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본앨범 ▼/★.산행 & 여행사진

[스크랩] 구름도 쉬어가는 청도 雲門社

朴正培(박정배) 2010. 7. 30. 18:51


♤ 고려, 조선시대의 운문사 ♤

[삼국유사] 보양이목조에는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태조왕건은 운문사에 있던
보양국사의 계책으로 이 일대를 평정하였다. 그 뒤 후삼국의 사회적 혼란을
어느 정도 수습한 왕건은 937년(태조 20년), 대작갑사에 '운문선사'라는
사액과 함께 전지 500결을 하사하였다." 고 한다.

이 때부터 대작갑사는 운문사로 개칭되었고,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구축한
대찰로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1105년(고려 숙종 10) 원응국사 학일이
제3차 중창한 후 왕사로 책봉되었다. 원응국사는 1129년(인조 7) 부터
이 절에 머무르실 때 운문사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1277년 일연선사는 고려 충열왕에 의해 운문사의 주지로 추대되어 1281년까지
머무르셨다. 이 곳에서 일연은 『삼국유사』 의 집필을 착수하였다. 운문사의
절 동쪽에는 일연선사의 행적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인 18세기 중반, 운문사는 설송 연초대사가 제4차 중창할 때와 19세기
전반 헌종 년간에서 운문사의 사세는 상당했다.

운문사의 제5차 중창주인 운악화상은 1839년에 오백전을 중수하였다. 이듬해
응진전과 명부전, 미타전, 내원암, 북대암등을 중건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청신암을 창건하였고, 1842년 금당을 중건하였다.



#01.

금당 앞의 삼층석탑과 "외인 출입 금지구역 내의 당우[堂宇]들"
(당우란, 정당(正堂)과 옥우(屋宇)라는 뜻으로, 규모가 큰 집과
작은 집을 아울러 이르는 말. 주로 절집[사찰]을 일컫는다)



#02.

不 二 門(불이문)!

(상대적이고 차별적인 것을 모두 초월하여 절대적이고
평등한 진리를 나타내는 가르침. 불이법문의 줄임말...)



#02 - ①.

울력을 마치고 돌아오는 학인스님들...
/ *(가져온 자료)



#03.

불이문(외인 출입금지 구역, 금당 인근) 안쪽의 풍경입니다...



#04.

부엌의 풍경(강원, 경상, 전라, 충북에선 방언으로 "정지"라고도 한다)



#04 - ①.

② 편에서 설명하였지만  3학년은 미화를 책임지는데,
부엌일도 3학년(사교반)의 몫이다... / *(가져온 자료)



#05.

삼층탑을 중심으로 좌측의 만세루, 우측의 작압전과 관음전!



#06.



#07.

2기基 의 삼층석탑(운문사 터중에서 음기가 가장 센
비로전의 기운을 다스리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진다).

높이는 5.4m이고, 재료는 화강석이다. 운문사 비로전(구. 대웅보전:보물 835)
앞에 동·서로 배치된 쌍탑으로 기단부가 파손된 것을 수리하였다고 하며, 두 탑의
규모나 양식은 같다. 2중 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전형적인 통일
신라시대 형식으로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불탑의 맨 꼭대기 지붕 바로
위에 놓여 상륜부를 받치는 부재)과 복발(覆鉢:불탑의 노반 위에 있는 장식으로
바리때를 엎어놓은 모습)·앙화(仰花) 등이 남아 있다. 기단부에는 탱주(撑柱:탑의
기단 면석 사이에 세우거나 면석에 돋을새김한 기둥 모양)와 우주(隅柱:탑신의
모서리에 세운 기둥)가 있고 기단 면석(面石)에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을 양각하
였는데 모두 앉아 있는 자세로 머리 부분을 크게 묘사하였으며 세련된 조각수법
이다. 탑신부는 옥신석(屋身石)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한 돌로 조성되었는데
옥신석에는 모서리에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고 옥개석에는 각층 5단씩의 받침
층단을 새겼고 추녀 밑이 수평을 이룬다.
이 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 양식을 나타내며 9세기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 보물 제678호 )



#08.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셔졌기 때문에 "비로전"으로 현판이
되어 있어야 하나 문화재 관련으로 인하여 "대웅보전"으로
되어 있답니다./ *(운문사 홈피에서 발췌)



#09.

학인스님의 설명에서도 "비로전(毘盧殿)"이라고 하였으나
아직도 현판은 대웅보전(구. 대웅보전)으로 남아있다!

석가모니는 열반을 앞둔 최후의 설법에서 제자들에게 자신 스스로와
법에만 의지하여 정진할 것을 당부하였다. 여기에서 말한 법이 곧
비로전에 봉안된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이다. 비로자나는 원래 '산스
크리트어' “바이로차나”가 어원으로 편일체처(遍一切處), 광명편조
(光明遍照)로 번역된다. 즉 모든 곳에 두루 광명이 비춘다는 뜻이다.
불교는 법을 신앙하고 의지하는 종교이다. 심지어 지존인 석가모니
부처조차도 일시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잠시 출현한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한다. 이미 과거의 무한한 세월 속에서 성불을 하고
인간을 교화해 온 부처가 있었던 것인데, 이러한 부처를 구원의 "법신
불"이라 한다. 이 때의 법신은 진리 자체의 몸으로서 법과 의미를
같이하는 것이다. 법신인 비로자나불은 항상 고요가 깃든 진리의
빛으로 충만한 상적광토(常寂光土)에서 법을 설하면서 중생들을
교화한다고 한다. 이러한 세계를 구현한 곳이 바로 비로전이며
이곳이 화엄종 사찰의 주불전이 될 경우에는 "대적광전 또는 대광
명전(大光明殿)" 줄여서 대광전(大光殿)이라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10.

비로전을 수호하고 있는 한 쌍의 해태[獬豸]상!
(시비와 선악을 판단하여 안다고 하는 상상의 동물.
사자와 비슷하나 머리에 뿔이 있다고 한다.)



#11.

비로전에 모셔진 비로자나불!

비로전은 보물 제 8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장이 구슬모양으로
정교하게 다듬은 나무를 붙인 후 금빛으로 단청을 하여 법당 안을
환하게 밝히게 한게 특징이다. 또한 법당안에서 삼장단 쪽 천장을
보면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악착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이름 그대로 이 生에 기필코 성불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악착같이
정진하는 모습을 뜻하는 것으로, 악착보살이 외줄에 매달린 것은
오로지 수행자로서의 일념으로 한길만을 걷는 것을 나타낸다고
한다. 악착보살이 매달린 용 모양이 조각된 1m 가량의 길이로
날렵해 보이는 편인 이 조각품을*반야용선[般若龍船]이라고 한다.



#12.

오백전(오백나한전: 五百羅漢殿의 준말);

나한은 산스크리트 'Arhan'을 음역한 아라한(阿羅漢)을 줄인 말로,
상당한 경지에 이른 부처의 덕 높은 제자를 뜻한다.  아라한은
'공양을 받을 만한 자격자', '진리에 응하여 남을 깨우치게 하는 자',
즉 성자(聖者)를 가리키는데, 응공(應供) 응진(應眞) 살적(殺賊)
불생(不生) 무생(無生) 무학(無學) 진인(眞人) 등으로 의역된다.
나한은 16나한· 18나한· 500나한이 있는데 16나한이 가장 널리
그려졌다.



#13.

세 분 부처님 바라보며 부처님의 왼편 나한(羅漢)들!
(나의 실명이 文漢이고 보니 모두가 내 형님뻘이되네?
이 곳과 내가 쓰는 漢은 모두 "사나이 한(漢)"을 뜻한다...)



#14.



#15.

세 분 부처님 바라보며 부처님의 오른편 나한(羅漢)들!
(오백분 모두 닮은 얼굴은 없다. 조각하고 그리신
분들의 재주에 탐복을 금할뿐......)



#16.

좌측부터 법륜상, 신 대웅보전, 감로수, 만세루!



#17.

작압전(鵲鴨殿)

불교 정화 이후 25년 동안 보수하고 다듬어진 운문의 도량에 옛과 현재를 이어주는
조그마한 조가비 같은 모습의 작압전은 천년의 숨결을 지니고 있다. 벼리(綱)를 듦에
그물(網)코가 모두 들려오듯 이 작압전은 1400여 년을 내려오고 있는 운문사 내력을
작압이라는 단어에 일축시켜 후인에게 말없는 증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서기 600년에 원광국사가 제1중창을 한지 303년 뒤 신라 경순왕
4년 서기 930년에 보량국사가 제2중창을 하게 된데서 오늘의 작압전이 있게 되었다.  
운문사는 창건 당시는 작갑사(鵲岬寺)였다. 제2중창을 했던 보량국사가 서역과 중국
에서 유학을 하고 귀국하던 중 서해에서 용왕의 청으로 경을 설하여 주고 돌아오려
하는데 용왕이 작갑사의 옛터를 찾아 절을 지으면 반드시 불법을 보호하고 삼국을
통일할 어진 임금이 나올 것입니다.
하는 말을 듣고 돌아와 작갑사의 옛터를 찾았다. 그러나 흔적이 없어 북쪽 고개에
올라가 내려와 보니 황금탑이 보이므로 내려와 살폈으나 흔적을 찾지 못해 다시
현 북대암에 올라가 살펴보니 찬란한 빛을 발한 황금탑 주의에 까치떼가 모여들며
땅을 쪼아대는 것을 보고 내려와 땅을 파보니 오래된 벽돌이 무수히 나와 작갑사의
옛터임을 확인하고 그 벽돌로 탑을 조성하니 남은 게 없었다 한다.
까치떼들의 도움으로 작갑사를 중창하게 된 보량국사는 까치떼를 기념하기 위해
까치/작(鵲)에 오리/압(鴨)를 써서 작압전을 지으니 때에 사람들이 작압사(鵲鴨寺)라
불렀으며 고려 태조가 운문선사(雲門禪寺)라는 사액을 내려서(937년) 이때부터
운문사라 불리웠으며 호거산을 운문산이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작압전은 일제 때 지금의 종무소 자리에서 지금의 위치인 관음전 옆으로 옮겼으며
안에는 신라시대에 조성한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317호)과 사천왕 석주(보물318호)가
봉안되어 있다.



#16 - ②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
운문사 작압전에 모셔진 불상으로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춘 고려시대
석조여래좌상이다. 대좌 상단부는 평면타원형에 14개의 연꽃잎을 새
기고 중간대좌는 6각형을, 아랫부분은 긴 6각형에 18장의 연꽃잎을
새겨 놓았다. 불상은 항마촉지인 손 모양과 전체적으로 투박하고
호분이 두껍게 칠해져 세부표현이 상실된 높이 0.63m의 석조여래
좌상이다. - 근래 호분을 벗겨 내었다 - / * (가져온 자료)





#17 - ③

사천왕석주(보물 제318호)
운문사 작업전 석조여래좌상 좌우에 2기씩 총 4기의 사천왕이 모셔져
있다.  사천왕 석주는 본래 운문사에 있던 벽돌탑인 전탑 1층 탑신
몸돌 4면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며, 통일신라 후기에서 후삼국시대인
900년경을 전후해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천왕석주는 삼고저를
든 증장천왕, 탑을 든 다문천왕, 불꽃을 든 목광천왕, 칼을 든 지국천황으로
갑옷을 입고 악귀를 누른 상태이다./ *(가져온 자료)




#18.



#19.



#20.

칠성각(七星閣)

칠성.독성.산신의 탱화를 봉안하였으며, 삼성각이라고도 한다. 1890년
(고종27)에 박선원 화상이 창건하였다. 예전에는 비로전과 만세루 사이에
있었으나, 1970년 당시 주지인 태구스님이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중앙에 칠성탱화를 봉안하였고,  좌우로 독성과 산신이 모셔져 있다.


통상적으로 칠성각은 인간수명을 관장하는 칠성 즉 일곱여래의 존상을
모신 곳으로,

   - 수명장수신(壽命長壽神)인 칠성(七星)을 봉안하는 사찰 당우. 칠성은
원래 중국에서 도교신앙과 깊은 관련을 맺고 형성된 다음 우리 나라에
유입된 신으로, 처음에는 단순한 수호신으로 불교 속에 수용되었다가
다시 수명신 본래의 모습이 강조되고 불교화됨에 따라 독립된 칠성각을
만들어 봉안하게 되었다.

- 칠성전(七星殿)이라고도 하는데 북두칠성을 모신 전각으로 칠성을
부처님들로 화한 경우가 보통이다.

- 치성광여래(熾星光如來)를 주불로 모시며 특히 우리 나라에서 가장
성행한 전각이다. 손에 금륜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좌우에 협시로 배치된다. 특히 조선시대가장 성행한

전각으로 운문사, 옥천사, 선암사 칠성각 등 수많은 예가 남아 있다.

- “칠성”이란 북두칠성을 일컫는 것으로, 사찰에 칠성을 모시게 된 것은
중국의 도교사상이 불교와 융합되어 나타난 현상이다.

- 칠성각은 우리 나라 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의 전각 중의 하나로서,
한국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우리 나라 불교사의
초기 및 중기의 사찰에서는 칠성각을 찾아 볼 수 없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차츰 나타나기 시작하여 현재는 전국 대부분의 사찰에
건립되어 있다.



#21.

외인의 출입을 금합니다!

출가 하기 전,
"출입을 금합니다" 하는 안내판을 보면서 저 역시
무진장  궁금해 했어요.

과연 저 안엔 뭐가 있을까?

흠...

과감하게 밝히죠!

커다란 기와집이 있어요. 고래등 저리가라 할 만큼
커다란 집에, 방(房)은 딸랑 하나 있죠,

그 방에서 120여 명이 먹고, 자고, 공부하고, 싸울 뻔...
하다가 화해도 하고, 웃고, 침묵하고...
사람 사는 모습, 그대로랍니다.

뭐 별난 것이라고 한다면,

이 큰 기와집에도 지하실도 있고 다락도 있어서,
러브하우스 못지 않게 공간활용을 짬지게 한다는 것...

이 넓은 도량에서 누구 하나 엉키는 일 없도록
군대 못지 않은 1~2분 간격의 체계가 있다는 것...

무엇 보다도, 하룻 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신심(信心)이 돋는 그 뭔가가 있다는 것...

사람 사는 모습 그대로지만 "친소의 정(부모 형제로
대표할 수 있는 인연과 인간 사이의 정을 뜻하는
말입니다)"을 끊고 대장부로서  한 평생 인간사의
진리를 찾아 실현하겠다는 스님들의 의지에,

찾아오시는 여러 불자님들,  많은 응원 해 주세요!!

(가람지기 / 운문사 홈페이지에서...)



#22

극락교(極樂橋)

극락교 아래 이목소의 전설을 아시나요?

'이목은 절 곁의 작은 못에 살면서 법화에 게으르지 않았는데
어느 해에 날이 몹시 가물어 채소들이 모두 말라죽으므로
보양은 이목에게 부탁하여 비를 내리게 하니 흡족히 해갈이
되었다. 그런데 천제께서 하 늘의 일을 무단히 가로챈 이목을
죽이라고 천사를 내려보냈다. 이목은 보양에게 달려와 구원을
요청하였 다. 보양은 이목을 마루 아래 숨겨두었는데 천사가
물에 내려와 이목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보양은 손가 락으로
뜰 앞의 배나무를 가리키며 이목이라고 하였다. 이에 천사는
배나무에 벼락을 내리치고 다시 하 늘로 올라갔다. 이 때문에
배나무는 거의 죽어가게 되었는데 이목이 어루만지매 다시
청정해졌다. 그 나무가 근년에 넘어졌다. 어떤 사람이
그 나무로 빗장을 만들어 선법당과 식당에 설치했다.
그 자루에는 명 이 새겨 있다.' 지금 운문사 극락교 아래에
있는 이목소는 냇돌이 구르고 굴러 소의 자취를 잃어간다.
10년전만하여도 짙은 초록색을 발하는 깊은 못이었다.
운문사 학인스님들은 밤낮으로 이목소 앞에서 세수를 한다.
한겨울에도 세벽 3시면 어김없이 이목소 개울로 나와 얼음을
깨고 낯을 씻는다. 조석으로 몸을 같이하는 이 개울에 그런
전설이 있고 없음에는 정서적 차이가 크게 나는 것이다.
그냥 세수터라 했을 그 자리가 이목 소로 된 것이다. 



#23.

서점 뒤로 튀어 나온 바위산 아래 "북대암"이 보인다!
(제④편에서 4대 암자와 문수선원에 대하여 살펴본다)



#24.

도량석(道場釋)

새벽 3시반, 이 세상은 모두 잠들었어도 운문사는 깨어납니다.
바로 새벽 예불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어두컴컴했던 경내에
작은 불빛이 하나 둘씩 켜지면, 범종루위에서 법고와 범종들
사물이 울리면서 세상 만물의 영혼을 깨우기 시작합니다.




#25.

"운문사의 아름다움 중에  또 하나가 바로 250명의 학승들이
기러기떼처럼 줄지어  드리는 운문사 새벽예불이다 . 250명의
낭랑한 목소리가 무반주 여성합창으로 금당안에 가득찰 때 
그 자체가 한 편의 장엄한 예술이다" 라고 한다.

(운문사의 새벽예불이 주는 감동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감동하고
칭송한 바 있습니다. 청명한 새벽기운을 물리치며 퍼지는 예불
소리는 가슴 한가운데로부터 조용히 울리어 몸 구석구석으로 퍼지고,
딱히 죄지은 것도 없는데 스스로 몸가짐이 가지런해 지며,
경건해집니다...)




#26.

청도 운문사에서 우리가 꼭 놓치지 않고 보아야  할것이 하나
있다 그것이 바로 운문사의 부엌이다.  불교가  이땅에 들어
오기전 우리에게는 하늘에  별을 점치던 칠성신앙과 바다와
강물을 믿던 용왕신앙 숲이나 산을 숭배하던 산신신앙  그리고
부엌을 지키는 *조왕신[竈王神]이 있었다.  그런데  저 조왕신이
어떻게  사찰의 부엌에 의젓하게 자리잡고 있을까 궁금하지
않으신지요?




#27.

청도 운문사 강원에서는 새 학기가 시작하면  지난해의
소금단지에서 소금을 꺼내서 새로 소금을 묻습니다.
화마(火魔)를 물리치기 위한 오랜 벽사의 풍습입니다.

작갑전을 비롯해 주요 전각 앞에도 산중기도 회향날에
맞추어 소금을 하얗게 뿌립니다.

소금을 뿌림으로 해서 비로소 운문사는 화마가 범접할
수 없는 해인(海印)의 절이 되는 것입니다.

소금은 바닷물로 만들고, 바다를 상징하는 벽사물입니다.
 



#28.

하루일과




#28 - ①



#28 - ②



#28 - ③



#28 - ④



#28 - ⑤



#28 - ⑥



#28 - ⑦



#28 - ⑧


#29.

대중울력




#29 - ① 



#29 - ②  



#29 - ③ 



#29 - ④



#29 - ⑤ 



# 29 - ⑥  



#29 - ⑦ 



#29 - ⑧



#30.

연중행사.




#30 - ①



#30 - ②



#30 - ③



#30 - ④



#30 - ⑤



#30 - ⑥



#30 - ⑦






#31.

"사리암에 처음가면 신기한 것을 볼 수가 있다?"

사리암 맨 아래층에 다달으면 먼저 온 사람들이 아래를
내려다 보면서 손바닥에 땅콩을 올려놓고 깐돌아 깐돌아를
부른다. 깐돌이가 뭘까 조금 있으면 답이 나오는데,
신기하게도 산새가 와서 손바닥 위에 있는 땅콩을 의심없이
물고 간다. 언제부터인지 이곳에 살고 있는 비구니 스님들이
길을 들여놓아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미루어 보건데 옛 스님들이 호랑이를 타고 다녔다는 일화도
가능할 법하다...


운문사, 사리암을 방문 하실 때...


현재 운문사는 주변의 자연생태계 보존을 위해 자연휴식년제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운문사 주차장부터 사리암 올라가시는 길까지
걸어 올라가시는 이유로 등산을 하시거나 주변자연환경을 파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문화재 관람료를 내지 않고 주위의 논이나 밭으로 돌아서
올라가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일부 보행을 통제
하고 있슴을 양해 바랍니다.

운문사를 방문하시거나 사리암에 오실 경우에는 신도증(조계종
또는 사리암신도증)을 발급받아 오시거나 신도증이 없으실
경우는 운문사 종무소에서 확인증을 발급 받으셔야 합니다.
문의사항은 운문사 종무소 (372-8800)로 문의 하십시요...
날마다 좋은 날 되십시요...


(운문사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서...)





#32.

앞에서 언급하였던 "북대암(北帶庵)"에서 찍은
청도 운문사 경내 전경(全景) /  *(가져온 자료)




#33.

미국(美國)의  땅덩어리의 형상을 닮은 청도군는 청도읍의 동쪽 끝자락 곰티재를
기준하여 동쪽을 산동(山東: 매전면. 금천면. 운문면), 서쪽을 산서(山西: 풍각면.
각북면.각남면.이서면)로 나누어 부르는데 예전의 삶의 질은 청도군청이 있는
읍(邑)과 대구시가 가깝고 너른 들판이 있어 인구밀도가 높은 산서방면이 조금
앞섰다. 산동의 3개면에서는 금천면 소재지인 동곡(리)이 가장 크고, 운문면
소재지인 대천(리)은 운문댐이 조성되며 수몰된 면소재지와  인근의 동리에서 
집단으로 이주하여 새롭게 태어난 곳으로 시골의 면지역 중에서는 어느곳보다도
일찍히 깔끔하게 단장된 곳이다.  국도 20호가 경주를 출발하여 "경주- 건천읍,
경주-산내면(지도상의 운문댐"ㅅ" 형상의 꼭대기 지점은 바로 산내면과 연결됨),
청도- 운문면, 금천면, 매전면, 청도읍, 화양읍, 각낙면, 지도상의 서쪽 끝자락인
고추가 그려진 풍각면을 경유하여 창녕으로 연결이 된다.

내가 주로 이용하는 도로가 경남 고성을 출발하여 중부내륙고속도로 창녕나들목
(IC)으로 나와서(우측으로 빠져서 약 8키로만 나아가면 오랜 역사를 갖은 우포늪에
닿을 수 가 있다) 청도로 연결되는 국도 20호선이다. 청도의 서쪽 끝자락인 풍각
(이웃한 이서면 신촌리가 나의 고향이다.)과 동쪽의 끝자락인 운문면의 운문사까지는
제법 떨어져 있으며(50키로 이상 ) 청도 인근의  경산시와  울산시에서 운문사
가는 길이 더욱 더  가깝다...



#34.

마음을 담아 걸었던 그 길을,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 때 
마음이 통하는 분들과 다시 한번 더 걷고 싶습니다......



#35.


♤ 자가운전;

ㆍ 대구 - 경산 - 동곡 - 운문사 (1시간 30분)
ㆍ 청도 - 매전 - 동곡 - 운문사 (1시간)
ㆍ 경주(건천I.C) - 산내 - 운문댐(대천) -
                         운문사 (1시간 소요)
ㆍ 부산 - 언양(상북면) - 신원리 - 운문사
                               (1시간 30분 소요)

♤ 버스이용;

ㆍ대구(남부 터미널) - 운문사행(오전 7시 40분부터
              오후 7시 경까지 1시간 간격)
ㆍ남부터미널에서 운문사까지는 1시간 20분
ㆍ청도(시외버스 터미널) - 운문사행(1일 10회 운행,
         1시간 간격 : 1시간이 소요된다)



#36.

#. 대적광전(大寂光殿): 비로전(毘蘆殿): 대광명전(大光明展)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을 삼신(三身)이라고 한다. 법신은
보신·화신의 근본이 되는 몸. 그래서 법신불을 ‘청정법신 비로자나(毘盧
遮那, Vairocana)불’이라고 한다. 보신은 과보신으로 수도의 결과로
이루어진 몸이라는 뜻이다. 화신은 응화신(應化身)으로 역사적인 현재의
이 육신을 뜻한다. 그러므로 법보화(法報化)가 별개의 몸인 동시에
한 몸이기도 하다.

청정한 법신인 비로자나불은 항상 고요와 빛으로 충만毘盧遮那한 상적
광토(常寂光土)에서 법을 설한다고 화엄경에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대적
광전이나 비로전의 주불(主佛)은 역사적인 존재인 석가모니불이 아니고
법신불인 비로자나불로 되어있다. 좌우로 보신불인 노사나불(盧舍那佛)과
화신불인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경우도 있고 문수와 보현 두 보살을 모시기도
한다. 문수는 지혜를 상징한 보살이고 보현은 덕행을 상징한 보살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청정한 법신 안에는 지혜와 덕행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항상 고요와 빛으로 충만한 그 상적광토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멀리 찾아나설 것도 없이 본래부터 청정한 불성인 우리들의 마음이 곧
그곳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심성(心性) 안에 지혜와 덕성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이 심성을 일깨우면서
사는 일이다. 비로자나는 광명을 두루 비춘다는 뜻이다. 본래 청정한
우리 심성은 고요와 빛으로 온 법계를 비추고 있다는 것. 그래서 비로전을
일명 대광명전(大光明殿)이라고도 한다.



#. 반야용선

반야용선(般若龍船)이란, 어지러운 세상을 넘어 피안의 극락정토에 갈 때
탄다는 배를 말한다. 반야(般若)란 모든 미혹(迷惑)을 끊고 진정한 깨달음을
얻는 힘이나 모든 법을 통달하여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을
뜻한다. 반야용선도는 망자를 위해 걸었던 그림으로, 그림에는 보통 좌로부터
극락의 주인인 아미타부처, 극락으로 인도하는 깃발을 든 인로왕보살, 반야
용선과 망자가 표현되며 슬픔에 젖은 유가족이 그려지기도 한다. 
즉 반야용선이 그려진 것은 망자가 아미타 부처가 계시는 서방극락정토에
왕생(往生)하기를 염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도량석(道場釋)

道場釋(도량석)은 절에서 매일 새벽에 행하는 의식으로 起床時間(기상시간)을
알리고 도량을 結界(결계)하여 淸淨(청정)히 하는 儀式(의식)이다.

執典者(집전자)는 먼저 일어나 大雄殿(대웅전)에 향과 촛불을 켜고 三拜(삼배)를
한 뒤 法堂(법당) 앞으로 나와 목탁을 낮은 소리로부터 점차 높은 소리로 올렸다
내리는 것을 세 차례하고 도량을 돌면서 經文(경문)을 誦(송)한다.

道場釋 經文(도량석 경문)은 특별히 있는 것은 아니며 一般的(일반적)으로
千手經(천수경) ․ 解脫呪(해탈주) ․ 四大呪(사대주) ․ 略纂偈(약찬게) ․ 法性偈
(법성게) 등을 念誦(염송)한다.

   禪房(선방)에서는 조용히 목탁만 울려 잠을 깨우는 경향도 있고
‘證道歌(증도가)’'나 『金剛經(금강경)』을 많이 읽는다.

法堂(법당)을 돌아 念佛(염불)을 마칠 즈음에는 法堂 正面(법당
정면)에 이르러 목탁을 세 번 내려치고 마친다.

절 안의 大衆(대중)들은 道場釋(도량석)을 듣고 모두 일어나 禮佛
準備(예불 준비)를 한다.

하루 일과 중 도량내의 最初儀式(최초의식)으로 도량을 맑게 하고
도량 안팎의 護法神將(호법신장)이 禮佛心(예불심)을 일으키게
되어 모든 雜鬼(잡귀)를 몰아내며 주위의 짐승과 微物(미물)에
이르기까지 被害(피해)를 입지 않도록 安全(안전)한 場所(장소)로
들어가게 하는 慈悲(자비)스러운 뜻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새벽 3시에 道場釋(도량석)을 한다. 인도에서는
처음에 석장을 울리며 돌았고 나중에는 방울, 요령 등이 使用(사용)
되다가 현재는 목탁[木濁]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 조왕신(竈王神).

조왕신은 부엌을 수호하는 신이며, 그 기원은 불을 다루는 데서 유래
한 것 같다. 이는 인류가 보편적으로 원시시대이래 불을 신성시하여
숭배한 것과도 통한다. 부엌은 불을 사용하여 음식을 만드는 곳이기도
하고, 음식을 만들 때 자연 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불과 물을 동시에
사용하는 곳이다. 그래서 때로는 조왕신이 물로 상징되기도 한다.
그러나 조왕신은 원칙적으로 불을 모시는 신앙이다. 불씨를 신성시하며
이사를 갈 때 불을 꺼뜨리지 않고 가지고 가는 풍습이나, 이사간 집에
성냥을 가지고 가는 풍습은 모두 불을 숭배하던 신앙에서 유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왕신을 부엌 부뚜막에 물을 담은 종지를 놓아 모시기도 하는데 이를
'조왕보시기' 또는 '조왕중발'이라 한다. 강원도 화전민촌에서는 부뚜
막에 불씨를 보호하는 곳을 만들어두는데 이것을 '화투'또는'화티'라
하여 여기에 불을 꺼뜨리지 않도록 하는 습관이 있다.
부엌의 벽에 백지를 붙여 조왕신을 모시는 지방도 있고, 모시는 형태가
다양하기는 하지만 모두 불씨를 중요시하는 신앙이 복합되어 있다. 
조왕신에게 물을 바치는 것은 불을 끄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물과 불을
동시에 다루는 것에서 생긴 것이라 믿어진다. 부엌은 물과 불을 다루는
곳이고, 따라서 정화(淨化)하는 힘도 있어서 초상집에 다녀오는 길에
먼저 부엌에 들르기도 있다.
부엌을 관할하는 조왕신을 여신으로 간주하여 '조왕각시'또는'조왕할
망'이라고도 부른다. 조왕신은 집안을 보호한다고 하며, 영동신이 부엌에
일시 강림한다는 신앙이 겹쳐지고 또 조상신과 관련이 있는 경우도
있으나 원칙적으로 조왕신은 부엌의 불씨를 신앙하는 화신신앙(火神
信仰)에서 온 것이다.
불교에서는 황신(荒神)을 조왕신이라 하였고, 중국에서는 염제(炎帝)를
조왕신으로 보고 부인과 여섯 딸이 있다고 하며, 또 8월 3일이 생일이라고
까지 인격을 가진 신으로 간주하였다. 또, 조왕신에 제사를 지내고 신앙적
의례 등을 하는 점에서 볼 때 얼마나 중요한 신인지를 알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러한 뚜렷한 신격을 잘 알 수 없고 다만 제주도 무속
신화인 '문전본풀이'에서 대문신(大門神)인 남선비의 본처가 조왕신이고,
첩이 변소신이다. 그래서 본처인 부엌신과 첩인 변소신과는 사이가 좋지
않아서 서로 내왕하면 탈이 난다고 하는 신화적 설명이 있다. 이것은
부엌과 변소의 위생상 대립을 신화적으로 설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나라 조왕신앙에는 주부들이 부지런히 일함으로써 가족이 잘 되고,
특히 집을 떠나 객지에 있는 가족을 수호한다는 신앙이 있다.



#. 가람(伽藍) 이야기...

산스크리트 saṃghārāma를 음역한 승가람마(僧伽藍摩)·승가람
(僧伽藍)의 준말. 승원(僧院)·승원(僧園)이라고도 한다.

본래 의미는 중원(衆園)으로 여러 승려들이 모여 불도를 닦는
숲 등의 장소를 가리켰는데 나중에는 사원의 건축물을 일컫게
되었다. 절은 대개 7종의 건물을 갖추어야 하나의 가람으로
완성되는데 이것을 칠당가람(七堂伽藍)이라 한다. 그러나  반드시
7종으로만 제한되지는 않으며 약간의 가감(加減)이 있을 수 있다.
칠당은 보통 사람의 몸, 즉 머리[頂]·코[鼻]·입[口]·눈[兩眼]·귀
[兩耳] 또는 머리[頭]·마음[心]·음부[陰部]·팔[兩手]·다리[兩脚]에
비유되기도 한다. 칠당의 배치와 명칭은 시대·종파에 따라 다르다.
일반적으로 교종사찰(敎宗寺刹)은 탑(塔)·금당(金堂)·강당(講堂)·
종루(鐘樓)·장경루(藏經樓)·승방(僧房)·식당(食堂)으로 구성되고,
선종사찰(禪宗寺刹)은 불전(佛殿)·법당(法堂)·승당(僧堂)·고방(庫
房)·산문(山門)·서정(西淨)·욕실(浴室)로 구성된다.

중국어를 들여다 보면,  한자 본래의 뜻글자가 아닌 타국에서
전래된 문물이나 지명 같은 것은 차음(借音)하여 음역한 것이
대다수이다. 한자를 쓰면 고상한 생각이 드는 것은 절대적으로
아니다!  이젠 "가람"이란 겁데기 말 대신에 "절집"이라는 말을
사용하여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 현재의 운문사 ;

해방이후 제1세 김상명 스님에서 제4세 박상웅스님까지 잠시 대처승이
거주하였다. (개신교 신자였던 고 이승만 대통령은 불교정화 운동 기치
아래 대처승들을 많이 핍박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1950년대 교단정화 이후 비구니 정금광 스님이 1955년 초대 주지로
취임하여 제8차 보수.중창하였다.

이후 2.3대 유수인, 4대 배묘전 , 5대 이태구, 6대 안혜운, 7대 위혜안
스님을 거쳐 8대부터 12대까지(1977~1998) 전명성 스님이 운문사 주지와
학장을 겸임하면서 제9차 중창불사를 이룩, 대웅보전과 요사 등 29동을
신축하고, 만세루 등 기타 전각들을 중수하는 등 명실공히 대가람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이어 1998년부터 제13대 주지로 송혜은 스님이
부임하면서 선원을 신축하여 교와 선을 아울러 익힐 수 있는 도량으로
가꾸었다.

2002년부터 제14대 주지로 고흥륜 강사스님이 부임하여 오늘에 이른다.

1997년 비구니 강사를 양성하는 전문 교육기관으로는 최초로 승가대학원이
개설되었다.  1958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된 이래 수많은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87년 승가대학으로 명칭이 바뀌고 전문교과 과정과 교수
진을 확보하여 승가대학의 명분에 걸맞는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대략 260여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이곳에서 경학을 수학하고,
계율을 수지봉행하고 있으며,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 청규를 철저히 실천하고 있다.

운문승가대학은 국내 승가대학 가운데 최대의 규모와 학인수를
자랑하고 있다.


 
허버드 前 주한미국대사 부인이  미국으로 돌아간 뒤  
한국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 하나를 꼽으라고 하자 
"운문사에서 보낸 하룻밤"이었다고 한다' 


#37.
어떤 이는 우리나라에서 아름다운 절집 다섯 곳을, "서산 개심사. 강진 무위사. 부안 내소사. 영주 부석사. 청도 운문사"로 꼽은 이가 있었다... 중국 광저우(廣州) 인근에 호거산 운문사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호랑이가 의연하게 앉아 있는 모습과 흡사하다는 호거산(虎踞山) 자락에 중국보다 더 멋진 청도 운문사(淸道 雲門寺)가 있다.

#38.
"학인스님들도 개구쟁이?" 똑같고, 그 많은 신발 중에서, 쉽게 찾으려다, 보니 부득이하게......
◐ 시간 상 못다 찍은 풍경과 모르고 있던 부족한 자료들은 가보지 않고도 운문사를 이해 하는데 돕기 위해 "운문사(雲 門寺) 홈페이지"에서 참고 하였습니다 ◑


 
 


출처 : 國家와 民族을 ♡하는 老宿者 입니다.
글쓴이 : 老宿者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