 학사 출신도 수두룩 했다.

 면접 볼 때 손이 고와서 떨어질까 봐 까만 연탄에 손을 비비며 거친 손을 만들어 면접에 합격했다. 

 서독 항공기가 그들을 태우기 위해 온 김포공항에는

 간호사와 광부들의 가족 친척들이 흘리는 눈물로 눈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낯선 땅 서독에 도착한  간호사들은 시골병원에 뿔뿔이 흩어졌다

. 말도 통하지 않는 여자 간호사들에게 처음 맡겨진 일은, 병들어 죽은 사람의 시신을 닦는 일이었다.

어린 간호사들은 울면서  거즈에 알콜을 묻혀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닦았다.

 하루종일 닦고 또 닦았다.   남자 광부들은  지하 1000 미터 이상의 깊은 땅 속에서

그 뜨거운 지열을 받으며 열심히 일 했다.

하루 8시간 일하는 서독 사람들에 비해 ,열 몇 시간을 그 깊은 지하에서 석탄 캐는 광부 일을 했다.

 서독 방송 신문들은  대단한 민족이라며  가난한 한국에서 온 여자 간호사와 남자 광부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세상에 어떻게 저렇게 일 할 수 있었나 싶어,’  그들의 별명을 '코리안 엔젤'이라고 붙여 주었다.

 몇년 뒤 서독 뤼브케 대통령의 초대로 박 대통령은 서독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 때 우리에게 대통령 전용기는 상상할 수도 없어, 미국의 노스웨스트항공사와 계약까지 체결했지만 ,

쿠데타 정부에게 비행기를 빌려 줄 수 없다는  미국 정부의 압력 때문에  그 계약은 일방적으로 취소되었다.

  그러나 서독 정부는 친절하게도 국빈용 항공기를 우리나라에 보내주었다. 

  어렵게 서독에 도착한 박 대통령 일행을 거리에 시민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뜨겁게 환영해 주었다. 

 코리안 간호사 만세 ! 코리안 광부 만세 ! 코리안 엔젤 만세 !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박 대통령은  창밖을 보며 감격에 겨워  땡큐 ! 땡큐 ! 만을 반복해서 외쳤다.

 서독에 도착한 박 대통령 일행은, 뤼브케 대통령과 함께  광부들을 위로 격려하기 위해  탄광에 갔다.  

고국의 대통령이 온다는 사실에 그들은 500 여명이 들어 갈 수 있는, 대통령이 연설하기로 되어있는 그 곳에 모여들었다.

 박 대통령과 뤼브케 대통령 수행원들이 강당에 들어갔을 때  작업복 입은 광부들의 얼굴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대통령 연설 전에 우리나라 애국가가 흘러 나왔을 때  이들은 목이 메어 애국가를 제대로 부를 수조차 없었다.

대통령이 연설을 했다. 단지 나라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이역만리 타국에 와서, 땅속 1000 미터도 더 되는 곳에서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려 가며 힘든 일하고 있는 제 나라 광부들을 보니,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우리 열심히 일 합시다. 후손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 합시다. 열심히 일 합시다” 눈물에 잠긴 목소리로

박 대통령은 계속 열심히 일하자는 이 말을 반복했다. 

 가난한 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이역만리 타국 땅 수천미터 지하에 내려가  힘들게 고생하는   남자 광부들과

 굳어버린  이방인의 시체를 닦으며  힘든 병원일 하고 있는  어린 여자 간호사들...

그리고 고국에서 배곪고 있는   가난한 내 나라 국민들이 생각나서 더 이상 참지 못해 그는 눈물을 터트렸다.

 대통령이란 귀한 신분도 잊은 채 소리내어 눈물 흘리고, 자리하고 있던  광부들은  모두 함께 울면서

육영수 여사 앞으로 몰려나갔다. 어머니~ ! 어머니~ !하며 육 여사의 옷을 잡고 울었고

 그분의 옷이 찢어 질 정도로 잡고 늘어졌다.

육 여사도 함께 울면서, 내 자식같이 한명 한명 껴안아 주며 “조금만 참으세요”라고 위로하고 있었다

 광부들은 뤼브케 대통령 앞에 큰절을 하며 울면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한국을 도와 주세요.

우리 대통령님을 도와 주세요 우리 모두 열심히 일 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를 수없이 반복했다.

뤼브케 대통령도 울고 있었다. 연설이 끝나고 강당에서 나오자    미쳐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

여러 광부들이 떠나는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붙잡고

 "우리를 두고 어디가세요. 고향에 가고 싶어요. 부모님이 보고싶어요” 하며

 떠나는 박대통령과 육 여사를 놓아 줄 지를 몰랐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에 올라 탄 박 대통령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옆에 앉은 뤼브케 대통령은 손수건을 직접 주며 "우리가 도와 주겠습니다.

 서독 국민들이 도와 주겠습니다" 라고 힘주어 말했다.

서독 국회에서 연설하는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돈 좀 빌려주세요. 한국에 돈 좀 빌려주세요.

 여러분들의 나라처럼 한국은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여 이기려면  분명 경제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 돈은 꼭 갚겠습니다.

 저는 거짓말 할 줄 모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돈 좀 빌려주세요”를 반복해서 말했다.

당시 한국은 자원도 돈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다.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20여 개국, 필리핀 국민소득 170여불, 태국 220여불 등. 한국은 76불이었다.

 우리 밑에는 딸랑 인도만 있었다. 세계 120여 개국 나라 중에 인도 다음으로 못 사는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였다.

1964년 국민소득 100달러, 100달러를 위해 단군 할아버지부터 460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우리는 머리카락을 잘라다 외국에 팔았다.

동네마다 엿장수를 동원하며 “머리카락 파세요. 파세요”하며 사람 머리카락을 모았다.

 시골에  나이 드신 분들은 ,서울간 아들놈 학비 보태주려 머리카락을 잘랐고,

 먹고 살 쌀을 사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래서 한국의 가발산업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예쁜 꽃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곰 인형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전국에 쥐잡기 운동을 벌였다. 쥐털로 일명 코리안 밍크를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돈 되는 것은 무엇이던지 다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1965년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다.

세계가 놀랐다. “저 거지들이 1억달러를 수출 해?”하며

‘한강의 기적’이라며 전 세계가 경이적인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조국  근대화의 점화는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들과 광부들이었다.

 박 대통령이 왜 그토록 경제발전에 집착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 그는 '큰 아버지'였다. 적어도 지금 우리세대와 더 나아가 앞으로 태어날 후손들을 생각할 줄 아는

 책임감 있는 큰 아버지였다. 우리가 올림픽을 개최하고 월드컵을 개최하고

 세계가 이 만큼이라도 한국을 무시하지 못하는 상황을 만든 데에는

 박대통령과 당시 세대들이 힘을 합쳐 이방인의 시체를 닦으며, 수천미터 지하에서 땀을 흘리며,

 저 열사의 중동에서 일하고 일한 지난 세대들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이었다는

 사실을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고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는 ,허구한 날 반대만 일삼고,

 자유 대한민국의 전복을 획책하는 빨간 무리들과 싸우며

 이 나라 경제건설을 위해 몸바쳐 일했다.

- 박 대통령과 땀흘려 일한 저 분들이 없었다면 분명 오늘은 없다. - 퍼온곳 : 한겨레 게시판 **

 우리는 이렇게 해서  이만불 국민소득을 눈앞에 두게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태풍 복구에 온힘을 보태어 하루 빨리 제자리로 돌아가는데 앞장 섭시다 **



 원래 한국은 이 정도로 사는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송 라 (펌)   
 
 어느 여대생의 글
 
 
 저는 젊은 20대 여성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가난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기에 "경제발전"
 이라는 말은 가슴에 다가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한국은 이 정도로 사는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윗세대 분들까지만 해도 방글라데시나 아프리카보다
 못 살았던 세계 최고의 거지국가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고
 그런 말을 학교에서 배워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쓰여진
 정치학 책 몇 권과 인터넷에 떠도는 쪼가리들을 읽고서는
 세상에 대해서 다 아는 것 마냥 떠들고 다녔습니다.
 20대 초반 특유의 정의감으로 세상을 선/악으로 구분해서
 독재자를 비판하고 짓밟을수록 내가 "멋있고" "진보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박정희를 옹호하는 사람을 보면 "인권을
 탄압하면서 유신독재를 했던 파시스트를 어떻게 옹호하나요?"며
 거품 물고 비판하는 반박 글을 많이 썼습니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을 옹호하는 교수님를 향해서 수구꼴통
 교수라며 욕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보며, "독재자를 숭배하는 부끄러운 한국인의 모습을 보라.
 한국인의 후진적인 정치의식을 보여 준다"라며 경멸했습니다.
 대학교육이라는 고등교육을 받은 내가, 박통교에 빠져있는
 무식한 늙은이들과 보수꼴통들을 깨우치게 만들고 계도해야
 겠다는 책임감까지 느꼈습니다.
 
 왜냐면 박정희=파시스트 악마였고 박정희야 말로 한국을 망친
 창피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경제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한국의 경제발전을 알게 되고
 "그래도 대단한 경제발전을 이루었구나" 정도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 경제발전은 다른 나라도 다 이루는 것이며
 오히려 정경유착과 재벌만 키운 나라를 망친 경제발전
 이었으므로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은 IMF의 원인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저의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된 것은 시야를 넓혀 외국의
 경제발전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입니다.
 한국이 당시 필리핀이나 아프리카 가나보다 못살았던 세계
 최빈국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당시 신생
 독립국들 중에 한국이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던 거지국가가 앞서있던 아시아 국가들을
 제치고 과거 조공국가였던 중국도 너끈히 누르고 경제 강국으로
 떠오르는 것은 한국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 같았습니다.
 
 그때서야 우리 윗세대들은 "보수 꼴통"이 아니라 한국역사상
 가장 급격한 발전을 일으킨 "위대한 세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세계적 정치인들이 박정희를 어떻게 보는 가를 알게 되면서
 많이 놀랐습니다. 중국 최고 인기 정치인인 등소평에 대해서
 공부하다 보면 등소평이 박정희 모델을 추종해서 따라하고
 포항제철을 부러워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캠브리지의 수재이자 싱가폴의 아버지인 리콴유를 알게 되면서
 리콴유가 박정희에게 질투심과 경쟁심을 느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서양에서 똑똑한 촌철살인 발언으로 아시아의 입으로
 불리는 마하티르는 공개적으로 "나는 박정희를 존경한다.
 박정희처럼 되고 싶다."
 
 말레이시아 비전인 "look east policy"는 한국의 경제발전을
 모델로 삼은 것이다"라고 말하며 박정희의 경제정책과 어법
 까지도 따라하는 것을 보니 기분이 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파키스탄의 무샤라프도 "나는 박정희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고 박정희 대통령처럼 되고 싶다" 라며 흠모하고,
 지금도 몽골, 카자흐스탄 대통령 등등 외국의 정치인들이 얼마나
 박정희를 대단하게 평가하며 따라하려고 하는지를 알게 되었슴다.
 
 그때 저는 흔들렸습니다.
 내가 "파시스트 악마"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외국 정치인들 사이
 에서는 하나의 "롤모델"로 연구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후진타오가 이례적으로 박대표를 만난 것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알려졌지만 후진타오는 대학 때부터 박정희 대통령과 새마을
 운동에 대해서 직접 공부까지 한 사람이고, 후진타오 이외에도
 중국정치인들은 박정희 대통령 전기를 읽고 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중국의 젊은이들이 한국의 경제발전에 대해서 너무 궁금해 하여
 중국대학 수업에 박정희 강좌를 개설한다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제가 촌스럽다고 무시했던 "새마을 운동"은 후진국들의 성공적
 발전모델로 인식되어 이라크, 몽골, 콩고 같은 아프리카 나라들
 에서도 한국에 새마을 운동 사절단을 보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왜 하필 한국의 새마을 운동이냐? 라고 물으면 그들은 말합니다.
 "한국만큼 극적인 경제발전을 이룬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과 독일은 원래 부자나라였지만 한국은 전쟁을 겪은 이후
 잿더미에서도 저렇게 부자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후진국들
 에게 우리도 가능하다는 희망을 준다"
 외국의 경제학 책들에서도 좌우를 막론하고 한국의 경제성장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경제발전은 제 3세계 국가들에게 하나의 최상의 모델로
 인식되고 있다. 경제 불평등 정도도 낮으면서 100년 걸리는
 산업화를 20년이라는 단기간 내에 이루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책에서는 "한국의 경제발전은 기존 경제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전쟁국가에서 20년 만에 제철, 자동차, 조선
 업을 생산해 내는 중공업 위주로 바뀌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세계
 경제사에서 하나의 기적으로 불릴 만 하다 "
 
 그 때서야 알았습니다.
 젊은 세대가 당연히 누리고 있는 한국의 경제발전이라는 것이
 외국에서는 얼마나 대단하게 평가하고 있는 것인지를.
 개인적으로 업적은 대단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에 대한
 지나친 "숭배"나 "영웅화"는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혼자서 도로를 짓고 혼자서 공장을 돌리고
 제품을 만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경제발전이 국민들의 노력만으로 저절로 이루어
 졌다고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도 무식한 소리입니다. 경제
 발전에서는 리더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며, 특히 농업국에서
 중공업 위주로 산업이 재편성 된 과정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추진력이 대단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은 너무나 객관적인 사실
 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백낙청, 이대근, 안병직 같은 과거
 좌파경제학자들 까지도 인정하는 일입니다.
 
 저는 박근혜 대표의 지지자도 아닙니다.
 하지만 박근혜 대표님 아버님 고 박정희 대통령께, 철없던 시절
 아버님을 미친듯이 욕하며 저주했던 저의 무식함에 대해서 죄송
 하다고 전해 주세요.
 젊은 세대들은 경제성장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이기 때문에 한강의
 기적이 그냥 저절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많고,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외국에서 평가를 듣지 않으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젊은 세대들이 외국배낭여행을 가서도 'south korea'라고 하면
 무시 받지 않고 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혜안과 추진력, 그리고 윗세대들의 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야참 이 글을 읽고 눈시울을 안적힐 사람 없겠지

 

   
지독한 현실주의자 박정희
박정희대통령의 업적 

한국전력 발족(1961. 7. 1, 1982. 1. 1 한국전력공사로 개칭)
섬진강 수력발전소 재 기공(1961. 8. 19, 준공 : 1965. 12. 20)
수출조합법 공포(1961. 9. 9)
춘천 수력발전소 기공(1961. 9. 21, 준공 : 1965. 2. 10)
공업표준화법 제정(1961. 9. 30)
전원개발 5개년 계획 발표(1961. 11. 24)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 발표(1962. 1. 13)
울산을 중화학공업 우수 자연적 입지조건으로 결정 공포(1962. 1. 27)
기술진흥 5개년 계획 발표(1962. 2. 2)
울산공업지구 설정 및 기공식(1962. 2. 3)
의암댐 착공(1962. 3. 1, 준공 : 1967. 8. 1)
수출진흥법 등 16개 법령 공포(1962. 3. 17)
남강 다목적댐 착공(1962.4, 준공 : 1970. 7)
대한무역진흥공사 발족(1962. 6)
남양송신소 준공(1962. 9. 10, 기공 : 1960. 12. 31)
선암댐 착공(1962. 9, 준공 : 1964. 12)
사연댐 착공(1962. 9, 준공 : 1965. 12)
해운센터 착공(1962. 10. 10)
새나라자동차 생산개시(1962. 11, 1963. 5월까지 조립 생산함)
광주 내연 준공(1962. 11. 15)
금성사 라디오 첫 수출(1962. 11. 28, 62대/$594)
제2비료(호남비료) 나주공장 준공(1962. 12. 28, 현 L/G화학 나주공장)
희야댐 착공(1962년, 준공 : 1964년)
보리와 밀 품종개발에 성공(1963. 1. 25)
울산정유공장 착공(1963. 3. 12, 준공 : 1964. 5. 7)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 공포(1963. 4. 17)
직업재활원 개원(1963. 9. 25)
서독 광부 1진 123명 취업(1963. 12. 21)
쌍용시멘트 영월공장 준공(1964. 4, 기공 : 1962. 9. 7)
한일시멘트 단양공장 준공(1964. 6. 20, 기공 : 62. 11. 20)
현대시멘트 단양공장 준공(1964. 7)
부산 감천 화력발전소 준공(1964. 8. 20, 기공 : 1961. 2, 132천㎾)
식량증산 7개년(1965~71) 계획 발표(1964. 8)
한국수출산업공단 설립(1964. 8, 서울디지털, 부평, 주안, 남동, 북평국가산업단지 관리)
공업품 표준 규격 제정과 KS 표시 허가제 실시(1964. 8)
제3비료(영남화학) 울산공장 기공(1964. 11. 29, 준공 : 1967. 3. 14, 현, 동부한농화학)
1억불 달성 제1회 수출의 날 제정(1964. 11. 30, 기념식 : 1964. 12. 5)
서울 구로지역 수출산업공업단지(1~6공단) 착공(1965. 3. 12, 준공 : 1974. 11. 5)
경제 각의, 잠업증산 5개년 계획 의결(1965. 3. 18)
제4비료(진해화학)공장 기공(1965. 5. 2, 준공 : 1967. 1. 7)
영월 화력발전소 1,2호기 준공(1965. 9. 1, 기공 : 1962. 5)
한국해외개발공사 발족(1965. 11. 3)
군산화력발전소 기공(1965. 12. 1, 준공 : 1968. 10. 31)
국내 텔렉스 400회선 개통(1965. 12. 16)
비인공업단지 조성(1966. 4. 29)
팔당댐 기공(1966. 6. 8, 준공 : 1973. 12. 31)
제2차 경제개발 5개년(1967~1971) 계획 발표(1966. 7. 29)
울릉도 추산수력발전소 준공(1966. 8. 1, 착공 : 1964. 4. 4)
아세아시멘트 제천공장 준공(1966. 12. 13)
광주공업단지 착공(1966. 12. 16)
아시아개발은행 가입(1966. 12. 17)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
여수 제2정유공장 기공(1967. 2. 20, 준공 : 1969. 6. 3)
전주 제1공업단지 기공(1967. 3. 22)
대구 3공업단지 기공(1967. 3. 31)
속초 수산센터 준공(1967. 4. 14)
소양강 다목적댐 기공(1967. 4. 15, 담수 : 1972. 11. 25, 준공 : 1973. 10. 15)
제5비료(한국비료) 울산공장 준공(1967. 4. 20, 현 삼성정밀화학)
동양시멘트 삼척공장 준공(1967. 4. 24)
영남화력발전소 제2호기 기공(1967. 4, 준공 : 1970. 12. 28)
GATT 가입(1967. 4. 15)
부산 연합철강 준공(1967. 9. 29)
의암수력발전소 1,2호기 준공(1967. 11)
원자력발전소 건설 계획 발표(1968. 1. 5)
울산 석유화학공업단지 기공식(1968. 3. 22, 준공 : 1972. 10. 31)
대암댐 기공(1968. 6, 준공 : 1969. 12)
화천수력발전소 4호기 준공(1968. 6)
축산개발 4개년 계획 확정(1968. 7. 26)
안계댐 기공(1968. 8, 준공 : 1971. 12)
제1회 한국무역박람회(1968. 9. 9~10. 20)
청평수력발전소 4호기 준공(1968. 9, 기공 : 1966. 9)
쌍용시멘트 동해공장 준공(1968. 10. 31)
한국투자개발공사 발족(1968. 12. 16)
한국수출품포장센터 발족(1969. 2. 8)
자동차공업육성 기본계획 발표(1969. 2)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안 발표(1969. 4. 2)
금산 위성통신지구국 기공(1969. 5. 15, 준공 : 1970. 6. 22, 제2위성통신지구국 준공 : 1977. 8. 25)
부산화력발전소 3,4호기 준공(1969. 6. 4, 기공 : 1967. 7)
알루미늄제련공장 울산공업단지에 준공(1969. 7. 3)
마산수출자유지역 설치 결정(1969. 9. 3, 착공 : 1970. 5, 준공 : 1973년 초)
경기도 안성군 한독낙농목장 준공(1969. 10. 11)
부평단지 준공(1969. 10. 31)
관악산 기상레이더 설치(1969. 11. 29)
철강공업육성법 공포(1970. 1. 1)
수출정보센터 개관(1970. 2. 7)
포항종합제철공업 단지 기공식(1970. 4. 1, 제1기 설비종합 준공 : 1973. 7. 3)
마산 수출자유지역 관리청 개청(1970. 4. 3)
인천화력발전소 제1호기 준공(1970. 5. 29)
관세청 개청(1970. 8. 21)
수출 10억달러 달성(1970년)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확정 발표(1971. 2. 9)
당인리 화력발전소 준공(1971. 4. 10, 착공 : 1966. 8. 3, 현 서울화력발전소)
안동다목적댐 기공(1971. 4, 준공 : 1976. 10)
중부산업단지관리공단 설립(1971. 5, 구미국가산업단지 관리)
내수용 생산업체에서도 수출을 의무화할 것을 지시(1971. 10. 25)
서울-부산간 장거리 자동 전화 개통(1971. 3. 31)
제3차 인력개발 5개년 계획 확정(1972. 1. 27)
녹색혁명추진(1972. 2. 9, 통일벼 개발)
기업사채 동결 등 긴급 명령 발표(1972. 8. 3)
중화학공업정책 육성 선언(1973. 1. 12)
공업진흥청 신설(1973. 1. 12)
현대울산조선소 기공(1973. 3. 25, 제1호선 진수 : 1974. 2. 15)
중화학공업의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온산, 창원, 여수~광양, 군산~비인, 구미 등 5개 대단위공업단지 조성 계획(1973. 3. 26)
춘천, 대전, 원주, 청주, 전주, 이리, 광주, 목포 등을 지방공업개발 장려 지구로 지정(1973. 5. 4)
중화학공업(철강, 석유화학, 비철금속, 기계, 조선, 전자)건설계획 확정(1973. 5. 24)
서울 부산에서 처음으로 가격표시제 실시(1973. 6. 1)
기능공 양성정책 수립(1973. 7. 10)
주안단지(5공업단지) 준공(1973. 7. 15)
정수직업훈련원 개원(1973. 7. 18, 현 서울정수기능대학)
호남종합화학기지 내 에틸렌계열공장 4개, 프로필렌계열 2개, 기타 7개 총 13개 공장건설계획 확정(1973. 8. 2)
구미전자공업 1단지 조성 완료(1973. 10. 5)
옥포조선소 기공(1973. 10. 1, 준공 : 1981. 10. 17)
이리 수출자유지역 착공(1973. 10. 17, 준공 : 1974. 12)
충주 제6비료공장 준공(1973. 10. 26)
산업기지개발구역으로 창원, 온산, 옥포, 죽도, 안정, 여천 지정 (1974. 3. 27, 창원 : 종합기계공업기지, 온산 : 석유정제•비철금속 공업기지, 옥포•죽도•안정 : 조선공업기지, 여천 : 종합화학공업기지)
동남산업단지관리공단 설립(1974. 4, 창원, 울산, 온산, 안정국가 산업단지 관리)
창원기계공업단지 조성(1974. 4)
죽도조선소 기공(1974. 4, 준공 : 1980. 12. 5)
기업공개와 건전한 기업풍토 조성을 위한 박 대통령 특별지시 발표(1974. 5. 29)
주안단지(6공업단지) 준공(1974. 11. 5)
쌀의 완전 자급자족 달성(1976년)
대청다목적댐 기공(1975. 3. 27, 준공 : 1981. 6. 30)
여천석유화학단지 합동 기공(1975. 11. 10, 준공 : 1980. 1. 29)
통일벼보다 질이 좋고 다수확품종인 밀양21호와 23호를 개발하여 77년부터 통일벼를 없애고 신품종으로 대체할 방침을 수립(1975. 11. 20)
청평 양수댐 기공(1975년, 준공 : 1980. 12. 18)
근로자 재산 형성 저축제 실시(1976. 1. 19)
한국기술검정공단법안 마련(1976. 5. 18, 기술인력관리, 자격, 검정의 일원화)
포항제철 제2기 확장공사 준공(1976. 5. 31)
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확정 발표(1976. 6. 18)
국산자동차 포니 첫 수출(1976. 6)
반월 신도시 건설 발표(1976. 10. 2, 기공 : 1977. 3. 30)
특별소비세법 제정(1976. 12. 22)
초고압송변전시설 준공(1977. 4. 30)
월성 원자력 1호기 기공(1977. 5. 15, 준공 : 1982. 3. 10)
여수화력 2호기 준공(1977. 6. 30)
부가가치세 시행(1977. 7. 1)
제23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우승(1977. 7. 10)
여수 제7비료공장(남해화학) 준공(1977. 8. 4, 기공 : 1973. 10)
서부산업단지관리공단 설립(1977. 11, 반월, 시화, 아산, 석문국가 산업단지 및 천안 외국인전용단지 관리)
연초댐 기공(1977. 11, 준공 : 1979. 12)
수출 100억 달러 기념식(1977. 12. 22)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돌파(1977년)
종합행정정보망 구성키 위해 행정전산화 10개년 계획 마련(1978. 2. 20)
전 국토의 토양정밀조사 완료(1978. 2. 23)
고리 원자력발전소 준공(1978. 4, 기공 : 1971년)
충주 다목적댐 기공(1978. 6. 3, 준공 : 1986. 10)
제24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 개막(1978. 8. 30, 부산)
주요 도시간 장거리 자동공중전화 개통(1978. 12. 31)
쌀 4천만 섬 수확(1977년)
인천화력발전소 3, 4호기 준공(1979. 4, 착공 : 75. 5)
고리원자력 3, 4호기 기공(1979. 4. 9)
원자력발전소 9, 10호기 울진에 건설키로 확정(1979. 6. 12)
온산 동제련소 준공(1979. 12. 11)
공산댐 기공(1979년, 준공 : 1981년)
삼량진 양수댐 기공(1979년, 준공 : 1985년)
수출국 1961년 25개국에서 163개국으로 확대(1979년)
일부 / 이하생략...


국토개발

국토건설단 창단식(1962. 2. 10)
동해북부선 개통(2차 공사 : 옥계 → 경포대 착공 : 1962. 4. 26, 개통 : 1962. 10. 31)
동진강지역종합개발공사 착공(1963. 3. 15, 준공 : 1972. 12. 31, 김제 부안)
황지선 개통(1963. 5. 30, 황지지선 착공 : 1961. 8. 10, 개통 : 1962. 11. 30 황지본선 착공 : 1961. 8. 12, 개통 : 1963. 5. 30)
능의선(서울교외선) 개통(1963. 8. 20, 1차 능곡 → 가릉 착공 : 1959. 10. 14, 개통 : 1961. 7. 10, 2차 가릉 → 의정부 착공 : 1963. 4. 27, 개통 : 1963. 8. 20)
제2한강교(현, 양화대교) 준공(1965. 1. 25, 착공 : 1962. 6. 20, 신교 착공 : 1979. 1. 4 / 준공 : 1982. 2. 2)
전남지구 6천여 정보 간척공사 기공(1965. 5. 18)
수자원종합개발 10개년 계획 수립(1965. 6. 30)
경인복선 개통(1965. 9. 18, 주안~영등포)
진삼선 개통(1965. 12. 7, 사천~삼천포, 착공 : 1964. 4. 29)
고한선 개통(1966. 1. 19, 증산 → 고한, 고한 → 황지 개통 : 1973. 10. 16)
인천항(제2도크) 착공(1966. 6. 1, 준공 : 1974. 5. 10)
경북선 개통(1966. 10. 10, 점촌→영주)
한남대교 착공(1966. 1. 19, 준공 : 1969. 12. 25)
정선선 개통(1967. 1. 20)
대도시 그린벨트설정 공포(1967. 2. 10, 서울, 부산 등)
충남 예당 전천후개발사업 15년만에 준공(1967. 4. 28)
한강변 제1로 개통(1967. 9. 23, 제1한강교 → 영등포 입구)
한국수자원개발공사 발족(1967. 11. 23)
정선선 개통(1968년, 착공 : 1962. 5. 10)
경인고속도로 개통(1968. 12. 21 가좌I/C까지 23.4㎞, 전선 29.5㎞ 개통 : 69. 7. 21)
경수고속도로 개통(1968. 12. 21 신갈 I/C까지 31.3㎞, 착공 : 1968. 2. 1)
경전선 개통(1968. 2. 7)
한강변 2로 개통(1968. 6. 27)
경부고속도로 전 노선 확정(1968. 9. 12)
포항항 건설(68~73)
한국도로공사 발족(1969. 2. 15)
지하수개발공사 발족(1969. 2. 15)
3•1 고가도로 개통(1969. 3)
언양-울산 고속도로 착공(1969. 6. 20, 개통 : 1969. 12. 28)
전남 고흥 간척사업 완공(1969. 7. 15)
서울 신도시건설 착수(1969. 7. 29, 한강이남 여의도)
중앙, 태백, 영동선 등 산업선 전철화 기공(1969. 9. 12, 청량리~북평 320.8㎞ 준공 : 1975. 12)
호남 야산개발단지 준공(1969. 10. 6)
천안~대전 고속도로 개통(1969. 12. 10)
제3한강대교 개통(1969. 12. 26, 현 한남대교)
대구~부산 고속도로 개통(1969. 12. 29, 착공 : 1968. 9. 11)
문경지선 개통(1969. 6. 10, 문경~진남)
호남고속도로 착공(1970. 4. 15, 개통 : 1973. 11. 14)
서울대교 개통(1970. 5. 16, 착공 : 1968. 2, 현 마포대교)
경부고속도로 준공식(1970. 7. 7, 서울~부산 428㎞, 기공 : 1968. 2. 1)
남산 1호 터널 개통(1970. 8. 15, 착공 : 1969년)
수도권 지하철 전철사업 발표(1970. 10. 22)
남산 2호 터널 개통(1970. 12. 4, 착공 : 1969년)
4대강(한강, 금강, 영산강, 낙동강)유역 종합개발 계획(1970. 12. 17)
강변4로 개통(1970. 12. 24)
제주도 일주도로 준공(1971. 1. 31)
영동고속도로 착공(1971. 3. 13, 개통 : 1975. 10. 13)
거제대교 건설(1971. 4. 8)
서울 지하철 1호선 기공(1971. 4. 12, 개통 : 1974. 8. 15)
국토종합개발계획 확정(1971. 9. 7)
통일로(서울~문산) 개통(1971. 12. 18)
남해고속도로 착공(1972. 1. 10, 개통 : 1973. 11. 14)
전국을 10대 관광권으로 하는 관광개발 5개년 계획 확정(1972. 1. 20)
수도권 상수도 취수구 팔당으로 이전 결정(1972. 5. 26)
전국 702개 도서를 72년부터 76년까지 개발키로 확정(1972. 6. 26)
부산, 인천, 묵호, 군산 등 4개항을 집중 개발하겠다고 언명(1972. 11. 24)
지리산, 설악산, 낙동강 하류 철새보호지역으로 지정(1972. 12. 11)
제주도 일원에 그린벨트 설정(1973. 3. 8)
중앙선전철 개통(1973. 6. 20, 청량리~제천)
남해대교 개통(1973. 6. 22)
태백선 개통(1973. 10, 제천~태백)
동해고속도로 착공(1974. 3. 26, 개통 : 1975. 10. 14)
영동선 전철 개통(1975. 12. 5)
영동•동해안 종합개발계획 확정(1976. 3. 24)
천호대로•천호대교 개통(1976. 7. 5)
잠수교 개통(1976. 7. 15)
구마고속도로 준공(1977. 12. 17, 기공 : 1976. 6. 24)
성산대교 기공(1977, 준공 : 1980. 6. 30)
호남선 복선 준공(1978. 3. 30, 대전~이리)
남해지선 신설 및 남해고속도로 4차선 확장공사 착공(1978. 5. 22, 개통 : 1981. 9)
낙동강유역 종합개발사업 기공(1978. 7. 2)
지하철 2호선 강북구간 착공(1979. 3. 17)
한국토지개발공사 발족(1979. 3. 27)
성수대교 개통(1979. 10. 16)
일부 / 이하생략...


새마을운동과 농촌근대화

농어촌개발공사 창립(1967. 12. 1)
농업기계화 8개년 계획 확정(1969. 2. 22)
농어촌근대화촉진법 승인(1969. 11. 1)
새마을가꾸기운동 제창(1970. 4. 22)
권농일 기념행사 참석하여 “자조정신” 강조(1970. 6. 10)
전국 읍면장에게 새마을가꾸기 교육 실시(1970. 10. 5~8)
수원 벼베기 행사에 참석하여 “농민의 자조정신과 자발적 노력은 농촌부흥과 근대화의 근본요소”라고 언명, 전남 광주에서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 촉진대회(1970. 11. 11)
금강, 평택지구 다목적 농업개발사업 기공(1971. 3. 23)
내 집 앞 쓸기운동 제창, 청와대 직원들과 거리 청소(1971. 3. 24)
제3회 어민의 날 치사에서 자조, 자립정신 강조(1971. 4. 1)
충북 음성 지원유세에서 “나의 소망은 농촌의 가난을 없애는 일” 이라고 말함(1971. 5. 18)
월간경제동향보고에서 경남 거창군 관내 일원 우수새마을 보고(1971. 6. 7)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 “근면과 검소, 농어민의 소득증대와 증산에 도정의 목표를 두어야 한다고”고 강조(1971. 7. 30)
내무부에 새마을 전담 부서(지역개발담당관, 도시개발관, 농촌개발관, 주택개량관) 신설(1971. 8. 19)
월간경제동향보고회에서 “성실한 지도자, 협동정신, 농민도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1971. 9. 7)
경북 영일군 기계면 문성동의 새마을가꾸기 모범부락과 포항제철 시찰(1971. 9. 17)
새마을정신을 「근면, 자조, 협동」으로 규정(1971. 9. 29)
1972년 새마을가꾸기 대상 16,600개 마을 선정 완료(1971. 10. 30)
농협중앙회에 독농가연수원 설치(1972. 1. 14, 새마을지도자교육 실시)
새마을지도자교육 기본방침 대통령 재가(1972. 1. 21, 교육장소 : 1972년도는 경기도 고양군 소재 농협대학에서 1973년 이후는 수원시 소재 농민회관, 교육기간 : 2주간, 교과편성 : 새마 을정신 30% 전문과목(성공사례, 실기) 70%)
전북도 순시에서 “자조정신이 없는 농민은 도울 수 없으며 농어촌의 투자는 해마다 늘려 갈 것이다”라고 강조(1972. 2. 3)
경북도 순시에서 “농촌근대화를 이룩하기 위하여 농민들의 자조정신 함양과 협동봉사하는 정열을 불태워야 한다”라고 강조(1972. 2. 7)
독농가연수원 순시(1972. 2. 24)
전국 부락세 조사(1972. 3. 1~5. 15)
대통령령 제6104호로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 규정 제정(1972. 3. 7)
지방장관회의 유시에서 “금년도의 최 중점사업은 새마을운동이며 새마을정신을 범국민화하라”고 지시(1972. 3. 7)
서울시 방배동의 새마을 현장 시찰하고 전국의 임야에 유실수를 심어 식량화 방안 강구하라고 관계관에 지시(1972. 3. 24)
서울 동대문구 중화동민들이 새마을운동으로 도로확장사업을 하고 있는 현장 방문 격려(1972. 3. 30)
경기 가평군 가평읍 개곡리 새마을 시찰(1972. 4. 3)
진해시 풍호동 새마을사업장 시찰(1972. 4. 7)
경상남도의 새마을사업 현장 두루 시찰(1972. 4. 8)
청와대 국무회의 주재하고 새마을운동의 추진방법 논의(1972. 4. 11)
정부여당연석회의에서 “지금 전국적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는 마을운동의 기풍을 해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며 이 운동은 어느 정권적 차원의 운동이 아니라 민족번영의 추진운동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라고 강조(1972. 4. 14)
경인화력발전소 준공식에 참석하여 치사를 통해 “농어촌 구석구석 까지 송?배전시설을 갖추어 전화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고 밝힘(1972. 4. 17)
새마을노래 작사 작곡(1972. 4. 21)
새마을운동 촉진대회에서 “자신과 의욕이 없는 민족은 비록 아무리 좋은 여건과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이것을 보충할 줄 모르고 이용 하지 못한다”라고 강조(1972. 5. 8)
광주 새마을소득증대 촉진대회 치사에서 “새마을운동은 한국근대화의 행동철학이므로 문화인과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촉구한다”라고 강조(1972. 5. 18)
국도변 소도읍가꾸기운동 전개(1972. 5. 20)
제7대 대통령 취임 1주년, 지난 1년간 230회 출장으로 전국의 새마을현장을 시찰(1972. 7. 1)
전국시장회의 시 도시공한지 전개, 국도변 도읍가꾸기, 도시새마을운동 지침 시달(1972. 7. 22)
상공부에 농가공산품 개발위원회 설치(1972. 7. 31)
8.3 재정조치를 계기로 기업인도 새마을운동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당부(1972. 8. 12)
서울지구 수해복구작업을 시찰하고 수해복구에 새마을정신을 발휘 하도록 하라고 당부(1972. 8. 21)
충남 연기 벼베기대회 치사에서 “스스로 돕는 자는 정부도 돕고 남도 돕고 이웃도 돕고 하늘도 돕는다”라고 강조(1972. 9. 29)
국무회의에서 “새마을운동을 농한기에 적극적으로 추진하도록 하라”고 지시(1972. 10. 13)
대통령 특별선언을 통하여 “새마을운동을 국가시책의 최우선 과업으로 추진” 천명(1972. 10. 17)
충남 연기 벼베기대회에서 “수해를 이겨 낸 불굴의 정신으로 새마을 사업을 계속해야 한다”고 당부(1972. 10. 29)
국무회의에서 “전 국토를 연중 작업장화 하라”고 지시(1972. 11. 3)
모범 새마을에 농어촌의 소규모 공장을 건설할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1972. 11. 15)
국무회의에서 새마을운동으로 국력을 배양해 가자고 당부(1972. 12. 8)
농어촌지붕개량촉진법 개정(1972. 12. 26, 지붕개량업무를 농수산부에서 내무부로 이관)
연두기자회견 시 “새마을운동을 범국민운동으로 추진” 강조(1973. 1. 12)
새마을 총람 발간(1973. 1. 15)
내무부 새마을 직제 개정(1973. 1. 16, 지역개발담당관을 새마을담당관으로 개칭, 새마을계획분석관 신설, 도시농촌주택개량관을 폐지하고 지방국에 새마을지도과•도시지도과•주택지도과 신설)
상훈법에 새마을훈장을 추가(1973. 1. 25)
시도, 시군구에 새마을 부서 신설(1973. 2. 1)
전라북도 순시에서 “새마을사업은 겉치레보다 소득증대에 힘써야 한다”라고 강조(1973. 2. 7)
독농가연수원, 수원농민회관으로 이전(1973. 4. 8)
월간경제동향보고회의에서 새마을 유공자에게 훈장 수여(1973. 5. 7)
경기 화성군의 대우실업 새마을공장 시찰(1973. 5. 22)
독농가연수원을 새마을지도자연수원으로 명칭 변경(1973. 5. 31)
새마을지도자연수원 순시(1973. 9. 13)
공장새마을운동에 관한 종합추진방안 협의(1973. 9. 21)
전남 광주시에서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 개최(1973. 11. 22)
공장새마을운동중앙추진위원회 운영요강 작성(1973. 11. 30)
새마을지도자 육성지침 시달(1974. 1. 10)
충청북도 순시에서 “모든 사업은 사전에 경제성과 기술성의 문제를 치밀하게 검토하되 그 정신적 기조는 새마을운동에 두라”고 지시(1974. 2. 8)
공장새마을운동중앙추진회 및 실무위원회 구성(1974. 2. 20)
공장새마을운동 시범업체 1차 200개 공장 지정(1974. 3. 2)
상공부 새마을연수원 개원, 전국 새마을증산대회 수상자 39명을 접견하고 소득증대에 이바지해 달라고 당부(1974. 3. 18)
대구, 울산, 목포 도시새마을 평가보고회 최초 개최(1974. 4. 30)
도시녹화운동 전개(1974. 5. 2)
새마을운동론을 공무원 시험과목으로 설정(1974. 5. 4)
국무회의에서 “새마을사업은 도시민들이 적극 참여하는 방향으로 사업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라고 강조(1974. 5. 7)
아산 남양방조제 준공(1974. 5. 22, 착공 : 1971. 3)
국무회의에서 새마을사업은 환경을 꾸미기보다 생산에 역점을 두라고 지시(1974. 6. 7)
새마을지도자연수원 순시(1974. 7. 10, 장?차관도 새마을교육 받도록 지시)
장•차관 새마을교육(1974. 7. 22)
철도변가꾸기운동 전개(1974. 9. 8)
전국직장새마을지도자협의회 신설(1974. 11. 14)
청와대에서 새마을유공자 67명에게 직접 서훈(1974. 12. 17)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 개최(1974. 12. 18)
전국 138개 군에 새마을담당 부군수제 신설(1975. 1. 1)
내무부 새마을직제 개정(1975. 1. 1, 새마을계획분석관을 새마을기획과로 개칭하고 주택지도과를 폐지 새마을교육과를 신설)
제주도 축산개발연구소, 감귤냉동공장, 남제주군 남북면 신례리 새마을사업현장 시찰(1975. 1. 5)
농촌지역 상수도시설 5개년 계획 마련(1975. 1. 21, 절대농지 논의 80%까지 확대키로 결정)
대단위농업개발사업계획 발표(1975. 2. 1, 경주, 삽교천, 계화도 등)
시도단위 민간단체 새마을운동협의회 구성(1975. 3. 21~6. 30)
나의 조국 작사 작곡(1975. 5. 10)
새마을모자 제정(1975. 5. 14)
상공부 공장새마을운동 제2연수원 개원(1975. 7. 7, 수출산업공단)
월간경제동향보고회의 참석, 새마을운동의 확대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 새마을지도자에게 훈장 수여(1975. 7. 12)
국토가꾸기 기동순찰반 발대식(1975. 8. 24)
새마을 일제 총열 실시(1975. 11. 5~11. 20)
제1회 새마을운동 연구발표회(1975. 11. 27~28)
경북 대구시에서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 개최(1975. 12. 10)
직장단체 새마을운동 비교평가회(1975. 12. 26)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근로자 처우개선으로 생산성 향상, 물자절약, 수출상품의 품질향상, 공장새마을운동을 활발히 전개(1976. 1. 28)
도시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3대 질서확립운동 전개(1976. 2. 16)
새마을운동 특별기념우표 발행(1976. 4. 15, 총 5종 1,000만개)
수원새마을지도자연수원 순시(1976. 5. 11)
우수마을 특별지원사업 충열 실시(1976. 5. 22~6. 5)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저소득층 의료혜택, 수출업체 경쟁력 강화, 농어촌의 구조개선방안 등을 반영하라고 지시(1976. 6. 15)
새마을금고 육성지침 시달(1976. 6. 18)
공장새마을운동 추진요강 제정(1976. 7. 2)
수원새마을지도자연수원 순시(1976. 7. 6, 성공사례청취)
월간경제동향보고회의 참석, 주곡의 자급자족, 농수축산물의 증산운동 지시, 새마을지도자들과 밤의 가공처리, 한발대책, 농협의 유통구조개선 등에 대한 의견 교환(1976. 7. 12)
정부 여당 연석회의에서 공단근로자들 야간중학에 다닐 수 있도록 조치, 각 기업체의 후생시설 확충, 야간학급 및 산업체 부설학급에는 정부지원 등을 지시(1976. 7. 23)
월간경제동향보고회의에서 “새마을운동이 국민의 의식개혁뿐만 아니라 생산성 향상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강조(1976. 8. 25)
영산강유역농업개발 제1단계사업 준공식에 참여하여 “영농근대화로 식량증산의 가속화를 이루어야 한다‘라고 강조(1976. 10. 14)
시도별 공장새마을운동 비교평가회 개최(1976. 11. 3~5)
민간단체 새마을운동 중앙협의회 창립총회(1976. 11. 10)
충남 대전시에서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 개최(1976. 12. 10)
제주도 새마을부락 시찰(1977. 1. 1)
농수산부와 건설부 순시에서 농촌주택을 문화주택으로 전환, 어선의 대형화 및 동력화 추진을 지시(1977. 1. 21)
상공부 순시에서 모든 기업의 공장새마을운동 참여와 에너지 10% 절약운동을 강력히 추진하라고 지시(1977. 1. 22)
민간단체 새마을운동전진대회(1977. 2. 25)
근로자의 날을 맞이하여 노총간부들을 접견하고 공장새마을운동은 노동조합에서 적극 앞장 서 달라고 당부(1977. 3. 10)
우수새마을지도자 일본 시찰(1977. 3. 14~21)
제1회 공장새마을전진대회 개최(1977. 3. 20)
공장새마을추진본부 설치(1977. 3. 21)
영등포공업고등학교, 영등포여자상업고등학교, 대방여자중학교의 근로자 야간학교 수업상황 시찰(1977. 4. 19)
월간경제동향보고회에서 “공장새마을운동을 중소기업에 확대시키는 한편 신바람나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라고 강조(1977. 5. 10)
새마을기술봉사단 활동사례발표회(1977. 8. 26)
정부종합청사 5층에 새마을상황실 개실(1977. 9. 1)
도시새마을운동 비교평가회 개최 및 농촌불량주택 조사(1977. 9. 20)
제4차 중소기업 국제회의 서울대회 치사에서 “우리 민족의 오랜 전통인 상부상조의 정신을 되살려 오늘의 기업윤리 및 근로윤리로 정립시켜 가려는 것이 공장새마을운동이다”라고 강조(1977. 10. 11)
전국직장단체 대항 새마을합창경연대회 개최(1977. 10. 12)
전북 전주시에서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 개최(1977. 12. 9)
대구시에서 중소기업 공장새마을운동 촉진대회 개최(1977. 12. 13)
농촌주택 55만동 개량촉진대회 개최(1978. 1. 6)
영산강유역농업개발 2단계사업 착공(1978. 1. 20, 준공 : 1983년)
범국민 3대질서운동촉진대회 개최(1978. 1. 23)
상공부 순시에서 공장새마을운동을 통하여 국제경쟁력을 키우라고 지시(1978. 1. 26)
내무부 새마을담당관실에 농촌주택개량과 신설(1978. 3. 1)
농촌주택개량사업촉진대회 개최(1978. 3. 17)
공장새마을 주안연수원 개원(1978. 4. 25, 여성지도자 교육)
경기도 새마을운동 농촌주택 개량사업현장 시찰(1978. 5. 2)
1978 주택개량마을 입주식 거행(1978. 7. 4)
조선일보 기자와의 좌담회에서 새마을운동을 통하여 국민정신과 문화계발을 촉진해 간다는 신념을 밝힘(1978. 7. 6)
논산지구 농업개발사업 완료(1978. 7. 21)
3대질서운동 비교평가회 개최(1978. 9. 26)
대구시에서 전국중소기업 새마을지도자대회 개최(1978. 10. 13)
제1회 전국공장새마을운동 분임활동 경진대회 개최(1978. 11. 3)
공장새마을 부산연수원 개원(1978. 11. 6)
제1회 공장새마을운동 추진 종합평가대회(1978. 11. 20)
전남 광주시에서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 개최(1978. 12. 6)
새마을운동 연구논문집에 「새마을운동은 한국적 민주주의의 도장」 이라는 책자 휘호 씀(1978. 12. 8)
범국민 3대질서운동 총열 실시(1978. 12. 17~23)
농촌주택개량 총열(1979. 1. 10~14)
도시새마을운동 10 중요구심사업 설정(1979. 2. 21)
상공의 날 및 공장새마을전진대회 개최(1989. 3. 20)
월간경제동향보고회에서 서민생활의 안전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하고 새마을지도자 표창(1979. 4. 13)
자영마을 신설 운용(1979. 4. 18)
직장여성 소비절약결의대회 개최(1979. 7. 4)
공장새마을운동 총열(1979. 7. 1~25)
전국 137개군에 새마을과 설치(1979. 7. 16)
공장새마을운동 촉진결의대회 개최(1979. 8. 31)
새마을금고 중앙교육원 신축기공(1979. 9. 20)
삽교천 방조제 준공(1979. 10. 26, 착공 : 1977년)
전국직장새마을운동 비교평가대회 개최(1979. 11. 7)
미호천 1단계 사업 준공(1979. 11. 12)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 개최(1979. 12. 28, 시도별 개최)
새마을지도자연수원 설치법 공포(1979. 12. 28, 법률 제3171호)
일부 / 이하생략...


치산녹화

산림법 제정(1961. 12. 27)
국토녹화 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 공포(1963. 2. 8)
치산 녹화 7개년 계획(1965~1971) 성안(1965. 4. 1)
산림청 개청(1967. 1. 9)
수계별 산림복구종합계획(1967~1976) 확정
치산녹화사업 10개년 계획 확정 발표(1973. 3. 10)
영일지구 사방사업(1973~1977)
지리산, 가야산, 덕유산일대를 자연학습도장으로 개발 결정(1977. 1. 18)
자연보호에 대한 전 국민운동의 전개를 위해 민간단체를 조직하여 운영하라고 관계부서에 지시(1977. 10. 5)
육림의 날 선포(1977. 10. 7)
자연보호협의회 창립총회(1977. 10. 28)
자연보호 범국민궐기대회에 참석하여 자연을 보호하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는 길이라고 강조(1977. 11. 5)
서울 미아1동 자연보호회와 어머니회 회원들과 우이동 등산로에서 자연보호운동 전개(1978. 9. 23)
자연보호헌장 선포(1978. 10. 5)
청와대에서 자연보호 회의 주재(1978. 10. 13)
북한산 계곡에서 비서실 직원들과 자연보호운동 실시(1979. 10. 8)
제2차 치산녹화 10개년 계획 확정(1979년)
일부 / 이하생략...


자주국방


공군작전사령부(K-55) 창설(1961. 7. 1)
공군작전사 발족(1961. 9. 15)
해양경찰대 발족(1962. 5. 1)
공군 항공창 준공(1962. 5. 29)
제1이동외과병원(130명)과 태권도 교관단(10명) 파월 환송식(1964. 8. 24)
국무회의, 비전투요원 2,000명 파월 의결(1965. 1. 8)
주월한국군사원조단(비둘기부대) 결단(1965. 2. 5, 파월 : 1965. 2. 19)
방공포병대대(호크유도탄부대) 창설(1965. 3. 19)
초음속 F-5 제트 전투기 도입(1965. 4. 3)
주월한국군사령부 창설(1965. 9. 25, 서울 필동)
맹호부대/청룡부대/십자성부대 파월(1965. 10)
육군 1개 사단과 해병 1개 여단 창설 발표하고 국군 62만명으로 증강하겠다고 언명(1966. 5. 19)
한국군 장비현대화에 대하여 공동성명(1966. 6. 22)
백마부대 파월(1966. 9. 16)
해병 제5여단 창단(1966. 11. 23, 포항)
동해안 2개 지역 공군기지 건설(1967. 2. 26)
최대의 공군 광주기지 준공(1967. 5. 25)
치안국에 대간첩 사령부 설치(1967. 6. 21)
국방부 종합청사 신축(1967. 6. 23)
전투경찰대 발족(1967. 8. 26)
대간첩작전본부 발족(1968. 1. 22)
육군 기동타격대 창설(1968. 1. 27)
향토예비군 창설식(1968. 4. 1, 대전)
공군레이다방공망 준공(1968. 6. 13)
방위산업정비 전투태세완비 3개년 계획 확정(1968. 7. 5)
유엔군으로부터 작전권 대폭 이양 받았다고 발표(1968. 7. 8)
제3훈련비행단 창설(1968. 7. 23)
7개 시의 고교, 대학생에 군사훈련 실시 결정(1969. 1. 9)
제3사관학교 개교(1969. 3. 18)
공군 F-4 팬텀기전투비행부대 창설(1969. 9. 23)
청소년에 1일 승공교육 실시키로 결정(1970. 1. 15)
국방과학연구소 설립(1970. 8. 6)
한국군 현대화와 주한 미군 감축에 합의(1971. 2. 6)
155마일 전선방위 국군이 전담키로 했다고 발표(1971. 2. 7)
병기공장(M-16 소총) 건설에 관한 한미간 계약 체결(1971. 3. 31, 착공 : 1971. 4, 준공 : 1972)
한미합동 제1군단 창설(1971. 7. 3)
박격포 고사포 등 중화기의 국내생산계획 추진 발표(1971. 11. 14)
전국에서 첫 민방공훈련 실시(1971. 12. 10)
국산병기 시제품(카빈소총, 기관총, 60밀리 박격포, 3.5인치 로켓발사기) 전시(1971. 12. 16)
국방과학연구소 60•81밀리 박격포 개발 착수(1972. 4. 30)
경인지구 예비군 고사포부대 배치 완료(1972. 6. 30)
4.2인치 박격포 및 105밀리 곡사포 개발 착수(1972. 8. 1)
국방과학연구소 지뢰탐지기 개발 착수(1973. 7. 10
M16 소총 양산 체제로 전환(1974. 2. 1)
국방과학연구소 106밀리 대전차포탄 개발(1974. 2. 10)
M48전차를 M48A5 전차로 개조사업 착수(1974. 6. 20)
국방과학연구소 105밀리 곡사포 연막탄 개발(1975. 4. 2)
전투상비군부대 창설(1975. 6. 30)
국방과학연구소 155밀리 곡사포탄 개발(1975. 7. 2)
방위세법 공포(1975. 7. 16)
민방위기본법 제정(1975. 7. 25, 민방위대 발대식 : 1975. 9. 22)
함대함미사일 시험 발사 성공(1975. 11. 7)
국방과학연구소 전신•전화단말기 KAN/TCC-29 개발 착수(1976. 1. 15)
국군현대화 5개년 계획 77년에 완료된다고 발표(1976. 1. 21)
한국군수산업진흥회 발족(1976. 3. 5, 현 한국방위산업진흥회)
M48A1 전차를 M48A5, M48A3 전차로 개조하는 사업 착수(1976. 5. 20, 생산 : 1978. 4. 6, 자유진영에서 9번째로 전차생산국)
국방과학연구소 한국형 기관단총 개발 착수(1976. 10. 2)
대전 기계창 준공(1976. 12. 2)
국방부 순시에서 핵무기와 전투기를 제외한 모든 무기를 국산화하고 있음을 천명(1977. 1. 28)
미군 철수에 대해 선 보완 후 철군 강조(1977. 5. 25)
국방과학연구소 한국형 소총 XB-7형 개발 착수(1977. 6. 1)
첫 방위산업진흥확대회의 개최(1977. 6. 17)
북한의 200해리 경제수역 및 해상 군사경계선 인정하지 않는다고 성명(1977. 8. 1)
국방과학연구소 8인치 곡사포 고폭탄 개발(1977. 8. 30)
군수산업 육성(1978. 1. 18, 헬기, 대포, 탄약, 장갑차, 함정, 레이다, 미사일을 생산하고 있으며 항공기산업과 특수전차개발에 착수)
국산장거리 지대지유도탄, 중거리유도탄, 다연발로케트 시험 발사에 성공(1978. 9. 26, 세계 7번째)
한미연합사령부 발족(1978. 11. 7)
국방과학연구소 대형 함정용 전자장비(KDJ-25) 개발 착수(1979. 1. 30)
일부 / 이하생략...


외교

일본 이케다 수상과 회담(1차 회담 : 1961. 11. 11, 한일 관계 전반에 대해 토의, 2차 회담 : 1961. 11. 12, 재산청구권 및 평화선문제 토의)
방미 케네디 대통령 공동성명 발표(1961. 11. 14, 케네디 대통령과 2차 회담 : 1961. 11. 15)
방미 존슨 대통령과 정상회담(1963. 11. 25, 케네디 대통령 장례식 참석)
국제의회연맹(IPU) 가입(1964. 8. 19)
서독 방문(1964. 12. 6~15, 12. 8 뤼브게 대통령, 12. 9 에르하르트 수상과 회담)
서독과 차관협정 조인(1964.12.7, 재정 1,350만달러 상업 2,625만달러)
이동원 외무장관, 시이나 일본 외상과 한일기본조약에 가조인(1965. 2. 20)
라만 말레이시아 수상 내한(1965. 4. 28)
방미 존슨 대통령과 정상회담(1965. 5. 17~19, 월남지원 등)
한일협정 정식 조인(1965. 6. 22, 동경, 국교정상화)
월남 쿠엔카오키 수상 내한(1965. 11. 8)
한일협정 비준서 교환(1965. 12. 18, 서울)
험프리 미 부통령 내한(1966. 1. 1, 경제원조 및 월남지원문제 협의)
동남아순방(1966.2.7~18, 말레이시아, 태국, 자유중국)
공산권과의 교류 확대 추진(1966. 4. 22)
제1차 아시아 태평양지구 각료회의 개최(1966. 6. 14~16, 서울, 10개국)
한미행정협정조인, 재판관할권을 제한하고 광범위한 외교 특권 허용(1966. 7. 9)
월남참전 7개국 정상회담(1966. 10. 24, 한국, 미국,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월남)
미국 존슨 대통령 내한(1966. 10. 31, 정상회담 : 1966. 11. 2)
아시아민족반공연맹 제12차 총회 개막(1966. 11. 3, 서울)
국제통신위성기구에 56번째로 가입(1967. 2. 24)
뤼브게 서독 대통령 내한(1967. 3. 2~3. 6)
티놈 태국 수상 내한(1967. 4. 2~4. 3)
홀트 호주 수상 내한(1967. 4. 6)
한, 미, 일, 자유중국 4개국 수뇌회담(1967. 7. 2, 서울)
박 대통령 호주 캔버라에서 미 존슨 대통령과 회담(1967. 12. 22)
미 대통령 특사 벤스 내한(1968. 2. 11, 회담 : 1968. 2. 12)
미 존슨대통령과 정상회담(1968. 4. 17~4. 18, 호놀롤루, 한미안보문제)
셀라시 이디오피아 황제 내한(1968. 5. 18~5. 21)
대양주 순방 외교(1968. 9. 15~9. 25)
홀리오크 뉴질랜드 수상과 정상회담(1968. 10. 23)
말레이시아 국왕 내한(1969. 4. 29~5. 3)
티우 월남 대통령 내한(1969. 5. 27~30)
닉슨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1차 : 1969. 8. 21, 2차 : 1969. 8. 22)
니제르 하마니 대통령과 정상회담(1969. 10. 30)
비적성 공산권 국가와의 교역을 허용하도록 무역거래법 개정 결정(1970. 5. 28)
중동분쟁에 대한 입장으로 유엔헌장정신과 유엔관계 제의결에 입각한 분쟁의 평화적 해결 천명(1970. 8. 3)
에그뉴 미국 부통령 내한(1970. 8. 23, 회담 : 1970. 8. 24)
한일대륙붕 공동개발에 완전 합의(1973. 7. 4)
키신저 미 국무장관과 한미간 협조문제 논의(1973. 11. 16)
이스라엘 점령지 철수 등 4개항의 친 아랍성명 발표(1973. 12. 15)
포드 대통령 내한(1974. 11. 22~11. 23, 한미방위 확인)
가봉 봉고 대통령 내한(1975. 7. 5~7. 8)
제3세계에 대한 외교활동 강화(1976. 1. 23)
동구권과의 관계 개선 결정(1976. 2. 6)
멀둔 뉴질랜드 수상 내한(1976. 4. 18~4. 22)
아시아의원연맹 총회 개최(1977. 11. 8, 서울)
상고르 세네갈 대통령 내한(1979. 4. 22~4. 25)
미국 카터 대통령 내한(1979. 6. 29~7. 1, 철군문제협의)
한, 미, 북한 회의 제의(1979. 7. 1)
이광요 싱가포르 수상 내한(1979. 10. 16)
수교 국가 117개국으로 증가(1979. 11. 30 외무부 발표)
일부 / 이하생략...


문화제보호와 민족문화 창달

문교부 외국으로 문화재관리국 설치(1961. 10. 2)
문화재보호법 제정 공포(1962. 1. 10)
남대문 중수 공사 준공(1963. 5. 14)
동대문 개축 준공(1963. 9. 5)
문화재보수 5개년 계획 수립(1963. 9. 10)
팔의사 창의탑 준공(1963. 11. 5)
해인사 팔만대장경 판고 신축 및 보수(1963~1977)
경주 석굴암 복원공사 준공(1964. 7. 1, 보고서 작성 : 1961. 7. 17)
무형문화재, 기능 및 예능보유자 인정 전승사업 시작(1964년)
석가탑 사리함에서 세계 최고 목판 인쇄 다라니경문 발견(1966. 10. 14)
국립중앙박물관 착공(1966. 11. 16, 준공 : 1972. 8. 25)
밀양 영남루 보수(1966. 11. 30)
서울 문묘 보수(1966. 11. 30)
부여 정림사지 정비(1966. 12. 6)
법주사 대웅전 보수(1966. 12. 18)
종합민족문화센터 기공(1967. 4. 25)
안중근의사 동상 이안(1967. 4. 26)
국립묘지정화사업 현충탑 건립(1967. 10. 1)
세종로에 이충무공 동상 제막식(1968. 4. 27)
소수서원 해체 복원(1968. 12. 2)
광화문 복원공사 준공식(1968. 12. 11)
현충사 성역화 중건 준공(1969. 4. 28, 착공 : 1966년, 조경공사 : 1972~1974년)
범어사 대웅전 보수(1969. 8. 19)
월정사 대웅전 준공식(1969. 10. 14)
유관순 유적지 착공(1969. 10, 준공 : 1973. 3)
금산사 대적광릉 해체 복원(1970. 2. 29)
행주산성 보수 준공(1970. 11. 10, 착공 : 1969년, 행주대첩비 건립 : 1963년)
세종대왕기념관 기공(1970. 11. 19, 준공 : 1973. 10)
도산서원 보수 준공(1970. 12. 8, 착공 : 1969. 10. 6)
화엄사 대웅전 보수(1970. 12. 25)
남원 광한루 보수(1970. 12. 31)
진주성 보수 준공(1970년, 착공 : 1969년)
남한산성 보수정비사업 착공(1970년)
금산 칠백의총 정화사업 준공(1차 : 1971. 4. 13, 2차 : 1976. 9. 20)
무령왕릉 발굴(1971. 7. 8)
속리산 법주사 사천왕문 복원(1971. 8. 30)
국립부여박물관 부소산 신관 개관(1971. 9. 1, 기공 : 1965. 9. 14)
경주고도개발 10개년 계획 확정(1972. 3. 10)
육산리 고분군 정화(1972. 11. 4)
경주 155호 고분(천마총) 발굴 착수(1973. 4. 6)
불국사 복원 준공(1973. 7. 5, 착공 : 1970. 11. 3)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개원식(1973. 10. 17, 현판식 : 1974. 10. 11)
문예중흥 5개년 계획 발표(1973. 10. 19)
해미 읍성 복원정비(1973~1977)
낙성대 준공(1974. 6. 10, 착공 : 1973. 11)
금산사 미륵전 해체 복원(1974. 12. 10)
문경 관문 해체 복원(1974년, 제1관문 성벽 보수 준공 : 1975년, 제2관문 문루복원 및 성곽보수 준공 : 1975년, 제4관문 홍예성곽보수 준공 : 1976년, 제3관문 문루복원 및 제1관문 단청 준공 : 1977년)
황남대총(98호 고분) 발굴(1974~1975년)
서울 성곽 복원?보수계획(1975~1978년)
중앙민속박물관 개관(1975. 4. 11)
수원 성곽 복원 착공(1975. 5. 30)
경주박물관 개관(1975. 7. 2)
광희문 복원공사 준공(1975년)
경주 용담정 천도교 유적지 정비(1975년)
옥산서원 보수작업(1976. 1. 20)
한국 미술 5천년전(1976. 2. 23~7. 25, 일본 도쿄, 교토, 나라)
밀양 표충사 정화사업(1976. 4. 10)
강릉 오죽헌 정화사업 준공(1976. 5. 7, 착공 : 1975. 10)
유적지 및 전적지개발 위한 특별법 제정(1976. 6. 24)
한산도 충무공 유적 정화사업 준공식(1976. 10. 20, 착공 : 1975. 1)
신안 해저문화재 발굴(1976년부터)
예산 추사고택 보수정비 준공(1977. 6. 27, 기공 : 1976. 7. 4)
경주 통일전 준공(1977. 7. 30, 착공 : 1976. 4. 22)
여주 영릉 보수정비 사업 준공(1977. 10. 9)
부석사 정화사업 기공(1977. 10, 준공 : 1979년)
강화전적지 정화사업 준공(1977. 10. 28, 착공 : 1976. 8)
고창 읍성 복원정비(1977. 12. 30, 착공 : 1975년)
내장사 정화사업 준공(1977년, 착공 : 1974년)
안동 하회마을 영모각 보수 준공(1977년, 유성룡장군 유물보관)
홍지문 준공(1977년)
월정사 복원 공사 착공(1978. 5. 3)
제주 황파두리 항몽유적지 정비 준공(1978. 6. 2)
금오산 채미정 정화사업 착공(1978. 6. 25)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원(1978. 6. 30)
해남 표충사 보수사업 착공(1978. 8. 15)
김천 직지사 정화사업 준공(1978. 10. 30, 착공 : 1977년)
곽재우장군 유적지 조성 정화사업 착공(1978. 11. 22)
충주 충렬사 정화사업 준공(1978. 11. 23)
국립광주박물관 개관(1978. 11. 28, 착공 : 1977년)
광산 고경명장군 포충사 보수사업 준공(1978년)
부산 충렬사 보수 준공(1978년, 착공 : 1976년)
예산 윤봉길의사 충의사 보수 정화사업 준공(1978년)
경주 보문관광단지 개장(1979. 4. 6)
한국 미술 5천년전 개막(1979. 5. 1, 미국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보스턴, 클리블랜드, 뉴욕, 캔자스시티, 위싱턴, 시애틀)
남원 만인의총 정화사업 준공(1979. 10. 5)
광주 충장사 김덕령장군 유적지 정화사업 준공(1979년, 기공 : 1974. 4. 4)
충주 임경업장군 유적지 정화사업 준공(1979년)
춘천 유인석 의병장 유적 정비보수 준공(1979년)
일부 / 이하생략...


남북관계

국토통일원 개원(1969. 3. 1)
8. 15 평화통일정책구상 선언(1970. 8. 15)
한국적십자 남북가족찾기회담 제안(1971. 8. 12)
남북 첫 전화 개통(1971. 9. 22)
남북적십자회담 첫 실무회의 개최(1972. 2. 21)
남북공동성명발표(1972. 7. 4)
남북적십자 첫 본 회담(1972. 7. 30, 평양)
남북적십자회담용 직통 전화 20회선 개통(1972. 8. 17)
남북적십자 2차 본 회담(1972. 9. 13, 서울)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1차 회의(1972. 10. 12, 판문점)
남북적십자 3차 본 회담(1972. 10. 24, 평양)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2차 회의(1972. 11. 2, 평양)
남북적십자 4차 본 회담(1972. 11. 22, 대한적십자 회담사무국 회의실)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3차 회의(1972. 11. 30, 서울)
남북조절위원장 회의(1972. 12. 12)
서울-평양 직통전화 개통(1973년)
남북조절위원회 제2차 회의 개최(1973. 3. 14, 평양)
남북적십자 5차 본 회담(1973. 3. 21, 평양)
남북적십자 6차 본 회담(1973. 5. 8, 서울)
남북조절위원회 제3차 회의 개최(1973. 6. 12, 서울)
평화통일 외교정책 7개항 발표(1973. 6. 23)
남북적십자 7차 본 회담(1973. 7. 11, 평양)
연두회견에서 남북한 불가침 협정 체결 제의(1974. 1. 18)
남북한 이산가족재결합 촉구(1974. 6. 15)
평화통일 3대 기본원칙 발표(1974. 8. 15)
남북문화교류 및 공동학술연구 제의(1976. 4. 12)
북한에 식량 원조 제의 및 남북불가침협정 체결되면 주한미군 철수 반대하지 않는다고 언명(1977. 1. 12)
남북한 민간경제협력기구 구성 제의(1978. 6. 23)
남북한 당국 무조건 대화 제의(1979.

 

☆'박정희 대통령' 영상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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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경부고속도로 천안-대전구간 개통
       1969년

282.과학기술연구소 준공 1969년

281.가정의레준칙 선포 1969년

 

280.동진강 수로공사와 농지조성 간척사업
       1969년

279.개헌안 국민투표 1969년
278.
대통령 방미 1969년

277.대통령 방미 1969년

276,한.미 정상회담 1969년

275.광복절 14주년 기념식
       1969년

274.권농일 기념 모내기  1969년

273.육영수여사 영등포 양말공장 방문
       1969년

272.어린이회관 준공식 1969년

271.말레이시아 국왕 내한 1969년

 

270.현충사 충무공의 충혼시 낭독
      1969년

269.육영수여사 춘천 여성회관 준공식  
       1969년

268.美 '아이젠하워' 가다 1969년

267.화곡동 식수 1969년
      육영수여사 광화문 녹지대 꽃묘종 심기

266. 육사 제 25기 공사 17기 졸업식 1969년

265.벨기에.우루과이 대사
       신임장 제정
1969년

264.육영수여사 죽세품 바자회 1969년

263.알뜰한 주부상 시상자들
      청와대 육영수여사 예방
1969년

262.한.미 굳은 유대 1969년

261.육영수여사 사병들 국수 대접 1969년

 

260.대통령 동정 1969년

259.기자회견 (시정방침) 1969년
258.(
육성) 육영수여사 외국어대 초청 강연
   (1968년)

257.국민교육헌장 1968년 12월 5일

256.경인고속도로 개통 - 1968년

255.포항종합제철 준공 1968년

254.마침내 닻을 올리다.(1968 년)

253.여의도 윤중제 축조공사 완공기념식
       1968년

252.대통령내외분,근혜양 호주 방문 (2)
      1968년

251.대통령내외분,근혜양 호주 방문
      1968년

 

250.현충사 성역화 사업 1968년

249.진해 구축함 명명식 참석 1968년

248.일하는 대통령 박정희 1968년

247.권농일 모심기 하는 대통령1968년

246.현충일 동작동 국립묘지 참배 1968년

245.쌍룡시멘트 공장 건설현장 시찰1968년

244.에디오피아 세라세 황제 내한 1968년

243.장충공원 사명대사 동상 제막식1968년

242.덕수궁에 세종대왕 좌상 제막식 1968년

241.전라북도 고창
      향토예비군 시범훈련 시찰 1968년

 

240.세종로에 충무공 이순신장군 동상제막식
       박정희 대통령 헌납 1968년

239.주월 한국군 채명신사령관
       월남전 상황보고 1968

238.제 23회 식목일.식수 1968년

237.초도순시.전라북도 제주도
      1968년

236.향토방위의 노래 1968년

235.충남 대전 향토예비군 창설식 유시
       1968년

234.초도순시 전라남도,경상도 1968년

233.전국지방장관회의
       1968년

232. 제 2회 세금의 날 1968년 
      유한양행 유일한씨에게 동탑산업훈장 수여

231.'싸우며 건설하자' 향토예비군 창설 1968년

 

230.49회 삼일절 경축사 1968년

229.초도순시,경기,충청남도 1968년

228.美 존슨 대통령특사
      사이런스 밴스 내한 1968 년

227.적십자 총재에게 적십자회비 전달
     1968 년

226.경부고속도로 기공식(서울-수원)
      1968 년

225.북괴 만행을 규탄한다 1968 년

224.무장공비 서울침투 1968년

223.서울로 침투한 무장간첩
      사살및 북한의 만행 1968.1.21

222.기자회견 1968 년

221.지방장관회의 1968 년

 

220.대통령 동정 1968년

219.신년하례 1968년

218.1968 새해아침

217.제철소의 초석을 세우다.(1967 년)

216.물가 경제 동향과 월남파병부대 소식外 
      1967년

215.밝아오는 새농촌 - 홀치기 1967 년

214.구로수출전용단지 준공과 제3공업단지 기공
       1967년

213.제 3 비료공장 준공과 농.공.중소기업 정책 
       1967년

212.대구 제3공업단지 조성 외 1967년

211.월남 기자및 언론인 내한,1967년


210.서울시청앞 지하도 개통 1967 년

209.호주방문 1967 년

208.호주 홀트수상 장례식 참석차 출국 1967 년

207.태권왕 '최영의'귀국 1967 년

206.청와대 여당 연석회의 1967 년

205.서울 상가아파트 준공식-1967년

204.육영수여사 제 5회 전국 여성대회 1967년

203.의암댕 건설현장 시찰 1967 년

202.구봉광산 양창선씨 16일만에 극적구조
       1967 년

201.양지회 자선파티 -
      육영수 여사 1967 년

 

200.제 7회 전국상품전시회-덕수궁 시찰
     1967 년

199.제 6대 일하는 대통령 박정희 취임
      1967 년

198.제 6대 박정희 대통령 취임 1967 년

197.중동.사우디아라비아 대사 
     신임장 제정 1967 년

196.전진식 모내기 1967 년

195,경북칠곡 시찰 1967 년

194.육영수여사 세계 여자 농구선수권대회
      자랑스런 한국의 딸 준우승
      박신자양에게 꽃다발 선사 1967 년
 

193.재선의 기쁨을 고향에서
      (육영수여사.박근혜.근영.지만.)1967 년

192.충무공 탄신 422주년 현충사 건립식 1967 년

191.박정희 대통령 기록 2 집

 

190.제 6대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 1967년

189.제 6대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재선 1967 년

188.섬 어린이 서울구경 1967년
      진도어린이 박정희 대통령께 진도개 선물

187.한표찾아 팔도강산 1967 년

186. 호주 홀트수상 내한 1967 년

185.제 6대 대통령후보 기호결정
      박정희 후보 기호 6번 1967 년

184.뤼브케독일대통령방한外(1967년)

183.뤼브케독일대통령방한 2 1967 년

182.뤼브케독일대통령방한 1967 년

181.민주공화당 전당대회 김종필 당의장 
     박정희 총재 차기 대통령 후보 추대1967년

 

180.전라남,북 도청 방문 1967년

179.경남,경북,충남도청 방문 1967 년

178연두교서 1967 년

177.경제기획원 초도순시1967 년

176.대통령 동정- 1967 년

175.신년사 - 1967 년

174.청와대 개방 - 1966 년

173.대한뉴스 600호 기념휘호 1966 년 12 월

172.동아일보사장 표창 外 1966 년 09 월

171.1966년 제18주년 국군의 날 행사

170.존슨美 대통령내외분 방문外

169. 제 3공화국 수립 3주년 1966년

168. 육영수여사 일선장병 위문 1966년

167. 박정희 대통령 취임 3주년 기념식 -
       기자회견 1966년

166.육영수여사 대전 부녀회관 기공사1966년

165. 아프리카 레소토왕국 조나탄 수상 내한
        1966년

164.한영전기 기계공장 시찰 1966년

163.진주 남강댐 공사현장 시찰 1966년

162.경북 예천-영주간 경북선 개통 1966년

161.월남 지원국 정상회담 1966년

 

160.필리핀 마닐라 월남 지원국 정상회담 -
       박정희 대통령 향발 1966년

159.제 47회 전국체육대회 개회 - 1966년

158.한산대첩 기념제 참석
       1966년

157.흑산도 어린이 청와대 방문 학용품 선물,
      육영수여사 아동문고 선사 1966년

156.강원도 삼척지구 시찰 1966년

155.백마부대 시찰1966년

154.새서울 도시계획도 전시 1966년

153.캐나다 대사 허버트 모란 신임장 제정
     1966년

152. 주월 채명신 사령관 귀국 신고
      1966년

151.장창선 선수 금의환향 - 격려1966년

 

150.보리 혼식 장려 - 엄앵란 1966년

149.춘천에서 지방장관 회의 1966년

148.6.25 잿더미에서 오늘의 부강을
      1966년

147.아시아,태평양 지역 각료회담 -
      박정희 대통령 치사 1966년

146.팔당 수력발전소 기공 -
       발파스위치 누름 1966년

145.故 장 면 박사 국민장 1966년

144.강원도 산간
      개간 농지에 콩 파종 1966년

143.인천 시찰 1966년

142.육영수여사 사랑의 열매 가두 모금운동
      1966년

141.대구 시찰 1966년

 

140.혁명정부의 지난 5년 1966년

139.재직했던 문경초등학교 방문
     1966년

138.5.16 다섯돌 기념식 1966년

137.충무공 탄신 421주년 기념식 분향
     1966년

136.한국 케이블공장 준공식 시찰 1966년

135.제주도 시찰 1966년

134.호남지역 시찰 1966년

133.강원도 시찰 1966년

132.前 필리핀 대통령 마카파칼 박사
      박정희 대통령 예방1966년

131.경기 이천 야산 개간 상황 시찰
      1966년

 

130.아르헨티나 외상 오르티스 에게
     1등 수교훈장 달아줌 1966년

129.일본대사 신임장 제정 1966년

128.지방장관회의 - 춘천 1966년

127.동남아 순방후 귀국 1966년

126.중화민국 방문1966년

125.동남아 순방 (태국) 1966년

124.동남아 순방 (말레이시아) 1966년

123.중앙관서 초도순시 1966년

122.대통령 동정 2 1966년

121.대통령 동정 1 1966년

 

120.병오년은 밝아오다 1966년

119.섬진강 다목적댐 준공식 1965년

118.제 3차 민주공화당 전당대회 -
      총재 박정희 대통령 당의장 김종필 1965년

117.경춘국도 단장식 1965년

116.대통령 주재 무역확대회의 1965년

115.섬 어린이 서울구경 -
      육영수여사 선물 증정 1965년

114.특별담화 발표
       (학생데모에 관하여)1965년

113.기자회견 (제주 관광호텔)1965년

112.이승만 박사 장례식1965년

111.이승만 박사 서거 1965년

 

110.부산 조선공사 시찰 1965년

109.충남 비인 지구,
      경기 고양군 시찰 벼베기 참석 1965년

108.성묘. 대통령,근혜.근영.지만군 참석 1965년

107,특별 담화 발표 1965년

106,삼남 수해지구 시찰 1965년

105.농촌시찰 1965년

104.미국방문 2 1965년

103.미국방문 1 1965년

102,나주 직업학교 방문 1965년

101,"올해는 일하는해" 지방시찰 
      1965년

 

100.제 2 한강교 개통 1965년

99.연두교서 1965년

98.대통령 동정 2 1965년

97.대통령 동정 1 1965년

96.기자회견 1965년

95,독일 방문 1964년

94.양지회,육영수여사 전남강진군수에게
    금일봉 전달 1965 년

93.양지회,불우여성돕기 자선 음악회 -
     육영수여사1965 년

92.육영수여사 제 2회 전국여성대회 개최 
     1964년

91.제 19회 광복절-경축사 1964년

 

90.전국 대학 총 학장 예방 1964년

89.신임 필리핀 대사 신임장 제정
     1964년

88.시국수습 교서 1964년

87.송충이를 잡자. 1964년

86.故 맥아더 장군 추모식 -
     박정희 대통령 추도사 1964년

85.학생 대표와 면담 1964년

84.민정시찰 - 경북성주 1964년

83.45회 3.1절 -경축사 1964년

82.초대 호주대사 알렌피터,
     신임장 제정 1964년

81.연두교서 1964년

 

80.대통령 동정 1964년

79.1964년은 밝아오다.

78.제 5대 박정희 대통령 취임 -
     제 3 공화국 출범 1963년 12월 17일

 

 

 

 

77.美 존 F 케네디 대통령 서거 1963년 11월22일

76.美 존 F 케네디 대통령 서거
  박정희 의장 장례식 참석차 출국 1963년 11월23일

75.10.15 대통령선거-박정희 후보 당선 1963년

74.박정희 의장 예편 1963년

73.박정희 의장 공화당 총재로 선출 -
     대통령후보 수락 연설 1963년

72.5.16 2주년 박정희 의장 기념사 1963년

71.박정희 의장 시국수습을 위한
     9개 방안 제시 1963년

 

70.박정희 의장 시정방침 연설 1963년

69.박정희 의장 시정방침 연설 1963년

68.새 헌법 공포-대통령 권한 대행
     박정희 의장 서명 1962년

67.박정희 의장 기자회견
    (민정 이양에 관한 일정 발표) 1962년

66.말레이시아 부수상 내한 1962년

65.최초의 국민투표 (헌법 개정안)
    박정희 의장 내외분 투표참여

 

 

                                      긍정의 힘



    1975년 여름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이 현대건설의 정 주영 회장을 청와대로 급히 불렀다.

    “달러를 벌어들일 좋은 기회가 왔는데 일을 못하겠다는 작자들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중동에 다녀오십시오. 만약 정 사장도 안 된다고 하면 나도 포기(抛棄)

    하지 요.” 

     정 회장이 물었다.

    “무슨 얘기입니까?”

    1973년도 석유파동으로 지금 중동국가들은 달러를 주체하지 못 하는데

    그 돈으로 여러 가지 사회 인프라를 건설하고 싶은데, 너무 더운 나라라 선뜻 일하러

    가는 나라가 없는 모양입니다. 우리나라에 일할 의사를 타진해 왔습니다. 관리들을

    보냈더니, 2주 만에 돌아와서 하는 얘기가 너무 더워서 낮에는 일을 할 수 없고,

    건설공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이 없어 공사를 할 수 없는 나라라는 겁니다.”

    “그래요, 오늘 당장 떠나겠습니다.”

    정 주영 회장은 5일 만에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박 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하늘이  우리나라를 돕는 것 같습니다.”

    박 대통령이 대꾸했다.

    “무슨 얘기요?”

    “중동은 이 세상에서 건설공사 하기에 제일 좋은 지역입니다.”

    “뭐요!”

    “1년 12달 비가 오지 않으니 1년 내내 공사를 할 수 있고요.”

    “또 뭐요?”

    “건설에 필요한 모래, 자갈이 현장에 있으니 자재 조달이 쉽고요”

    “물은?”

    “그거야 어디서 실어오면 되고요.”

    “50도나 되는 더위는?”

    ”천막을 치고 낮에는 자고 밤에 일하면 되고요.“

    박 대통령은 부자를 눌러 비서실장을 불렀다.

    “임자, 현대건설이 중동에 나가는 데 정부가 지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도와줘!“

    정 회장 말대로 한국 사람들은 낮에는 자고,

    밤에는 횃불을 들고 일을 했다. 세계가 놀랐다. 달러가 부족했던 그 시절,

    30만 명의 일꾼들이 중동으로 몰려나갔고 보잉 747 특별기편으로 달러를 싣고 들어

    왔다. 사막의 횃불은 긍정의 횃불이다. 긍정(肯定)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긍정은 천하를 얻고, 부정은 깡통을 차게 된다.

 

 

 


세계의 박정희 평가

 

 


세계의 박정희 평가



박정희는 조국근대화에 확고한 철학과 원대한 비전을 바탕으로 시의적절한 제도적 개혁을 단행했다. 매우 창의적이며 능률적이었다.
- 카터 에커트/하버드대학교수


"아시아에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위대한 세 지도자로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 중국의 덩 샤오핑, 한국의 박정희를 꼽고 싶다" "오직 일에만 집중하고 평가는 훗날의 역사에 맡겼던 지도자"
- 리콴유/싱가포르 수상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던 한국이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을 시작으로 불과 20년 만에 세계적인 무역국가가 되었음을 경이롭게 본다.
- 폴 케네디/예일대학 교수


박정희의 역사적 큰공헌은 그의 뛰어난 지도력하에 한국을 저개발의 농업국가에서 고도로 성장한 공업국가로 변모시킨 것이다.
- 앰스덴/MIT정치경제학 교수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의 목표는 자립경제력을 갖춘 현대국가의 건설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했다.
- 맨스로프/러시아 안보연구소 교수


중국의 덩 샤오핑 등은 세계 유례없는 한국의 연 10% 급성장, 경제부상에 놀라며 박정희식 경제개발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 마홍/중화인민공화국정책과학연구회장


"박정희 대통령은 매우 강한 지도자였으며 대기업을 일으켜 국부(國部)를 증진시킨 훌륭한 지도자이다"
- 말레이시아 전 총리 마하티르 -


중국의 덩 샤오핑의 개혁은 박정희 모델 모방 - 美, RAND 연구소


"매 회의마다 우리 농촌과 국토에 가졌던 뜨거운 애정, 빈곤했던 우리 역사에 대한 한에 가까운 처절한 심정, 그리고 빈곤을 극복하여 경제대국을 이룩하려는 치열한 집념에 숙연해지곤 했다"
- 고건


요즘은 박정희 대통령이 좋게 인식되는 것 같은데, 옛날에는 유신이니 해서 비판이 많았지만 초기 새마을 운동을 한 덕택에 경제 발전의 기초가 되었던 점은 훌륭한 점입니다. 나도 영화를 통해 서울을 보았는데, 서울은 일본의 도쿄보다 훌륭한 도시로 조선이 자랑할 만한 세계의 도시입니다. 서울에 가면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도 참배하고 싶다. 그것이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 김정일, 1999년, 현대 고 정주영 회장과의 대화중


"많은 몽골인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리더십과 개발모델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나 또한 그렇다. 한국은 박 전 대통령의 지도 아래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개발의 금자탑을 쌓아올렸다"
- 잔라빈 차츠랄트, 前 몽골 총리


"대통령 박정희(1961∼79)는 강력한 손으로 남한을 농업 국가에서 산업 능력을 가진 국가로 형성했다."
- 독일, 국정 교과서


"신화를 만든 한국경제의 건축가!" - 美, 뉴욕타임스 -


"어렵던 시절, 한국을 이끌어 고도로 공업화된 민주국가로 변화시킨 역사적 역할을 담당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후임 대통령들이 본보기로 삼을 만한 유산을 남긴 한국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지도자들중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 -


"박정희 없었다면 오늘날의 한국도 없다. 박정희는 헌신적이었고, 개인적으로 착복하지 않았으며, 열심히 일했다. 그는 국가에 일신을 바친 리더였다"
- 2006.11.11 에즈라 보겔, 美 하버드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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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 건 전 총리, "푸른산 볼 때면  朴正熙 박 정희가 생각난다"

어떻게 해서든 가난을 극복하려는 무서운 집념이 절절하게
 다가오던 것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1974. 4. 5  식목일 나무심기가 끝난후

     관계자 일행과 식사를 하며

  푸른 산을 볼 때면 나는 朴正熙 대통령이 생각난다.
 朴대통령과의 첫 만남이 산에 나무 심는 일을 매개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한참 일에 열정을 불태우던 젊은 부이사관 시절,
 새마을 官 담당관으로 있던 나에게

東大本山 동대 본산에  사방사업을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東大本山 동대본산은 월성군과 울주군  사이에 있는

 큰 산이다 .

도꾜에서 비행기를 타고 우리나라 상공으로

 들어오다 보면 이 산이 제일 먼저 눈에 잡힌다.
 지금이야 녹화가 잘되어 푸르르지만 당시에는 헐벗은

 민둥산이었다.

이 민둥산이 울창한 일본의 산을 내려다  보며 날아온 방문객에게 처음 비춰지는 한국의 산이라는  사실을,

朴대통령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방사업의

  설계자 겸 현장감독이 되어야 했다.
 현지에 가보니 동대본산은 정말 악산이었다.
 몇 년간 사방사업을 했지만 거듭 실패했다고 한다.
 비가 오면 흙이 곤죽이 되어 무너져 버리는 특수토질이라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 방법, 저 방법 생각하다가 부산의 어떤 토목과 교수로

 부터 자문을 구했더니
  일반 사방 방식은 안되고

   특수 사방공법을 써야한다고 했다.


  철근을 넣어 콘크리트 수로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대로 해 보았다. 정말 대성공이었다.
 
 청와대에 결과보고를 했더니
 대통령이 주재하는 경제동향 보고회에 참석해
 그 내용을 직접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대통령과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나무가 꽤 자라난 일년 뒤에는 전국의 시장, 군수를

 현장에 모아 녹화교육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이러한 실적이 있어서인지

 ‘ 제일차 치산녹화 10년  계획’을 

수립하는 막중한 과제가 내게 맡겨졌다.
 워낙 농림부가 해야할 일이었지만새마을 사업을

 추진하던 내무부가 그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두어 달 밤낮없이 매달려 계획을 만들었더니
 관계장관 회의에서 계획입안자가
직접 보고하라는

 대통령 지시가 떨어졌다.보고 날짜가 잡혀졌다.
 
 차트사를 붙잡고 보고 전날 밤 한숨 안자고 일을 했지만
 보고시간 10시에 임박해서야 겨우 차트를 완성할 수 있

 었다. 정신없이 차트를 들러메고 청와대 회의장에 도착

 하니 보고시간은 이미 10분이나 지나 있었고 朴대통령을

 위시해서 총리, 장관 모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낭패스럽던 생각을 하면

몇십년 지난 지금도 등에 식은 땀이 난다.

 당황스러운 속에서도 심호흡을 하고 보고를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녹화10년 계획의 기본방향으로


 國民造林(국민조림),
 速成造林(속성조림),
 經濟造林(경제조림)의 세 원칙을 말씀드렸다.
 
 그러면서 훔쳐보니 대통령의 눈빛이 빛나며 고개를 끄덕

 이고 계신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휴- 하고 안심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제서야 준비한대로 찬찬히 브리핑을 진행할 수 있었다.
 
 보고 중간 중간 대통령은 질문을 하고 이야기를 하셨다.
산림녹화에 대한 열정과 집념이 느껴지는 말씀
 
 들이었다.
사단장 시절의 에피소드도 이야기하셨다.
 부대 순시 길에 플라타나스 가지를 지팡이 삼아  꺾어 짚고 다니다가  무심코 거꾸로 꽂아놓고 歸隊(귀대)하셨던 모양이다.
나중에 우연히 그 자리를 지나다보니

거꾸로 꽂힌 지팡이에서 싹이 돋았더란다.

나무의 생명력에 감탄을 했다 하시며 파안대소를 하셨다.

 그때 웃으시는 대통령 입안에 덧니를 보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뒤 지방국장으로 승진한 다음에는 대통령을 자주 뵐

 기회가 있었다.
 매달 한번씩 청와대에서 새마을 국무회의가 열렸는데
 이때 유일한 안건인 새마을사업 추진상황을
 주무국장으로서 보고 드리곤 했었다.
 모두 합해 21번 보고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박대통령이 새마을 사업에 대해가졌던 열정은

잘알려진 바이지만 ,

매 회의마다 그 분이 우리 농촌과 국토에

 대해 가졌던 뜨거운 애정,
 빈곤했던 우리의 역사에 대한 한에 가까운 처절한 심정,
 그리고 빈곤을 극복하여
 경제대국을 이룩하려는 결연한 집념에 숙연해지곤 했다.
  
 그뒤 나는 전남지사를 거쳐 행정수석이 되었다.
 1979년 1월 3일에서 10월26일 돌아가시기까지 열달 동안  바로 옆에서 대통령을 모셨다.
 이 시절에는 대통령과 수석비서관들과의

저녁 회식 자리가 잦았다.
 그전에는 잘해야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찬이 있었는데,
 이 시절에는 매주 한 번 이상이 될 정도였다.
 영부인이 돌아가신 뒤 외로우셔서 그러셨으리라 짐작한다.
 박 대통령은 저녁에 곁들여 반주를 드시곤 했다.

 막걸리 아니면 양주였다.
 막걸리도 특별한 것이 아니고

고양군에서 만든 일반 막걸리였고,

양주는 시바스 리갈이 고작이었다.

 반주를 드시 면서 옛 이야기도 자주하셨다.

 그러다가 가끔 흥이  나시면  '비탁' 칵테일을 만들어

 돌리시곤 했다.
 
 비탁이란 맥주 한 병을 탁주 한 주전자에 섞은

박 대통령 비장의 칵테일이다.
 비탁 칵테일을 조제하시는 대통령에게 옆에 앉았
 던 내가

“조제는 제가 하지요”하니까
 “어이, 이 사람, 이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당신은 배합 비율을 모르지 않나”하시면서 

젓갈로 비탁을 휘휘 저으시고는

우리들에게 비탁 칵테일의 사연을 들려주셨다.
  
 일제하 대통령이 문경국민학교 선생이었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젊은 선생들이 ‘기린 비루’를 마시고 싶

 기는 한데 워낙 박봉이라 마음놓고 마실 형편은 못되었다 한다.그래서 추렴한 돈으로 비루(맥주) 두어 병을 사

탁주 한 말에 부어 함께 돌려 마시곤 했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구미 상모리에 대농 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 지주 집에서 모내기를 할 때면 온 동네사람이 모두가 품앗이를 했다 한다.
이 때 마을 아이들과 함께 朴대통령도 따라 가곤 했었는데
그 때 지주 집에서 주던 밥과 반찬 맛이 어른이 되어서도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특히 호박 잎에 얹혀진 ‘자반고등어’ 한 토막이

 그렇게 맛있더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통령이 마음속에 간직한 가난한 시절에 대한 한과  어떻게 해서든 가난을 극복하려는 무서운 집념이 상대적으로 안녕하게 성장한 나에게도 절절하게 다가오던 것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뒤로 나도 비탁 칵테일을 몇번 만들어 보았다.
 그런데 아무리해도 朴대통령이 만들어 주시던 그 맛이

살아나지 않는다.
 우리가 잘 살게 된 탓에 내 입맛이 변한 것인지,

배합비율의 비결을 몰라서인지, 

아니면 그 둘 다 인지 알수 없다.
 편집자 주.

 고건 前 총리가 서울특별시장 재직시 박정희 前 대통령을

 회상하면서 쓴 글임

 
 
    2.    박정희의 "마이카 시대"를 비웃던 학자들
 
               
      
소위 전문가들의 북한 예측은
 
머지않아 휴지통 속에 들어가 버릴 것 같다
  
   
 
 
 
 
 
 
 
 
 
 
 
 
 
 
 김문수 경기도 지사는 1일 조갑제 현대사 강좌 강연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마이카 시대」를 말했을 때, 경제학자들은 입을 모아 비판했다』고 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보니 그 내 노라 하는 학자들 주장이 다 틀렸다』는 말도 덧붙였다.
 
 현실(現實)은 이론(理論)대로 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변혁(變革)의 시기일수록, 예측은 더 크게 빗겨간다.
60~70년대 근대화 격변기에 비견될 상황이
   김정일 이후 북한의 미래다.
절대다수 소위 북한학자들은 「북한붕괴」나 「자유통일」
가능성 자체를 언급하기 꺼려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金지사가 30년 지나 『다 틀렸다』
고백하듯,
횡행하는 소위 전문가들의 북한예측도 머지않아 휴지통에 버려질 지 모른다. 북한동포가 죽어가는 현실,
북한체제가 망해가는 현실(現實)과 동떨어진 썩은 논리,
죽은 분석이 너무 많은 탓이다. 아래는 이날 金지사의 강연 중 관련 부분을 정리한 것이다.
 
 
《대한민국은 저력 있다. 우리는 할 수 있다!
 보릿고개 넘어 소달구지에서 마이카시대로 진입했다.
고3때 교과서에 정권연장 위한 개헌은 잘 못된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때 마침 박정희 대통령 3선 개헌이 일어났는데,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반대 데모했다가 무기정학을 당했다.
 
 대학 가서도 박정희 대통령에 줄곧 반대했다.
서울 상대 재학 중에 박대통령이 「마이카 시대」를 말했다.
상대 교수들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이유는 이랬다.
 
 「자동차 산업을 할 기술(技術)이 없고, 시장(市場)이 없고,
자본(資本)이 없다.   만들어도 안 팔릴 것이다...
특히 자동차는 생명을 싣고 달리는 문명의 이기(利器)이자,
 자칫하면 흉기도 될 수 있다.
이런 자동차를 메이드인 코리아로 만들면 누가 사겠는가?
더구나 영국도 자동차 산업이 기울어서 미국, 일본에 밀리고 있다.」
 
 대한민국 교수, 선생님들이 다 그렇게 말했다.
「마이카 시대니 뭐니 독재의 연장수단으로 국민을 혹하게 만드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정책」이라고.
 
 교수, 선생님들 말씀 들어보니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열심히 데모했다.
 내 노라 하는 학자들이 하나같이 다 안 된다고 했는데
  이것이 성공할 줄 알았나?
며칠 전에도 기아자동차 공장에 갔는데 그 생각이 났다.
 
 당시는 자동차(自動車) 산업도 반대!    조선(造船)도 반대!
방위산업체(防衛産業體)도 반대! 고속도로(高速道路)도 반대!
 모두가 반대했다.
독재 연장수단이다, 국민을 속이지 말라고 비판했다.
 
 오늘날 한국은 자동차 생산 세계 5위, 
  조선은 세계 제 1 의 조선 왕국이 되었다.
 방위산업은 우리가 제조한 탱크, 장갑차등을 수출하게되고, 고속 도로는 국내 교통, 운수의 대 동맥이 되었다. 
지난 날  그 경제학자들이 했던 말이
   사실은 모두 다 틀린 말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사진모음  

★박정희 대통령 사진첩★


만주군 예비소위 박정희의 모습

만주군관학교 2기 예과 졸업식에서...



일본 육사 본과시절 동기생들과...

일본 육사 본과시절 후배들과 함께


대구사범시절 금강산 수학여행시 

어머니와 함께 : 
대구사범시절 구미 고향집에서



나팔부는 박정희 : 
대구사범시절 맨 오른쪽

박정희대통령 동상: 
구미초등학교에 세워진 기념동상

박대통령 생가 (현재) : 
구미시 상모리에있는 이 생가는 
박대통령 재임시 개보수 하였다.

박대통령 생가
이 집에서 출생하여 유년기를 살았다

박대통령 어린시절의 모습

현대건설 단양 시멘트 공장 始業式 
(1964.09.15)
박대통령과 젊은 시절 정주영 
회장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故 육영수 여사 묘소 참배(79.8.14)

[육영수 여사] (1966.9.30)














 
 
 
 
 
 
 
 

 

 
 
 
 
 
 
 
 
 
 
 
 
 
 

 

 
 
 
 
 
 
 
 
 
 
 
 
 
 
 
 
 
 
 
 
 
 
 
 
 
 

 

박정희대통령 작사작곡 "나의 조국"


 
 

 
    
    

       ▼인자하신 육영수여사
 

 

 ▲박근혜(현 한나라당 국회위원)

 ▲박정희 대통령 영결식

 

 ▼대한민국의 영원한 국모 육영수여사

 ▼이나라 근대화의 초석 박정희 전 대통령

 

나를 확대한 것이 즉 우리 국가입니다. 우리 민족이라고 할 때의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민족이라는 것은 나를 확대한 대아(大我)인 것입니다. 따라서 국가가 잘 되는 것은 내가 잘 되는 것이며

국가를 위해서 내가 희생을 하고 봉사를 하는 것은 크게 따지면 내 개인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1970년, 박정희>

 
 

//

 


 

백기완의 박정희 전대통령에대한 평가

** 백기완의 박정희 전대통령에대한 평가 **

 

박정희는 우리 같은 사람 3만명을 못살게 했지만

김영삼 김대중은 3천만명을 못살게 했다.』.

 

신산의 세월을 딛고 나서야 떨림의 음성으로 절규하는

 백기완 선생의 충심어린 고백을 들어보고 유신을 비난하라. 

 

 

첨부이미지



그 옛날 박정희 대통령을 그렇게도 욕하고 저주하던 백기완이라는 분이 지금에 와서는 어떻게 변했으며 또 무슨말을 하는지 읽어 보십시오. --

박정희에게 반기를 들었던, 백기완은 이제 박정희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


박정희의 유신과 백기완 선생의 고백 글. 
 
- 백기완-


 


1972년 유신이 채택됐었고 사람들은

'유신독재'라 불렀었다. 그 시대는 세계적으로 어떤 시절 이었는가?


그 당시는 이미 민주주의 역사가 300년 되었다는 영국도 자치구인 '북아일랜드' 사람들에게 연방선거권을 주지 않았을 뿐 만이 아니라 '북아일랜드' 사람들을 구속할 때 재판받을 권리조차 가질수 없도록 법을 제정하기도 했었다.


1972년. 그 유명했던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 사건이 바로 이 불평등한 법의 통과에 저항하여 평화롭게 행진하는 시위대 민간인들을 향하여 영국군들이 무차별 학살했던 날이었던 것이다.



또한 민주주의의 모범국가라는 미국은 어떠 했는가?

비록 흑인들의 저항과 희생으로 폐지되었지만 불과 30여년전만 해도 반민주적이고, 반인류적인 '분리주의정책'이라는 '인종차별법'이 버젓이 통과되고</! FONT> 있었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당시 아시아에서 제대로 민주주의를
 실천
    하고 있는 나라가 한 국가라도 있었던가.



대만은 장개석이 국민당정부에 저항하는 대만인들을 수만명 무차별 학살했었고 이북의 김일성, 김정일 부자처럼 아들까지 대대로 이어 40년간 세습통치를 하면서 정치적 반대자들을 피의 숙청으로 100만명을 죽게 만들었다. 여타 다른 아시아국가도 더이상 말할 필요도 없던 시절이었다.


대만에 가 본 적 있었더냐. 그렇게 많이 허물었다
하는데도 불구하고 대만 곳곳에 서 있는 '장개석' 동상은 마치 김일성' 동상마냥 수백 군데 버티고 서 있다. 유신을 마치 대한민국의 나치정권처럼 떠드는 사람들이라면 장개석이 수 만명의 대만인들을 학살한 대만의 '2.28 사건' 정도는 알고 떠들어야 한다.



박정희 유신시절. 당시 전세계 어느 나라도

지금과 같은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나라는 없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굶어죽는 사람이 오늘 날 굶어죽는 쥐새끼 보다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것 해결하는 것도 솔직히 막막했을 것이다.


박정희 집권시절. 김일성이 남한에 무장테러를 일으킨 사건만도 600 여건이 넘는다. 철책선에서는 자고 일어나면 목없는 전우의 시체가 나딩굴고 있음을 흔히 볼 때였다.


밖에서는 공산주의와 싸우며 나라를 지켜내야 했고 안으로는 '민주주의' 와 '인권'으로 포장한 당신들과 같은 인간들이 저지르는 사회 혼란 속에서 국력을 극대화 시켜 잘 사는 나라로 ! 링欲資..



힘이 없어 나라를 그냥 빼앗겼던 식민지 시절의 뼈아픈 경험을 되풀이 하지 않고자 절치부심하며 처절하리만치 비장했던 박정희의 차가왔던 가슴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봤더냐.



60년대 초의 대한민국 상황이란 어떠했는가?

일년 정부예산의 80% 를 미국이 지원해 주었고 춘궁기만 되면 굶어 죽는 사람이 각 동네마다 흔하게 발생했었지만 뉴스거리 조차 안되었던 나라였었다.



어딜가나 영양실조로 인하여 얼굴에 '버짐'피운 얼굴들이 가득했었다. 현재 아시아 4대 작은 용이라 불리는 싱가폴, 대만, 한국, 홍콩... 그 당시 이북과 태국의 GNP가 150 불일 때, 다른 아시아의 용들이 약 400~500$ 일 때, 남한은 76$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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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집권하고 나서부터 '잘 살아보세' 라고 외치면서..  자본, 자원, 기술 어느 것 하나 구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는 이미 그 3대 龍들과 어깨를 견줄만큼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루었고 이것에 세계는 깜짝 놀랐던 것이다. 그 때가 그대들이 거품 물고 독재였다 말했던 유신시절이었다. 일컬어 세계인들이 '한강의 기적' 이라며 찬사를 보내기 시작했다.


또한 '다른 나라에 우리의 안보를 맡길 수만 없다.'

하며 자주국방을 외치며 흔한 총탄 한알 만들지 못했던 상황에서 국산탱크와 미사일을 비롯한 여러국산장비들을 양산하고 있었다.



가발 팔고 와이셔츠 팔고 쉐타 만들어 팔던 경공업시대에서 지금 껏 한국인이 먹고 살아갈 수 있었던 중화학 공업체계로 바꿔놓고 있었다. 이 때가 '국력의 조직화'를 꾀하자던 유신이었다.



베트남이 패망하자 김일성의 오판이 심히 우려되어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1979년 미국의 방위정책 변경으로 주한미군을 철수 시키겠다 하며 방한한 당시 미 대통령 '지미 카터'와 언성을 높이면서 '철수하면 우리는 살기 위해서 핵으로 무장할 것이다,' 라며



대한민국의 안위를 온몸으로 지켜내면서, 민족의 힘 없음이 서러워 그 힘을 키워내고자 했던 것이 국력의 극대화' 라는 유신이었다. 전 국민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면서 오로지 나라만을 위하여 온몸을 불사르며 조국의 영광을 보고 싶어 근대화한

선진조국을만들고자 했던 것이 유신이었다.



1979년 박정희 死후, 미국 'CIA보고서'는 박정희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했다. '독단적이고 자존심이 강한 반면 카리스마와 서민적 이미지를 함께 갖춘 인물이다. 직관력과 통찰력을 겸비하면서 추진력이 강했던 인물이었다. 남한의 실질적 발전은 그로 인해 비롯 되었고 ..(중략) 그의 일반적 생활은 청렴하기 그지 없었다'라고 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은 '민주화'를

외치던자들이 집권하여 그들끼리만의 잔치판을 벌이며 희희낙락대고 있을 때 우리는 안에서부터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벌써 12년째 GNP 10,000 달러선에서 아둥바둥거리고 있는데... 싱가폴은 GNP 32,000달러, 홍콩 22,000달러, 대만 19,000달러로 멀리멀리 날아가고 있었고 부러움과 찬사로 대한민국을 배우겠다고 하루가 멀다하고 날아와 가르쳐 달라 머리를 조아리던 중국, 말레이시아, 인도, 인도네시아 등이 성큼 다가와 우리의 목덜미를 끌어 내리고 있는 중이다. 한국을 배우자 하며 전 공무원들에게 하루 한 시간씩 박정희 교육을 시키던 중국이 이제 '한국이 어떻게 망했는가를 배워라' 하며 인민들에게 학습하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를 비난하는 자들에게 묻는다. 유신독재를 비난하기 전에 유신 이후 우리나라가 무슨 이유로 무너지고 있는지 답해야 한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은 계속 발전하는데 유독 우리나라만 거꾸로 곤두박질 치고 있는지 답해야 한다. 인류사 및 세계사 통틀어서


18년간 집권하며 국부를 20배 이상 불려놓은 정치가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답해야 한다. 그런 정치인이'시저'더냐? '나폴레옹'이더냐? 너희들의 대부가 그리 존경한다던 '모택동'이더냐.. 전 세계 통털어 이러한 위대한 정치가를 부관참시하는 나라 있다면 분명 답해야 한다



'민주'로 포장된 정권이 들어선지 10년이 넘었지만
그들은 국가 비젼도 없으면서 '준비된 지도자'라 국민들을 속이고 '민주주의의 화신' 이란 교언(狡言)으로 미혹하고 '행동하는 양심'이라며 예수님보다   더한 '선한 양'으로 행세하며


'대중경제론' 이란 싸구려 만화같은 책을 마구 흔들면서 조국의 근대화를 앞장서 이끌었던 경제석학들을 조롱하고 신처럼 군림하면서 온 국민들에게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도덕군자인 양 행세했었다.


'김대업' 사기꾼이란 자를 앞세워 온갖 거짓말과 흑색선전으로 깨끗하고 맑은 순백의 젊은이들을 사기쳐서 정권을 훔쳤으면서도 부끄러움조차 전혀 못느끼는 전형적 모리배의 얼굴을 들이 밀고서 지금도 우리를 기만하고 백성들 한숨짓게 한다.


정권을 훔친 뻔뻔함을 바탕으로, 본성 자체가 선한 국민들을, 현란한 수사로 미혹하고 선동하여, 억울하게 돌아가신 우리의 대통령 박정희를 불러내어부관참시하려 한다.



삼천만 명의 백성을 죽인 모택동을 그리 존경한다
하면서 실제 민족의 영웅이었던 박정희를 부관참시 하려 한다. '박정희는 독재자'라며 역사의 심판을 받으라고 목에 핏대 세우고, 친일의 개념조차 모르면서.. 없던 사실도 흑색선전으로 호도하고 '친일파'라고 악다구리 쓰면서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박정희 묘소를 파내라 한다.


정작 파내야 할 것은 국헌을 유린하고, 국민을 갈기갈기 찢어 발기는 무현 정권을 파내야 하고, 역사의 심판을 받을 자는 반인륜 반민족적인 김정일에게 민족혼을 팔아넘긴 김대중을 심판대에 세워야 한다.

만약 그대들이 진심으로 나라를 위하는 일말의 순수한 애국심과 열정이 있다면.. 순수 시민운동가였던 백기완 선생의 고뇌와 회한에 차서 외치는 목소리에귀 기울여 보라.


『 박정희는 우리 같은 사람 3만명을 못살게 했지만
김영삼 김대중은 3천만명을 못살게 했다.』하는..

신산의 세월을 딛고 나서야 떨림의 음성으로 절규하는 백기완 선생의 충심어린 고백을 들어보고 유신을 비난하라.  "끝"

 

                                                             보내온 글 입니다.

 

 

 

 

지구촌에 울려 퍼지는 박정희 찬가.  

天將降大任於斯人也인데 必先勞其心志하고, 苦其筋骨하고, 餓其體膚하고, 窮乏其身行하고, 拂亂其所爲하나니, 是故는 動心忍性하여 增益其所不能이니라.

 

하늘이 장차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려 때에는 반드시 먼저 마음과 뜻을 괴롭히고, 뼈마디가 꺾어지는 고난을 당하게 하며, 그 몸을 굶주리게 하고 생활을 빈궁에 빠뜨려 하는 일마다 어지럽게 하느니라. 이는 그의 마음을 두들기고 인내심을 길러주어 그릇을 키우고지금까지 없었던 일도 있게 하기 위함이니라.

 

이 글은 맹자의 한 구절이다. 중국의 최고 지도자 등소평(登小平)은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이 글귀를 외우며 쓰라린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요즘 들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비난이 더더욱 거세지고 있다. 비난의 진원지를 추적해보면 항상 같은 부류의 몇몇 소인배들의 입방정이다. 어느 조직이건 간에 말을 지어내고 퍼트리는 극소수의 사람들은 항상 정해져 있다. 그들이 상대를 음해하고 매도하는 기준은 객관적인 잣대를 들이댈 수 없고 근거도 확인도 불가능한“카더라”수법이다. 개중에는 그럴듯한 여론몰이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 말에 휘둘려 자신을 망치는 자들도 생겨나기 마련이다.

 

필자가 서두에 등소평을 언급한 이유가 있다. 등소평은 뛰어난 능력과 자질, 그리고 불의(不義)와 타협하지 않는 신념으로 인하여 숱한 시기질투에 시달리는 혹독한 댓가를 치러야 했다. 굽힐 줄 모르는 소신으로 인하여 늘 불의(不義)의 표적이 되어야 했으며 급기야 두 번의 실각과 죽음의 위기까지 내몰리기도 했다. 또한 국가지도자의 반열에서 최하층 공장노동자로 강등되어 지방으로 쫓겨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모두가 등소평의 시대가 끝났다고 했을 때 그는 맹자의 구절로 쓰라린 마음을 달래며 불합리한 현실을 애써 거부하지 않았다.

 

등소평은 자신에게 어떤 시련이 닥쳐와도 마음속에 세운 정도(正道)는 결코 저버리지 않았다. 만약에 그가 소인배들의 손을 들어주고 그들의 말에 동조했다면 가족들과 함께 편안한 여생을 보냈을 것이다. 반면에 지금의 중국은 없다. 그는 스스로 고통스런 가시밭길을 선택하여 인내하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천명(天命)을 기다렸던 것이다.

 

하늘도 무심치 않아 등소평의 수명을 90여세까지 연장 시키면서 그가 중국 인민들을 위해 큰 뜻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등소평은 초로의 나이에 그 숙명과도 같은 과업을 훌륭하게 일궈내어 중국역사에 길이 남을 큰 위업을 쌓았던 것이다.

 

1m 50cm의 등소평이 펼쳐놓은 중국의 거대한 그림은 기염을 토할만했다. 13억 중국인민들은 이 작은 거인 등소평의 손을 들어주었으며 중국을 가난에서 구제한 최고의 영웅으로 칭송하고 있다.

 

등소평이 흑묘백묘론을 내세운 개혁개방과 함께 가난한 중국을 지금과 같은 거대 산업국가로 이끌면서 운명과도 같이 만난 역사적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박정희(朴正熙)이다.

 

중국근대화의 아버지라고 하는 등소평이 하늘처럼 받들어 모신 분이 바로 박정희인 것이다. 중국 지도부와 인민들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등소평이 박정희에게서 배운 것은 비단 새마을운동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가 중국 개혁개방의 힘든 고비를 견뎌낸 원동력에는 박정희의 뼈를 깎는 고독한 인내와 눈물겨운 애국애족의 정신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13억 중국인민들이 가슴 깊이 박정희를 추앙하고 흠모하는 이유이다.

 

등소평은 철저한 박정희주의자(朴正熙主義者)였으며 박정희라는 스승이 없었었다면 중국의 현재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박정희(朴正熙)는 13억 중국인민들에게 있어 마르크스나 레닌보다도 더 존경스럽고 고마운 민족의 은인(恩人)인 것이다.

 


남의 타작마당에 앉아 낟알을 쪼아 먹는 참새는 되지 말라 !

 

이 말은 필자가 철이 들 무렵 아버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이다. 농부들이 피땀 흘려 농사를 지어 타작을 할 적에 이곳저곳 타작마당을 날아다니며 곡식 낟알을 쪼아 먹는 얌체 같은 참새들을 가리켜 이르는 말이다. 돌이켜 보건데 스스로의 노력 없이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깊은 뜻이 서린 말씀이었다. 능력과 자질이 안 되면서 명성을 탐하는 사람들의 특성은 스스로 노력하고 정진하여 일궈내는 수고보다는 그럴듯한 언변으로 상대를 모함하고 헐뜯고 깎아내려 손쉽게 자신의 입지를 굳히려 한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한번씩 뒤돌아 볼 일이다.

 

박정희대통령 개인은 물론 새마을운동까지 매도하는 노무현의 배은망덕한 통치철학은 참으로 무지한 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국내의 모출판사에서 만들었다는 교과서 내용에 북한의 천리마운동을 긍정적으로 표현하고 새마을운동을 격하시키는 어이없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새마을운동이 없었다면 노무현 정권이 어떻게 끝없이 북으로 퍼 나를 수 있었단 말인가? 기가 막힐 노릇이다.

 

노무현 정권이야말로 박정희가 일구어 놓은 타작마당에 앉아 낟알을 쪼아 먹는 얌체없는 참새인 것이다.

 

천리마운동이 북한경제에 기여한바가 커서 북한동포 300만 명씩이나 굶겨죽이고 이 나라 저 나라에 손 벌려 구걸이나 하고 다닌단 말인가? 새마을운동이 정권유지 차원으로 악용되어 아시아는 물론 차베스를 비롯한 남미의 좌파 지도자들조차 박정희에게 깊은 경외를 표하며 새마을운동을 못 배워 안달을 한단 말인가?

 

現정권이 과거사 정리라는 명분으로 급조된 위원회가 18개에 달하며 책정된 한해 예산이 1800억이라고 한다. 같은 사건이 3~4개씩 각기 다른 위원회에서 중복되는 경우도 허다하며 이렇다 할 명분도 없이 국민들의 세금만 축내고 있다는 원성과 빈축을 사고 있다. 온갖 편법과 불법을 자행하는 現정권이 일개 사건,사고도 아닌 역사를 심판하겠다는 그 코메디 같은 발상이 가상하기만하다.

 

미래는 없고 오직 과거만 있는 現정권은 노무현 개인의 어설픈 역사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거기에 소신 없는 사이비 어용학자들은 그의 그릇된 역사관을 지적하기보다는 너도나도 노비어천가를 읊어 대며 부추기고 아첨하는 데에만 급급하다. 노무현 정권에서 아부근성 하나만 출중하면 각위원회의 위원장자리와 청와대에 입성하는 것쯤은 떼 논 당상이라고 한다. 암울하기만 한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박정희대통령이 위대했던 밑바탕에는 편협 적이지 않은 위민(爲民)정신과 정확하고 냉철하게 꿰뚫었던 역사의식, 그리고 엄격하고 공정한 신상필벌의 혜안에 있었던 것이다. 혹자는 박정희를 가리켜 혼란한 시대에 청탁(淸濁)과 영욕(榮辱)을 들이마시고도 자신은 오염되지 않았으며 이를 정화시켜 맑고 푸른 바다를 만들어 냈다는 표현을 한다. 철저히 자기 자신을 지우고 또 비워내어 오직 애국애족(愛國愛族)의 일념만을 품고 한평생을 보냈다는 표현일게다.


어느 명사의 아버님이 임종하면서 아들에게 이런 유언을 했다고 한다. “세상을 편하게 살려면 정도(正道)를 걷지 말거라”정도(正道)를 걷는 일이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아들에게 각인시켜주며 고통스러워도 잠시의 편안함보다는 정도를 위해 살라는 역설적인 표현이었던 것이다.

 

갖가지 편법과 불법을 동원하여 민심(民心)을 훔쳐 자리에 오른자가 어찌 정도(正道)를 알겠는가? 힘들이지 않고 민심(民心)을 도적질 하는 악순환만 반복이 될 뿐이다.

 

박정희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가난한 분단국가 코리아를 "한강변의 기적"이라는 세계인들의 찬사와 함께 당당히 국제사회의 반석위에 올려 놓았으며 사반세기가 지난 현재에도 눈물겨운 애국애족의 박정희정신은 지구촌 구석구석으로 수출되어 새로운 박정희주의(朴正熙主義)의 신화를 창조하고 있다.

 

노무현정권은 18개 위원회에 1800억이라는 예산을 쏟아부어 박정희 죽이기에 골몰하고 있지만 오늘도 박정희(朴正熙)의 기상은 유유히 한강을 흐르고 위대한 박정희정신은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에 면면이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김 동 주(2006.02.22)

 

♣ 故 朴正熙大統領의 勤儉 節約生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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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재건 최고회의 신임장관 임명 및 선서식 196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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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재건회의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196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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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장 신년 시정발표 196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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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의거 기념탑 제막식 참석 헌화 1963-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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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 내외분 새해 첫 날 국군묘지참배 분향 196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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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하동군 수해지역 시찰 1965-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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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동지회 창립 1966-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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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공화당 전당대회 및 제6대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 196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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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나주,광주,무안,영암 한해지구 시찰 196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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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장군 탄신 424주년 기념 및 현충사 중건 준공기념식 참석 1969-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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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 개통식, 공사도중 유명을 달리한 분들의 위령탑 참배 197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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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대통령선거, 박정희 대통령 경북 대구 유세 197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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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현대조선소 기공식 참석 197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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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의 쌀 생산, 포항종합제철 준공식 참석 197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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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손으로 만든 최초 울산현대조선의 26만톤급 유조선 명명식 참석 1974-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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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회 광복절 기념식(육영수여사 생애 마지막 공식일정이 되어버린)1974-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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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 생신 맞아 휴가도 중 동해안 합동방어훈련 참관 1975-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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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영산강 유역의 고질적 침수와 가뭄 해결을 위한 댐 준공식 참석 197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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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100억 달성 기념식 및 수출의 날 유공자 포상(김우중 대우회장)1977-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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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업화의 원동력이 된 고리원자력 발전소 1호기 준공식 참석 1978-7-20

 

 

<< 197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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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마지막 연두기자회견 1979.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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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지하철 탑승(74년 육영수여사 서거날 개통된 1호선) 1979.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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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팀스피리트 참관 1979.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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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마지막 육군 사관학교 35기 졸업식 참석 1979.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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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마지막 공군 사관학교 27기 졸업식 참석 1979.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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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마지막 해군 사관학교 33기 졸업식 참석 1979.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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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이충무공 탄신 434주년 기념 참석 마지막 제향 1979.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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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괴 기습남침에 대비한 예비군 훈련 참관 1979.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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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수도권 야간방어 훈련 참관 1979. 8. 28 

 

 

<박정희 대통령 생애 마지막 공식 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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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朴正熙大統領의 勤儉 節約生活



 박정희의 헤진 혁대, 도금이 벗겨진 넥타이 핀.

1979년10월26일 저녁 경복궁 앞 국군병원에서는
 
이미 시체가 된 박정희를 놓고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필자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 인용한다.
 

두 정보부 경비원 유성옥과 서영준은 허리에 권총을 차고 있었다.
 
그 권총을 일부러 보이면서 둘러선 군의관과 위생병들에게
 
"꼭 살려야 해요" 라고 위협조로 말했다.
 
 
정규형 대위는 이우철 일병에게 심장 마사지를 하라고 지시했다.
 
이일병은 환자의 가슴 위로 올라가서 두 손을 포갠 뒤에
 
왼쪽 가슴을 몇 차례 강하게 눌렀다.
 
 동시에 정 대위는 수동식 인공호흡기
 
'암부'를 환자의 입과 코에 덮어씌워 놓고
 
 공기주머니를 눌러 공기를 허파로 밀어보냈다.
 

정 대위는 심장을 자극하여 박동하게 하는
 
강심제 에피네프린 20cc를 가슴에 주사했다.
 
심장마사지도 다시 했다.
 
 한 20분간 응급소생법을 실시했으나 결과는 회생불능이었다.
 

정 대위는 "도저히 안되겠습니다"라고 했다.
 
송계용 소령이 "돌아가셨습니다"라고곁에 버티고 있는
두 감시자에게 이야기했다.

"이 사람이 누구십니까.".

송 소령의 물음에 두 감시자는 대답이 없었다.
 
 
며칠 뒤 군의관 정규형 대위는 합수부에서 조사를 받을 때
 
"얼굴을 보고도 왜 각하인줄 몰랐는가"란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했다.

"병원에 들어왔을 때는 얼굴에 피가 묻어 있었고
 
감시자들이 응급처지 중에도 자꾸 수건으로 얼굴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시계가 평범한 세이코였고 넥타이 핀의 멕기가 벗겨져
있었으며 혁대도 헤져 있었습니다.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약간 있어 50여세로 보았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사실로 미루어 각하라고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일부에서 원수처럼 욕을 퍼붓고 있는 박정희는 죽을 때
 
 '평범한 세이코, 멕기가 벗겨진 넥타이 핀, 헤진 혁대'를
차고 있었다.
 
 
 그의 집무실과 침실 화장실 물통에는 벽돌 한 장씩 들어 있었다.
 
 물을 절약하기 위해서. 그의 집무실에는 선풍기와 파리채가
있었다.
 
기름 절약을 위해서 한여름에도 에어컨 사용을 통제했던
 
그는 문을 열어놓고 선풍기를 틀면서 더위를 견뎠다.
 
 
벌레가 들어오면 파리채로 잡았다.
 
그가 죽을 때 입고 있던 바지는 허리 부분을 수선하여 늘린
것이었다.

趙甲濟 月刊朝鮮 편집장
 

5. 박정희와 정조(正祖)

개인의 응어리 민족차원서 푼 초인(超人)
 
 "책을 놓지 않았던 유교적 교양인....." 추진력은 골돌한
사색에서.....

1979년 11월3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고 박정희 대통령 영결식에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영전에 바칠 때
 
국립 교향악단이 연주한 곡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였다.
 

낮은 음에서 시작되어 고음으로 치다른 뒤 꼭지점에 도달했다가
 
급격하게 사라지는 이 장엄한 곡은 니체가 쓴 같은 이름의
책 서문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곡처럼 박정희는 토종 한국인으로 태어나서 초인(짜라투스트라)처럼
살다가 영웅에 어울리는 최후를 남기면서 사라져갔다.
 

이 니체의 책 서문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인간이란 실로 더러운 강물일 뿐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고 이 강물을 삼켜버리려면
 
모름지기 바다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박정희는 질풍노도의 시대를 살면서 영욕과 청탁을 같이
들이마셨던 사람이다.
 
영웅이란 한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고 그 시대를 담는
그릇이며새로운 시대를 빚어내는 용광로이다.
 
그는 시대 정신을 반영하고 그 시대의 요구를 담아 현실
속에서 구현하는 사람이다.
 
영웅은 보통 난세에 나타나서 불꽃처럼 살다가 홀연히 사라진다.
 
그리하여 후세에 오래오래 계속되는 논쟁점을 남긴다.
 
바다처럼 청탁을 함께 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암살 순간에도 "난 괜찮아".

니체가 말한대로 스스로의 혼을 더럽히지 않고
 
청탁을 함께 쓸어담았다가 이를 소화하여 한반도라는 화폭에
 
큰 그림을 그렸다는 점에서 박정희는 김일성과 차원을 달리하는 인간이다.
 
 
 김일성은 권력으로 부패했으나 박정희는 권력을 쥐고도
 
끝까지 맑은 혼을 유지하였다.
 

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에 쓴 '국가와 혁명과 나'에
 
그가 인용하여 실은 시의 한 구절은 '2등 객차에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야 나는 고운 네 손이 밉더라'였다.
 

그는 이 시를 인용한 뒤에 '고운 손은 우리의 적이다'고 덧붙였다.
 
이 책 끝장에서 박정희는 '가난은 나의 스승이고 군림 사회와 특권
계층을 증오하는 것은
나의 생리'라면서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그서민의 인정 속에서 생이 끝나기를 염원한다' 고 했다.
 

박정희는 1979년 10월26일 저녁 7시40분 김재규가 벽력 같은
고함을 지르면서 차지철을 쏠 때, 그리고 차지철이 실내 화장실로 달아날 때,
 이어서 김재규가 일어서서 4∼5초쯤 주저하다가
 
박정희의 가슴을 향하여 발사할 때 미동도 하지 않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이는 곁에 있었던 두여인의 일치된 증언이다.

차지철이 실내 화장실 문을 빼꼼이 열고  "각하 괜찮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박정희는 "난 괜찮아"라고 했다.
 
 
 두 여인이 "각하 진짜 괜찮습니까"라고 했을 때 그는 또다시
"난괜찮아"라고 했다.
 
이 순간 그는 관통상으로 인해 등에서는
선혈을 콸 콸 쏟고 있었다.
 
 세계의 암살사를 다 뒤져도  이런 초인적인 장면을 발견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준비없이 맞이한 상황에서 그가 보여준 이 모습이야말로
 
인간 박정희의 꾸밈없는 진면목이다.
 

육영수는 선을 볼 때  박정희가 구두 끈을 푸는 뒷모습이 좋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인간은 앞 모습은 꾸밀 수가 있지만 뒷모습은 꾸밀 수가 없다.
 
 뒷모습이야말로 그 인간의 참 얼굴일 것이다.
 
 
총알이 허파를 꿰뚫고 지나간 뒤에도 "난 괜찮아"라는 말을 한
그의 마지막 모습이 바로 우리가 본 그의 뒷모습이었다.
 

이런 행동은 죽음과 오랫동안 대면해 왔던 사람, 그리하여 죽음과 친구가
된 사람만이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리라.
 
 
그는 어머니가 임신 했을 때 지워버리려고
그렇게 애썼던 생명이었다.
 
44세에 며느리를 둘이나 둔 어머니는 박정희를 임신하자
 
간장을 두 사발이나 마시고 기절해 보기도 하고 높은 데서
뛰어내려 상처를 내보기도 했다고 한다.
 

무거운 것을 배에 얹어서 뒤로 넘어져 보기도 했으나 뱃속의 생명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태어나서는 안 될 생명'이 태어났고이 인물에 의하여
이 나라가 천지개벽의 변화를 겪었으니
 
운명적이란 말로써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박정희는 지옥의 문턱까지, 그리고 인생의 골짜기까지 떨어졌던 경험을
여러 번 했던 사람이다.
 
남로당에 포섭되었다가 탄로가 나서 전기고문을 받는 가혹한
수사 끝에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그의 인간됨을 아낀 많은 사람들의
운동에 의해서 생환했다.
 
 
그때 동거하던 이 모 여인은 가출하여 그를 버렸고 피난 중 부산의 어느 술집에서 이상한 관계로 재회했다.
 

마음은 여리지만 간은 컸던 사람.

박정희는 실연과 가난과 그에 따른 인간적 수모, 식민지 생활의
울분, 해방 후 사상 대결에서 겪었던 비참함을 하나의 거대한 응어리로 만들어 가슴 속 깊이 묻어두었던 사람이기도 하다.
 
 
 이 응어리를 개인적 차원에서 해소하려 하지 않고 민족적 차원에서
풀어간 점에서 그가 혁명가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 응어리는 그의 동력원이었다.

이 응어리로 해서 그는 미국에 도전하는 엄청난
오기를 부릴 수 있었다.
 
타고난 반골인 그는 경제개발을 통해서 물질적인 기반을 확보한 다음,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주국가의 건설을 최종목표로 설정했던 것이다.
 

박정희는 소심담대한 사람이었다.
 
 즉 마음은 여리고 부끄럼을 타며 간은 큰 사람이었다.
 
육영수와 선을 보러갈 때는 가슴이 떨려서 소주 한 병을 마시고
간 사람이 영구 앞에서는 태산처럼 의연했다.
 
 
그의 집무실은 서재로 불렸다.
 
그는 책을 손에서 떼지 않는 유교적 교양인이기도 했다.
 
 
정확한 용어 선택과 늘 핵심을 찌르는그의 말은
박정희가 1급 지식인이었음을 보여준다.

박정희의 추진력은 골똘한 사색에서 나왔다.
 
그가 이룩한 엄청난 물질적인 성취의 바탕이 되었던
 
이 정신력을 간과하고는 박정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말년의 박정희는 아내를 잃은 허전함으로 해서
내면이 해이해졌다.
 
그를 둘러싼 권력의 갑옷은 차지철 경호실장의
월권에 의해서 경직되어 갔다.

이 허전함과 경직됨의 틈바구니에서
김재규의 총탄을 허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로 하여금 영웅으로 죽게 만든 김재규는
 
저승에서 박정희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들었을지 누가 아는가.
 

글쓴이 : 김두영(전 청와대 비서관)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동영상
1) 박정희 대통령 서거 (6분)



2) 자발적인 시민들의 추모 행렬 (5분)



                                 박 대통령을 다시 알려면 이 글을 꼭 읽기를 권합니다.  
    박정희가 그리워지는 이유  (어느 우파 논객)


  경제가 어렵고 나라가 뒤숭숭할때 늘 떠오르는 인물이

박정희이다.

 

나뿐 아니라 많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젊은 시절 박정희를 미워했던

사람들이다.

 

젊은 시절 나에게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파괴한 파쇼 군부

독재자일 뿐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민주주의와 경제발전 두마리의 토끼를 한번에

 잡을수 있었는데박정희가 집권해 재벌과 결탁하여 빈부격차를 만들어내고 숫자상의 경제성장과 남북대결구도를 통해 국민들을 억압하고 또 현혹해 영구집권을 하다가 술자리에서 부하의 총을 맞고 죽은 그런 독재자였다.

 

 

  그러나 이제 돌이켜보니 내가 틀렸고 박정희는 옳았다.

그래서 박정희를 미워했던 나는 박정희만 생각하면 늘 미안

해진다. 또 나라가 어려울 때면 과연 박정희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박정희 이후, 박정희와 대결했던 민주투사들이 집권해서

국가의 기강을 흔들고 경제를 힘들게 할때마다 박정희한테

미안해지고 그가 그리워졌다. 이제 3김시대도 끝났는데 그

그리움은 더 커지고 있다.

 

 

  8.18 도끼만행 사태가 일어났을때 박정희는 미친개에는

몽둥이가 약이라고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했다.

 

박정희 시대의 구호중에 하나가 '무찌르자 공산당, 때려잡자

김일성' 이었다.

 

조금 촌스럽고 무식해 보이는 구호이기는 해도틈만나면

대한민국을 잡아먹으려고 했던 김일성의 간담이 서늘해질만한

구호이다.

 

 

  다른 한편, 박정희가 산림녹화법을 만들었을때 많은 사람들은 굉장히 황당해 했다 자기동네 뒷동산에도 마음대로 못올라가게 하니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비행기에서 보이는 고국의 누런~

민둥산에 가슴이 아팠던 박정희가 시작한 일이었다.

 

 

  초가집을 없애고 마을길을 넓히자고 시작한 새마을 운동을 두고

많은 식자들은 이를 비판했다.

 

우리 민족의 전통이 담긴 주거문화를 그런식으로 무자비하게

 없애는 개발지상주의를 비판했다. 이를 두고 박정희는

그랬다고 한다.

 

"그럼 당신들이 거기 들어가 살아!!" 초가집에 살아본적이

없는 책상좌파들의 낭만타령에 대한 박정희의 일침이었다.

 

 

  73년 박정희 필생의 신념이었던 중공업화 계획을 발표하며

웬지 촌스러워보이고 딱딱해 보이는 "대망의 80년대,

수출 100억불 국민소득 1000불"의 구호를 외쳤을때 많은

 사람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

그런 딱딱한 구호보다는 오히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