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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운문사 & 사리암 다녀오면서...

朴正培(박정배) 2010. 10. 14. 10:54

 

나반존자(那畔尊者)의 기도도량으로 널리 알려진 운문사 사리암(邪離庵)은 경북 청도군 운문사에서 동남향으로 약 4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삿된 것을 여읜다는 뜻인 사리암, 세상에 묻혀 살며 물들여진 온갖 때묻은 것을 떨쳐버리고 일심으로 기도한다면 기도의 감응으로 나반존자님이 던져주는 돌을 받아 쥘 수 있다고 예부터 전해 옵니다.

 

사리암이 창건된 것은 937년(고려 태조 20)입니다. 당시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와 후삼국 통일을 위해 왕건을 도왔던 보량(寶壤)국사가 절을 지은 것이 사리암의 시초입니다. 이후 세인의 이목에서 멀어져 고고한 산중 암자로만 남아 있던 사리암은 1천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1845년(조선 헌종 11) 정암당 효원대사가 중건하고 신파스님이 천태각(天台覺)을 건립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합니다.

 

절에서 전해내려 오는 설화는 옛날에 사리암 이 바위굴에서는 수행하는 사람이 한 명이면 한 사람분의 쌀이, 두 사람이 공부하면 두 사람분의 쌀이 , 열사람이 도를 닦으면 열 사람분의 쌀이 나왔다 하네요. 어느 날 욕심이 생긴 사리암 대중 한 사람이 막대기로 쌀이 나오는 구멍을 들쑤셨는데. 그 후로는 쌀은 나오지 않고 물만 나왔다고 전해 집니다. 

 

또한 조선 고종황제가 심열로 고생하던 중에 청우스님이 사리암에서 백일기도를 주관하였는데, 꿈에 선인이 나타나 임금님의 머리에 침을 꽂아주니 깨끗이 나았다는 효험담도 전해져 옵니다. 지금도 사리암에는 전해 내려오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나반존자에게 의지하는 사람들의 마음인 것입니다.

산신각 입니다 

 

1851년(철종 2) 현재의 나반존자상을 봉안한 후 사리암은 영험있는 나반존자 기도도량으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나반존자는 일명 빈두로존자라 합니다. 16 아라한 중의 한 분으로 흰머리칼과 길다란 눈썹을 하고 계시며, 부처님의 명을 받아 열반에 들지 않고 남인도의 마리산에 있으면서 부처님 열반 후에 미륵불이 출세할 때까지 말세 중생을 제도하려는 대원력을 세우신 존자님이십니다.

 

1977년 비구니 혜은스님이 원주로 부임하여, 1978년 전기 불사를 시작으로 1980년, 前부산 거사림회 회장 이인희 거사의 후원으로 3층의 요사를 신축하였습니다. 1983년 현재의 관음전, 자인실, 정랑 등을 개축하였습니다.

 새로 신축한 법당에는 관세음보살상을 모셨고 천태각에는 나반존자, 그리고 산신각에는 산신이 각각 모셔져 있다. 일년 내내 날씨와는 상관없이 기도하시는 분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운문사 사교과와 사집과에서 다섯 분의 스님이 올라가 기도를 한다 합니다.

 

사분정근 기도를 혼신껏 하고 나오면 마주 보이는 학산이 두 날개쭉지를 너르게 편 채 하나로 뭉쳐져 마음을 푸근히 감싸주니 이 어찌 기도성취를 못하고 힘들여 올라온 아득한 저 길을 차마 내려갈 수 있으리요. 중생들에게 괴로움이 많아서인지 소원이 많아서인지 기도를 하기 위하여 곳곳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곳 입니다.

 

 

 560년(진흥왕 21)에 창건된 것을 608년 원광국사(圓光國師)가, 신라 말기에는 보양국사(寶壤國師)가 중건하였습니다. 1105년(고려 숙종 10) 원진국사(圓眞國師)가 중창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당우 일부가 불탔고, 현재 대웅보전(보물 835)·작압전(鵲鴨殿)·미륵전·오백나한전·금법당(金法堂)·만세루(萬歲樓)·관음전·요사채 등이 있습니다.
경내에는 보물 제193호인 금당 앞 석등, 보물 제208호인 동호(銅壺), 보물 제316호인 원응국사비(圓應國師碑), 보물 제317호인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318호인 사천왕석주(四天王石柱), 보물 제678호인 삼층석탑, 천연기념물 제180호인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가 있습니다

 운문사 경내의 이 탑비는 고려시대 중기의 승려 원응국사(圓鷹國師,1051∼1144)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원응국사는 일찍 출가하여 송나라에 가서 화엄의 뜻을 전하고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워 귀국하였습니다.1109년 선사(禪師)가 되었고, 인종 22년(1144) 운문사에서 93세로 입적하였습니다.비는 비받침(臺坐), 비몸(碑身), 머리돌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받침돌과 머리돌이 없어진 상태입니다.다만 세 쪽으로 잘린 비몸만 복원되어 있습니다.비의 앞면에는 그의 행적이 행서체로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제자들 이름이 해서체로 새겨져있습니다.만들어진 연대는 비가 깨어져 알 수 없으나, 국사가 입적한 다음해 인종이 국사로 명하고, 윤언이에게 글을 짓게 하였다는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대략 1145년 이후로 짐작됩니다.

 

신라시대(新羅時代)에 창건된 운문사(雲門寺)는 여러차례의 중창(重創)을 거쳤는데 현재의 가람은 조선(朝鮮) 숙종(肅宗) 44년(1718)에 있었던 네번째 중창 때의 것입니다. 대웅보전(大雄寶殿)도 이때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기둥 사이의 간격을 넓게 잡아서 같은 규모의 건물보다 큽니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꾸몄습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으로,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다포계 건물들과는 달리 장식으로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앞면에는 꽃무늬를 넣은 문을 달았는데, 특히 가운데 칸은 넓어 5짝 여닫이문을 달았습니다. 안쪽은 큰 기둥을 하나만 세워 넓고 탁 트인 공간을 꾸미고 있습니다. 천장의 가운데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미고 화려하게 채색해 놓았습니다.

 대웅보전 주련 입니다

莫謂慈容難得見 (막위자용난득견) 부처님의  자비로운 모습 뵈옵기 어렵다고 말하지 말라

不離祗園大道場 (불이기원대도량) 기원정사 대도량을 떠나지 않고 계시거늘 

虛空境界豈思量 (허공경계기사량) 허공의 경계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리오

大道淸幽理更長 (대도청유이갱장) 대도는 맑고 깊으며 이치는 영원하도다

 대웅보전 앞에 동·서로 서 있는 이 두 탑은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규모와 양식이 서로 같습니다. 각 층의 기단에 기둥모양을 본떠 새기고, 특히 윗층 기단에는 8부중상(八部衆像)을 새겨 놓았는데 모두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지붕돌은 처마 밑이 수평을 이루며, 밑면의 받침은 5단 입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각 부분들이 차례로 올려져 있는데, 모두 본래의 것들입니다. 기단의 가운데기둥이 아래층 기단에서는 2개이던 것이 윗층 기단에서는 1개로 줄어들고, 표면에 조각을 둔 점 등으로 보아 9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집니다. 기단부가 몹시 부서져 무너지기 직전이던 것을 일제시대에 보수하였다는데 이 때에 팔부중상 등 일부를 새로운 돌로 보충하였다 합니다.

오백전 입니다.

내가 불사를 함에 깊고도 묘한지라.

빈산에 사람 없으나 물은 흐르고 꽃은 핌이라.

전성과 후성이 모두 말로써 가르치니

말은 포곡새(뻐꾹새)와 같으나 뜻은 전하지 못함이로다.

분화는 붉음을 띄우고 향로의 연기 푸르름 스밈이라.

물음도 없고 답함도 없으나 뜻과 같이 자재함이라.

나는 도안으로써 법을 전하는 宗이 되고

너는 원력으로써 법을 두호하는 용이 됨이라.

 사천왕석주는 운문사 작압전(鵲鴨殿)안에 모셔진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의 좌우에 각각 2기씩 모두 4개가 돌기둥처럼 배치되어 있습니다.

원래의 위치는 아니고, 이곳에 세워진 벽돌탑의 1층 탑신 몸돌 4면에 모셔져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모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으며, 머리 뒷쪽으로 둥근 광채를 띤 채 악귀를 발로 밟고 있습니다.

사천왕은 부처를 모시는 단의 사방을 지키기 위해 두는 방위신(方位神)의 성격을 띠는데, 동쪽이 지국천왕(持國天王), 서쪽이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이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이 다문천왕(多聞天王)입니다.

이 4개의 사천왕상 돌기둥은 신체가 큰 반면, 돋을새김을 뚜렷하게 하지 않아 양감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또한 체구도 약해보이고 얼굴 생김새도 부드러운 것으로 보아 시대가 내려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880년에 만들어진 보조선사탑(普照禪師塔) 사천왕상이나 철감선사탑(澈鑑禪師塔) 사천왕상과 비슷하지만, 보다 크고 띠주름도 굵어지는 등 형식화된 면이 있어서 8세기 석굴암의 사천왕상과 비교하여 시대적인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통일신라 후기 또는 후삼국시대인 900년경을 전후해 만들어진 작품으로 짐작된다 합니다.

 관음전 입니다.

백의관음(白衣觀音)은 말없이 말하고

남순동자(南巡童子)는 들음 없이 듣도다

꽃병위에 버들은 항상 여름인데

바위 위의 대나무는 시방의 봄일세.

 

한 떨기 붉은 연꽃 바다위에 떴으니

푸른 파도 깊은 곳에 신통(神通)을 나투시네.

지난밤에 보타락가(寶陀落迦)산의 관세음보살님이

오늘은 도량 안에 강림하셨네.

명부전 입니다.

지장보살님의 크나큰 위신력이여

억겁을 두고 설명해도 다 말하기 어렵도다

잠깐만 보고 듣고 예배하여도

인천(人天)에 이익된 일 무한히 많아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는 운문사의 앞뜰에서 자라고 있으며 높이는 6m, 둘레는 2.9m입니다. 나무의 모습이 낮게 옆으로 퍼지는 모습 때문에 한때 반송(盤松:키가 작고 밑동부터 가지가 옆으로 퍼지는 소나무)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이 나무는 2m 정도의 높이에서 가지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밑으로 처지기 때문에 처진 소나무로 봅니다. 운문사는 1,400년 전에 지었다고 하고 임진왜란(1592) 때 이 나무는 상당히 컸었다하니 나무의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매우 오래된 나무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처진 소나무는 고승(古僧)이 소나무 가지를 꺾어서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스님들은 매년 봄·가을에 뿌리 둘레에 막걸리를 물에 타서 뿌려주는 등 정성을 다하여 가꾸고 있습니다.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는 나무의 모양이 매우 아름답고, 전형적인 처진 소나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며, 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도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만세루 앞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풍경 입니다.

 

 

 

 칠성각 이네요

 별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것은 우리 나라에 한한 것이 아니고 세계 각처에 상당히 보편적입니다.
이러한 천체 신앙이 불교 신앙과도 합쳐져서 사찰 속에 칠성각을 마련하고 칠성신을 모시게 된 것입니다.

칠성각에는 북두칠성을 인격화해서 앞이마에 각기 별을 상징하는 둥근 광채를 나타내고 있는 일곱 사람의 점잖은 남자 그림으로 모시거나 일곱 분의 조상(彫像)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민간에서는 칠성 기도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칠성 기도의 의의
비를 내리는 신으로서 물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인간의 건강과 수명 연장을 관장한다.
특히 어린 아기의 명을 길게하고 건강을 지켜 준다.
재물과, 재능에 관한 것을 관장한다.
산신(産神)과도 관계가 있으며 생남(生男)을 관장한다.
칠성 기도 예절
모든 의식 절차와 예절은 신중 기도와 같다.
다만 칠성기도의 주력(呪力)은 칠원성군(七元星君)이다.
급한 용무가 있거나 절에 잠깐 다녀갈 때는 삼배만 올리고 가도 좋다.
칠성님께 올리는 적당한 시간은 사시 공양 다음이다. 이때만은 기도를 피한다.

운문사 만세루는 세상에서 가장 넓은 곳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이곳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사미니들은 이곳에서 북치는 법을 배운다. 행자들은 이곳에 슬쩍 걸터앉아 다리품을 쉬어갑니다. 때론 메주와 무말랭이가 내걸리고, 삼월삼짇날 즈음이면 막걸리를 24말이나 들이켜고 적당히 취해 오체투지하던 ‘처진소나무’가 날려 보낸 송홧가루도 쌓입니다. 벽이 없으니 바람은 자유롭고, 품이 넓으니 새로 선 대웅전마저 안아버립니다. 운문사 만세루는 세상에서 가장 큰 법당입니다.

출처 : 사리암
글쓴이 : ☞신▒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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