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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가

朴正培(박정배) 2010. 8. 24. 16:38

김대중 대통령 생가(전남 신안군 하의도 후광리. 2000.10.16).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축하 플랜카드가 걸려있는 이채로운 풍경^^*


























김대중 대통령 생가 풍경(2000.10.16. 전남 신안군 하의도 후광리).


김대중 대통령 생가 풍경, 화보 전시방 내부가 들여다보인다.






















김대중 대통령 생가 풍경2(전남 신안군 하의도 ⓒ2005 김 준).




김대중 대통령 생가(신안신문, 강윤옥).


김대중 대통령당선자 생가터(1998.01.20~22. 전남 신안군 하의도 후광리).





하의도 지명유래: 연화부수(蓮花浮水).

물 위에 연꽃이 떠있는 모습이라 하여 "하의도"라 부르게 됨.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에 속한 섬 하의도.

목포에서 남서쪽으로 약 35㎞ 지점에 있다.

주위에는 상하태도·능산도·장병도·개도·송도·장좌도 등 많은 섬들이 산재한다.
최고봉은 남쪽 망매산(望梅山 : 150m)이며,
100m 내외의 구릉이 곳곳에 발달해 있지만 비교적 평지가 많다.
해안선은 드나듦이 복잡하며, 남서쪽은 암석해안으로 해식애가 발달해 있다.
섬의 남쪽과 동쪽 해안을 따라 간석지가 길게 펼쳐져 있고,
북쪽으로는 장병도까지 간석지가 이어져 있으며,
곳곳에 방조제를 건설해 염전으로 이용하고 있다.
주민은 농업과 어업을 겸하나 농업에 더 많이 종사하며,
농산물로는 생산량이 가장 많은 고추를 비롯하여
쌀·보리·고구마·콩·참깨·마늘 등을 생산한다.
연근해에서는 조기·병어·숭어·장어·낙지·새우 등이 잡히며, 김·미역 양식이 활발하다.
취락은 평지인 웅곡·도창동·대리·신촌·피촌 마을에 밀집하며, 중심지는 웅곡리이다.
능선을 따라 남북방향으로 도로가 나 있으며, 목포에서 출발하는 정기여객선이 운항된다.
총 대지면적 36.93km(3)에 임야면적 60.7%,경지 30.7%,기타 8.6% 로 구성되어 있다.

법정리 7. 행정리 19. 자연부락 27. 반 57.
인구: 2718. 978세대.

하의도 연혁.

상고시대 - 마한에 속함.
* 삼국시대 - 백제에 속함.
* 고려시대 - 나주목에 속함.
* 조선시대 - 나주목 진도현에 속함.
* 고종 32년(1885) - 지도군에 속함.
* 일제시대1913년 - 무안군에 속함.
* 1969. 1. 1 - 신안군(하의면과 장산면)에 속함.
* 1974.11. 5 - 상하태출장소 신설.
* 1983. 2.15 - 상하태출장소가 신의면으로 분리 승격(장산, 하의, 신의).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 있는 김대중대통령 생가터.
하의도가 세간의 큰 관심을 끌게 된 사건 가운데 하나가
바로 파란과 곡절을 상징하는'인동초, 후광 김대중' 이란 거목을 낳은 고장이라는 것이다.

목포시에서 38㎞ 거리의 남쪽 끝마을 후광리 바닷가에 자리잡고 있으며
1921년 대통령 김대중이 태어나
1936년 하의보통학교 3학년 때까지 어린시절을 보내던 초가집이다.

후광 김대중이 목포북초등학교로 전학오면서 총면적 288㎡의 생가는 헐리고
마늘밭으로 변하여 생가터였음을 알리는 표지판만이 서 있었는데
종친들이 중심이 되어 성금을 모으고 복원 사업을 시작,
대구 노인복지대학노인회에서 120만원을 모금해 보내오기도 하여
집터만 남아있던 생가의 구조물을
어은리마을에 집을 짓고 살던 주민으로부터 다시 집을 사들여,
후광리에 기둥 등 주요목재를 이용하여 대지 746평, 건평 18평의 목조 초가 본체 6칸으로
창고 1동, 화장실 1동 등의 부속채와 헛간 등 원형대로 1999년 9월 60여 년만에 복원하여
신안군에 기증(신안군 향토자료 제23호)하였으며,
신안군에서는 복원된 김대중 대통령 생가를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주변에 화장실 등 기본시설을 갖춰 찾아오는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지난 1992년 대통령 선거 무렵에는 생가 집터가 있는 후광리에 수백명의 국내기자와
외신기자들이 몰려드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으며,
주변에 덕봉강당,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신도해수욕장, 토지항쟁기념비 등의 관광지가 있는 곳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생가가 지금은 옛 모습을 찾게 되었다.




전남 신안군 하의도 토지항쟁비
개 요 :
예로부터 농사를 주업으로 살아온 하의도 사람들에게 토지는 삶의 원천이고 자부심이었는데,
하의도 사람들은 이 땅에 대한 피와 눈물이 맺힌 삼백년에 걸친 통한의역사를 안고 있다.
하의도 농민운동의 역사는 조선시대 선조때 임진왜란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조는 맏 딸 정명공주의 불치병을 치료한 홍계원을 부마로 삼고
하의3도(하의도, 상태도, 하태도) 를 그에게 무토사패(나라에서 받을 토지세를 대신 받음)로 준다.
그러나, 정명공주의 증손자인 홍석보가 죽으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정명공주에게 준 면세전 20결이 그 후손들에게 상속되었는데,
그 후손들은 세섬의 모든 토지에대한 절수권(국가 대신 세금을 받을 권리)을 받았다면서
백성들이 경작하는 모든 토지에서 세금을 받아간 것이다.

백성들은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무모한 일이 되고,
세월이 흘러 홍씨들이 권좌에서 물러나고
1870년 이완용의 아버지 이호준이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자 다시 하의사람들의 진정이 시작된다.
이 감사는 모든 토지에대해 1부에 백미 2되씩만 홍씨들에게 주라고 판결해 주었으며,
이에 대해 하의도 사람들은 송변준의 글씨로 옥도에 송덕비를 세웠다.

이 후 하의도는 1901년 토지지권발급으로 인해 토지가옥 증명규칙을 만들어
모든 부동산의 문서화에 착수하는 과정에서 하의도 토지는 모두 궁토로 간주되어
왕실 재산을 관리하는 내장원 토지로 등재된다.
1905년 일본 조선 통감부는 역둔토 조사사업을 벌이면서
모든 궁토도 역둔토로 통합해 국유화 조치를 취하는데,
이 때 홍씨들은 하의 3도의 토지를 국유화에서 탈루시켜 홍우록의 사유지로 지권을 발급받는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하의도 사람들은
같은 해 6월 각계에 진정서를 내고 즉시 경성지방법원 소송을 제기했다.
홍우록은 일본인과 한국인 무리배들을 하의도에 보내 소작료를 받도록 했으나,
당시 면장 김준열을 비롯한 주민들의 강력한 항의를 받고 철수했다.
이 때 김 면장은 목포에서 몰려온 깡패들에게 맞은 여독으로 10일만에 죽고
문경수씨는 총상을 입기도 했다.
이처럼 하의도 소유권행사가 순조롭지 못했던데다 후손간의 분쟁도 있어
홍우록은 지권을 집안의 홍우승에게 양도해 버렸고,
홍우승은 다시 서울갑부 조병택에게 1만5천원의 값으로 팔아 넘겨 버렸다.
이에 하의도 사람들은 일본인 변호사를 선정해 홍씨들을 상대로 부당 이득반환 및
토지확인 청구소송을 제기해서 1심에서는 패하고 2심에서 승소하였다.

하의도 주민들은 이 사건의 변호를 맡았던 일본인 변호사 '목미호지조' 와
사무원 남만웅의 송덕비를 하의도에 세웠으나,
땅을 지키다 죽은 4명과 형무소살이를 한 31명에 대한 추념비는 하나도 없다.















김대중 대통령 경의선열차.http://cafe.daum.net/DaeJungKim/
김대중 전 대통령 햇볕정책 계승하자/ 다이애나.


♬ 목포의 눈물/꽃구름의 하모니카.♪

출처 : 녹림역학당
글쓴이 : 茂栢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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