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보공간 ▼/★.그때 그시절

聖雄 李舜臣 將守

朴正培(박정배) 2010. 4. 3. 23:41
"희로애락 감정 숨김없이… '인간 이순신'에 놀라"



충무공 이순신(李舜臣·1545~1598) 장군과 관련된 기존 기록들을 뽑아 필사한 17세기의 문서 ‘충무공유사(忠武公遺事·재조번방지초)’는 지금까지의 ‘난중일기(亂中日記)’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일기 32일치를 담고 있다. ‘충무공유사’의 탈초(脫草·초서로 된 글씨를 풀어 씀)와 완역 작업을 수행한 노승석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대우교수의 번역을 토대로, 새로 발굴된 기록들 중 주요 내용들을 뽑아 소개한다. /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1595년(을미년) 정월 10일

순천 부사(=이순신의 부하 장수인 권준·權俊)도 공사(公私)간의 인사를 하려는 것을 잠시 보류했다가 조금 뒤에 불러들였다. 이들과 함께 좌석에 앉아 술을 권할 때 말이 매우 잔혹하고 참담했다.

順天公私禮, 姑留之, 而有頃招入, 同坐饋酒之際, 言辭極兇慘.

(이번에 발굴된 일기에는 부하 장수인 권준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이순신의 감정이 솔직하게 드러난다. 기존의 ‘난중일기’에선 찾기 어려운 부분이다. 당시는 전선이 교착 상태인 채 강화 회담이 전개되고 있었고,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은 군량 확보에 노력하면서 다시 닥칠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다.)

●정월 12일

삼경(자정쯤)에 꿈을 꾸니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오셔서 분부하시기를 “13일에 회( ·이순신의 맏아들)를 초례(醮禮·전통 혼례)하여 장가보내는데 날이 맞지 않는 것 같구나. 비록 4일 뒤에 보내도 무방하다”고 하셨다. 이에 완전히 평소와도 같은 모습이어서 이를 생각하며 홀로 앉았으니, 그리움에 눈물을 금하기 어려웠다.

三更夢先君來敎, “十三日送醮, 往似有不合. 雖四日送之無妨”爲敎. 完如平日, 懷想獨坐, 戀淚難禁也.

(돌아간 아버지 이정·李貞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기존 ‘난중일기’에는 전쟁 중에도 수시로 사자를 보내 어머니의 안부를 대신 묻게 하는 등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을 적은 부분이 많지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쓴 부분은 거의 없었다.)

●정월 15일

우후(虞候·수군절도사 밑에 두었던 무관직) 이몽구와 여필이 왔다. 이 편에 “이천주(李天柱)씨가 뜻하지 않게 갑자기 죽었다”는 말을 들으니, 경탄함을 이기지 못했다. 천리 밖의 땅에 던져진 사람이 만나보지도 못하고 갑자기 죽으니 더욱 애통과 슬픔이 심했다.

虞候李夢龜及汝弼來, 聞李天柱氏, 不意暴逝云. 不勝驚嘆, 千里投人, 不見而奄逝, 尤極痛悼.

(‘이천주’란 인물은 이순신의 지인으로 추정된다. 전란 중 벗을 잃은 애절한 심정을 표현했다.)

●정월 27일

오늘이 바로 (맏아들) 회( )가 혼례를 올리는 날이니, 걱정하는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장흥 부사가 술을 가지고 왔다. 그의 서울에 있는 첩들을 자기의 관부(官府)에 거느리고 왔다고 하니, 더욱 놀랍다.

乃 奠雁之日, 心慮如何? 長興佩酒來, 其京妾亦率來于其府云, 尤可駭也.

(전란 중에 혼례를 올리는 아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당시 관원들의 행태를 기록했다.)

●2월 9일

꿈을 꾸니 서남방 사이에 붉고 푸른 용이 한 쪽에 걸렸는데, 그 형상이 굴곡져서 내가 호로 보다가 이를 가리키며 남들도 보게 했지만, 남들은 볼 수 없었다. 머리를 돌린 사이에 벽 사이로 들어와 그림 용이 돼 있었고, 내가 한참 동안 어루만지며 완상하는데 그 빛과 형상이 움직이니 특이하고 웅장하다 할 만 했다.

夢西南間, 赤靑龍掛在一方, 其形屈曲, 余獨觀之, 指而使人見之, 人不能見. 回首之間 來入壁間, 因爲畵龍, 吾撫玩移時, 其色形動搖, 可謂奇偉.

●3월 24일

(전라)우수사(右水使=이억기)는 앉을 대청을 개수(改修)해 세우는 것을 나쁘게 여기고 헛소리를 많이 하며 보고해 왔다. 매우 놀랍다.

右水使以坐廳改立爲惡, 多費辭報來, 可愕可愕.

(‘우수사’는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이던 시절 함께 해전에 참가해 전공을 세웠고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했다. 새로 발굴된 부분에서 이순신은 세 번에 걸쳐 이억기에 대해 못마땅한 심정을 적었는데, 역시 기존 ‘난중일기’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부분이다.)

●4월 30일

아침에 원수(元帥=도원수 권율·權慄)의 계본(啓本·임금에게 제출하는 문서 양식)과 기(奇)·이(李)씨 등 두 사람의 공초(供招·죄인의 진술)한 초안을 보니 원수가 근거 없이 망령되게 고한 일들이 매우 많았다. 반드시 실수에 대한 문책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데도 원수의 지위에 둘 수 있는 것인가. 괴이하다.

朝見元帥啓本及奇李兩人供草, 則元師多有無根妄啓之事, 必有失宜之責. 如是而可置元帥之任乎! 可怪.

(무척 당혹스런 기록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전체를 통솔했던 도원수는 다름아닌 ‘행주대첩의 영웅’ 권율 장군이었다. 그는 당시 이순신 장군의 상관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각각 육군과 수군의 총사령관이었던 권율 장군과 이순신 장군 사이에 이와 같은 갈등이 있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순신의 일기가 대단히 솔직한 기록이었음을 알 수 있다.)

●7월 1일

내일은 아버지의 생신인데, 슬픔과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

明日乃父親辰日, 悲戀懷想, 不覺涕下.

●8월 22일

강을 건너 주인집에 갔다가 그 길로 체찰사(體察使)의 하처(下處·임시 숙소)로 가니 먼저 사천현에 와서 자고 있었기 때문에 맞이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고 변명했다. 우습다.

渡江入主人家, 因到體察下處, 則以先到泗川縣宿, 而不爲迎命爲言, 可笑.

(기존 ‘난중일기’에는 이 내용의 앞부분에 ‘오후에 진주 남강가에 이르니 체찰사가 이미 진주에 들어왔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체찰사는 비상시에 임시로 지방에 파견해 군대를 지휘 통솔하는 역할을 맡은 관직이다. 고위 관료의 행태를 비웃는 자세가 보인다.)

●10월 3일

오늘은 (맏아들) 회( )의 생일이다. 그래서 술과 음식을 갖춰 주도록 예방(禮房)에 당부했다.

乃 生日, 故酒食備給事, 言及禮房.

●10월 21일

정사립(鄭思立·이순신의 비장)을 통해 들으니 “경상수백(慶尙水伯=권준)이 모함하는 말을 거짓으로 꾸미는데 내키는 대로 문서를 작성하고, 문서로 적게 되면 오로지 알려지지 않게 했다”고 했다. 매우 놀랍다. 권 수사의 사람됨이 어찌하여 그처럼 거짓되고 망령된 것인가?

因思立, 聞“慶水伯飾誣陷辭. 倚指成文之, 而文之則專不聞”之云. 可駭可駭! 權水之爲人, 何如是誣妄耶?

●10월 28일

초경(밤 8시쯤)에 거센 바람과 폭풍우가 크게 일었다. 이경(10시쯤)에 우레가 치고 비가 와서 여름철과 같으니 변괴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初更狂風驟雨大作, 二更雷雨有同夏日, 變怪至此.

●11월 1일

조정에서 보낸 편지와 원흉(元兇·경상우수사 원균을 매우 낮춰 표현한 것)이 보낸 답장이 지극히 흉악하고 거짓되어 입으로는 말할 수 없었다. 기만하는 말들이 무엇으로도 형상하기 어려우니 하늘과 땅 사이에는 이 원균(元均)처럼 흉패하고 망령된 이가 없을 것이다.

朝報及元兇緘答則極爲兇譎, 口不可道. 欺罔之辭, 有難形狀. 天地間無有如此元之兇妄.

(이순신·원균 두 사람의 관계가 좋지 않았음 기존 ‘난중일기’에서도 드러나지만, 이처럼 커다란 혐오감을 보인 대목은 없었다.)

●11월 4일

우리 나라의 병사들이 쇠잔하고 피폐한데 이를 어찌하랴.

我國兵殘力疲, 奈如之何?

1598년(무술년) 7월 24일

복병장(伏兵將) 녹도 만호 송여종(宋汝悰)이 전선(戰船) 8척을 거두다가 적선 11척을 절이도(折爾島)에서 만나 6척을 통째로 포획하고 적군의 머리 69급(級)을 벴으며 용기를 발휘해 진영에 돌아왔다.

伏兵將鹿島萬戶宋汝悰, 斂戰船八隻, 遇賊舡十一隻于折爾島, 全捕六隻, 斬首六十九級, 賈勇還陣.

(전쟁 막바지에 조선 수군이 거둔 승리인 ‘절이도 해전’에 대한 기록이다. 절이도는 지금의 전남 거금도다. 이 승전은 지금까지 ‘선조실록’과 이순신의 조카 이분의 ‘행록’ 등에 단편적으로 등장했을 뿐 정작 ‘난중일기’에는 그 내용이 없었다.)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 모바일 조선일보 바로가기] [☞ 조선일보 구독하기] [☞ 스크린신문 다운로드]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희로애락 감정 숨김없이… '인간 이순신'에 놀라"

"《충무공유사(忠武公遺事)》를 번역하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난중일기(亂中日記)》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내용들이 있다는 것만은 아니었어요. 충무공도 보통사람들처럼 희로애락의 감정을 느끼는 '인간'이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난중일기》에서 누락됐던 32일치의 일기 내용〈본지 2일자 A1·A10면 보도〉을 밝혀낸 노승석(盧承奭·39)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대우교수는 여전히 상기된 얼굴이었다. 400여년 만에 세상에 공개된 일기는 돌아간 아버지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 전란을 치르면서도 흐트러짐이 없는 강직한 면모, 백성과 군사들을 아끼는 자상함이 잘 드러나 있다.

본지 단독 보도 직후 문화재청의 긴급 브리핑에 모습을 드러낸 노 교수를 보고 사람들은 다시 한번 놀랐다. 암호문과도 같은 초서(草書)의 내용을 모두 해독한 사람이 백발의 한학자가 아니라 30대의 젊은 학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 《난중일기》에 관한 한 국내 최고 수준의 전문가다. 성균관대 한문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던 지난 2004년 35세의 나이로 《난중일기》의 13만자(字) 전편(全篇)을 DB(데이터베이스)화하는 데 성공했고, 2005년에는 누락되거나 잘못된 글자를 모두 바로잡은 《난중일기》의 첫 완역본을 냈다. 이때 바로잡은 글자만 150자(字)가 넘는다.



그는 청명 임창순(任昌淳·1914~1999) 선생과 동문수학했던 부친 노상구(盧相九)씨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한학을 접하며 자랐다.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32일치의 일기가 실린 문서가 다름아닌 현충사 소장 《충무공유사》였고, 더구나 책 제목도 '재조번방지초(再造藩邦志抄)'라고 잘못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이 뜻밖이다.

"등잔 밑이 어두운 격이었다. 자료 번역을 위해《충무공유사》를 판독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그런 부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직도 초서로 쓰여진 우리 문서들 중 대다수가 밝혀지지 않은 진실을 묵묵히 담고 있는 셈이다."

―새로 밝혀진 일기 내용에 대해 '뒷담화 일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충무공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적은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도원수 권율을) 원수의 지위에 둘 수 있는 것인가. 괴이하다.' '하늘과 땅 사이에 원균처럼 흉패하고 망령된 이가 없을 것'이라는 부분들은 후세의 우리로서는 대단히 당혹스러운데….

"남에게 보여주려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적은 부분이라 그럴 것이다. 이 부분이 나중에 《이충무공전서》에서 빠진 것도 대단히 민감한 내용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인간 이순신'이 달랐던 점은 그 희로애락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내면에서 승화시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는 데 있다. 그것이 위인(偉人)과 범인(凡人)의 차이일 것이다."

―《난중일기》의 판본이 복잡하다는 것도 일반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부분이다.

"'난중일기'라는 제목은 1795년 정조 임금의 명으로 《이충무공전서》를 간행할 당시 편의상 붙인 것이다. 원래는 연도별로 〈임진일기〉 〈계사일기〉라는 제목이 붙어 있을 뿐이었다. 〈을미일기〉의 친필 초고본이 모두 유실돼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내용만 전해졌다. 새로 밝혀진 일기 32일치 중 29일치가 〈을미일기〉인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존 초고본에 없는 병신년(1596)과 무술년(1598)의 일기 3일치는 어떻게 된 것인가?

"충무공은 전란중에 일기를 적을 때 경황이 없어 대충 써 놓고는 나중에 다시 정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유일기〉의 경우 다시 정리한 〈속 정유일기〉가 따로 있을 정도다. 그 3일치는 충무공이 비망록 형식으로 따로 적어 놓았으나 지금은 없어진 부분으로 보인다."

―지난해 7월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전문위원 겸 대우교수가 됐다. 무슨 활동을 하고 있나?

"《충무공유사》를 비롯한 《난중일기》의 이본(異本)들을 번역하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충무공 관련 문헌사료들을 정리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번 학기부터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난중일기 강독'이란 강의를 개설했다. 《난중일기》를 텍스트로 삼아 충무공의 리더십을 가르치는 것인데, 학생들이 110여 명이나 수강하고 있어 자리가 부족할 지경이다. 이번에 새로 나온 자료를 바탕으로 다시 《난중일기》의 정본(定本)을 만들 계획이다."

 

 

//

     

    명나라일본의 장수들이 본 이순신 장군

     

     


     

     

    왜 이순신장군은 혁명이 아닌 죽음을 택하였는가? 

     


    꽤 긴 글입니다.


    느긋한 마음으로 커피 한 잔과 함께 차분히 읽어보셨으면 하네요.

    주먹을 불끈불끈 쥐게 하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보다가 이런 훌륭한 역사는 꼭 함께 봤으면 해서 글을 올립니다.

    우리 나라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분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이순신장군과 관련된 글입니다.

    일본 장수들이 본 이순신,

    명나라 장수들이 본 이순신,

    그리고 왜 이순신은 혁명이 아닌 죽음을 택하였는가?

    아래의 이야기는 이 세 가지의 장(Ⅲ Chapter)으로 나눠집니다.


    적군의 장수였음에도 극찬을 받는 이순신 장군에 무한한 감동을 느끼며,

    또 반면에 적군의 장수에게 이렇게 객관적이고 논리적으로 접근하고

    존경심을 표현할 줄 아는 일본과 중국의 식견에 무서움을 느낍니다.

    사실 전 역사상 최악의 임금 중 한 명이 선조라고 생각하는데,
    군사와 민심, 천심까지 다 가지고 있던 이순신 장군이 왜 혁명을 일으키지 않고

    죽음을 택했을까 하는 의문을 품어본 적이 있다면

    이 글을 보고 의문을 좀 풀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을 제대로 아는것이 우리 국민들의 도리일 것입니다.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1990년~1998년.... 약 8년에 걸쳐서 중국 학자 5명과 일본 학자 7명 또 그외에

    일본사관학교(육사, 해사) 장교 및 중국 인민박물관장, 한국 해군사관학교 장교들의
    도움을 받아 총 32권으로 발간된 책입니다.

    이 책은 크게 이순신장군 생애를 다룬(이순신은 누구인가?) 5권,
    일본장수가 본 이순신 2권,
    명나라가 본 이순신1권,
    1500~1600년 당시의 조선과 일본 그리고 명나라 10권,
    이순신과 임진왜란 5권,
    토요토미 대 이순신 2권,
    이렇게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한 내용이 25권,
    그리고 역사적 근거로 가설을 붙인 내용이 7권

    이렇게 32권으로 구성되어진 책입니다.

    이 중에서 좀 특이한 것은 일본 장수가 본 이순신장군에 관한 책이

    2권이나 된다는것인데....
    이순신장군께서 난중일기를 남기셨 듯

    일본 장수들도 나름대로 자신들의 기록을 남긴 서적들이 꽤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와키자카와 도도 등.....

    특히 이 두사람은 이순신 장군님에 대한 기록이 유별나다고 합니다.

    아마 같은 수군이라서 그랬었겠지요.


     1. 와키자카가 본 이순신 

    전에 KBS1 역사스페셜에서도 나온 적이 있습니다.
    와키자카 후손들이 매년 이순신장군의 탄생 기념일에 온다는거....
    와키자카가 이순신 장군님을 알게 된 건 '한산도 대첩' 때인데
    와키자카는 우리가 알고있는 것과는 성격이 좀 많이 다르다고 합니다.
    물론 한국에서 바라보는 것과 일본에서 바라보는 건 차이가 있겠지만
    아무튼 와키자카라는 장수는 전형적인 사무라이였는데
    명예를 중요시 하였으며, 차를 좋아하고, 함부로 살생하기 보다는 덕을 베풀어서
    적을 자기수하로 만드는, 뭐랄까.... 그런 묘한 데가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와키자카는 2천의 군사로 약 5~10만명(정확한 설은 없음. 우리 역사에는

    5~6만명이라고 하고 일본 역사에는 8~10만이라고 함) 정도 되는

    조선 육군을 물리친 명장 중의 명장입니다.

       그러한 명장이 듣지도 못한 장수 이순신장군에게 대패를 하였으니

    그 충격은 대단했을 겁니다.


    한 예로 와키자카는 한산도 대첩 이후로 그 충격에 6일을 굶었다고

    본인이 그렇게 기록을 하고 있으니 정말 그 충격은 대단했었나 봅니다.
    식음을 전폐하고 내가 왜졌는지 생각하고 고민하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 번 이긴 그저그런 다른 조선장수 정도였을거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 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몇 일 몇 날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장수로서 나의 직무를 다할 수

    있을런지 의문이 갔다.)

    2천의 군사로 5만이상의 조선군을 물리친 일본의 명장이 이렇게 두려움에
    떨 정도였으니 이후에도 와키자카는 여러 번 이순신 장군님에 대한 본인의 생각과

    조선 수군과 있었던 전투 내용을 상세히 기록 해뒀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와키자카가 쓴 내용에보면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숭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적장이지만 와키자카도 멋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지는 글입니다.
    아마 이러한 이유 때문에 4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후손들이 이순신장군 탄생일 때 오는가 봅니다.

     



     2. 명의 사신이 본 이순신  

    그리고 '운덕' 이라는 명나라의 사신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후일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을 했습니다.

    (하루는 어두운 밤 눈이 몹시 내리고 그 바람이 칼날 같아서 살결을 찢는 듯 하니,

    감히 밖으로 나서지 못하겠더라.

    그러한데 그 속을 통제사 영감이 홀로 지나가니,

    무슨 까닭으로 이 어둡고 추운 바람 속으로 거닐고 있는걸까?

    궁금하던 차에 한 번 따라가 보니 통제사 영감이 가고 있던 곳은

     바로 왜놈이 잡혀있는 현장으로 가는 것 아닌가.

    더욱이 이상하여 더 밟아보니 통제사 영감 손에는 한 권의 책이 있더라.

    밖에서 보니 통제사 영감은 그 왜군에게 명심보감 중 효행편을

    읽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음 날 알아보니 그 왜군의 나이는 15세이더라.

    10세의 어린 나이에 병사가 되어왔음에 이 아이가 포로가 된 후

    이를 딱히 여긴 통제사 영감이 별도로 감싸주었던 것이다.

    10살에 포로가 되었으니 벌써 5년이 되었고 그동안 왜군의 아이는 조선말을 배웠으며
    간간이 통제사 영감이 책을 읽어주기도 했다고한다.

    서로 죽이고 죽이는 전쟁이지만,

    저 두 사람을 보면 누가 어찌 서로를 원수라 하겠는가.

    내가 본 저 두 사람은 조선장수 대 왜군이 아닌 한 아버지와

    그의 아들로 보였으니 통제사 영감이 저러하다면,

    그의 백성을 아끼는 마음을 무엇으로 나타낼 수 있겠는가!)

     

     


     3. 명의 도독 진린이 본 이순신 

    명나라의 황제 신종(만력제)은 조선에서 진린도독으로부터 한 통의 서신을 받는다.

    (황제 폐하 이 곳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오라 하게 하소서.

    신(臣)이 본 이순신은 그 지략이 매우 튀어날 뿐만 아니라

    그 성품과 또한 장수로 지녀야 할 품덕을 고루 지닌 바
    만일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황제 폐하께서 귀히 여기신다면

    우리 명(明)국의 화근인 저 오랑캐(훗날 청나라)를 견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저 오랑캐의 땅 모두를 우리의 명(明)국으로 귀속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혹여 황제 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의 장수됨을 걱정하신다면

    신(臣)이 간청하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은 전란이 일어나고

    수 년 간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음에도
    조선의 국왕은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며 또한 조정 대신들 또한

    이순신의 공적에 질투를 하여 수 없이 이간질과 모함을 하였으며,

    급기야는 통제사의 충의를 의심하여 결국에는

    그를 조선 수군 통제사 지위를 빼앗아 백의종군에 임하게 하였나이다.

    허나 통제사 이순신은 그러한 모함과 멸시에도 굴하지 않고 국왕에게 충의를 보였으니 

    이 어찌 장수가 지녀야 할 가장 큰 덕목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조선 국왕은 원균에게 조선 통제사 지취권을 주었으나 그 원균이
    자만심으로 인하여 수백 척에 달한 함대를 전멸케 하였고 단 10여 척만이 남았으매
    당황한 조선 국왕은 이순신을 다시 불러 조선 수군통제사에게 봉했으나,
    이순신은 단 한 번의 불평 없이 충의를 보여 10여 척의 함대로 수백 척의 왜선을
    통쾌하게 격파하였나이다.

    허나 조선의 국왕과 조정 대신들은 아직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또다시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고 있나이다.
    만일 전란이 끝이 난다면 통제사 이순신의 그 목숨은 바로 풍전등화가 될 것이
    뻔하며, 조정 대신들과 국왕은 반드시 통제사 이순신을 해하려고 할 것입니다.
    황제 폐하 바라옵건대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을 구명해주소서.

    통제사 이순신을 황제 폐하의 신하로 두소서.

    황제 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에게 덕을 베푸신다면
    그는 분명히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황제 폐하께 충(忠)을 다할 것이옵니다.
    부디 통제사 이순신을 거두시어 저 북쪽의 오랑캐를 견제케 하소서).


     


     4. 책의 저자인 쟝웨이링 교수가 본 이순신 

    1990년 3월 하북에서 제 1차 중.일 합동 연구회(이순신)를 가졌다.

    이순신?
    내가 알고있는 이순신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장수였던 것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사실 이 연구회엔 나의 절친한 동료 학자의 권유로 참석하였으며

    그 해에 나는 그저 잠시만 자리에 참석할 생각이었다.
    사실 조선의 역사에 대해선 그다지 큰 관심이 없던 터라,
    나는 그저 일본 교수진들의 말만 들을 뿐
    그러한 내게 작으나마 충격적인 일이 있었다.
    조명이 꺼지고 화면 가득 보여지는 게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거북선이라고 불리는 배였다.
    저런 배가 400여년 전에 있었단 말인가.

    (본것은 처음이었다) 나의 놀라움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일본 학자들은 임진왜란에 대해서 나와는 너무나 다른 시각으로 보고있었다.
    아무리 나라가 다르다지만

    그 시각의 차이는 너무나도 컸던것이다.
    더군다나 그 차이는 중일 간의 차이가 아니라 바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보는 것.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조선이 아닌 이순신이라는 한 인간을 보는 것이었다.
    일본 교수진들은 이 연구회를 '이순신'이라고 이름 붙였다.
    즉 임진왜란 자체를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중심이 되어서

    바라보고 찾고 연구하고 가설을 붙이는 것이엇다.
    이는 우리 중국 어느 누구에게도 연구 해보지 않은 방법이었다.


    나는 그 학술회가 끝나는대로

     일본교수의 도움으로 이순신이란 인물에 대한 책자를 얻을 수 있었다.
    7권으로 이루어진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관한 책이었고,

     나는 그 7권을 단 하루만에 다 읽고 말았으며,

    책을 손에서 놓은 뒤 내게 있어서 가느다란 한숨과 함께
    어디선가 느껴지는 심장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순신....

    참으로 읽으면 읽을수록 수수께끼 같은 인물.
    지금까지 우리 중국 학자들은 임진왜란은 일본의 토요토미가 조선을 침략하였으며,
    조선의 왕 선조는 그들을 막지 못하고 의주로 몽진을 하여 우리 명나라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그로 인해 명나라는 국력을 소비한 나머지 지금의 청에 의해 멸하고 만다.

    이것은 우리 중국과 한국, 북한,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도 

    별 차이 없이 나오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날 연 학술회에선 이 모든 것을 흔들어버리는

    아니 뒤엎는 가설을 내놓은 것이다.
    바로 이순신 이라는 이름으로....

     



     5. 장웨이링 교수가 말하는 우리의 거북선

    1997년 10월.
    한번은 내게 북경대에서 초빙을 받아서 학생들과 토의를 한 적이 있었다.
    주제는 청나라의 멸망에 관해서였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서 가져온 거북선을 가지고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이것이 무언지 아는 사람 있냐고 묻자 250명의 학생 중 단 한 명도

    이것이 무엇인지 안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쩌면 역사학자인 나도 이 거북선을 이순신 인물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처음 보았으니.... 학생들이 모른다고 답하는 건 어쩌면 무리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학생들이 이 거북선을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볼 기회를 주고난 후

     질문을 바꾸어서 왜 청나라가 망할 수 밖에 없었고 

    서양과 일본에게 전쟁에서 질 수 밖에 없었는지 질문을 던져보았다.
    학생들은 각자의 생각에 대해서 발표를 하였으며 모두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다시 질문을 바꾸어서 그렇다면 그 당시 전쟁에서

    여러분이 아는 영웅 중 단 한명만 다시 태어나 청나라를 구할 수 있는

    위인이 누구인가라고 묻자
    학생들의 답변은 내가 예상하고 있던 그대로였다.
    항우, 제갈공명, 손자, 관우 등등
    나는 잠시 창너머를 바라보았고

    한참 동안 내가 강단의 창너머만 바라보자

    이에 이상했는지 학생들은 왜 그러시냐라고 물었다.

    나는 이에 만일 지금 또다시 지금 중국이 청나라처럼 되었고

    여러분들이 말한 영웅이 나타난다 해도 결과는 마찬거지일 거라고

    답해주자 모두들 의아해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손을들며 '그렇다면 교수님께서는

    어떤 위인이 나와야 된다고 생각 하십니까?' 라고 질문을 하였고

     나는 그 질문에 거북선을 다시 한 번 학생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있는 대로 배다.

    지금부터 400년전에 만들어진 전투함.

     이 전투함을 만든 이순신.
    400년 전에 조선과 일본의 전생 시 조선을 구한 이순신장군이야말로

    중국을 구할 유일한 영웅이라고 나는 여러분에 말한다.

    많은 학생들과 같이 참석한 많은 다른 교수들도 의아해 하기 시작하였고
    여기저기서 이순신이 누구냐고 서로 묻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여기서 간단히 임진왜란에 대해서 30분 정도 시간을 내서 이순신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일본과의 전쟁에서의 활약상을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내가 왜 이순신을 선택한지 아느냐고 물었으나

    이 역시 학생 중 단 한 명도 알지 못하였다.

    단지 어느 한 학생이 '교수님 이순신은 해군아닙니까?'
    나는 그 학생의 말이 끝나기 전에 답해주었다.
    바로 해군이기때문에 청나라를 구할 수 있는것이다.
    청나라가 망한 건 아편 탓도있고 황제 탓도 있다. 정치적 이유도 맞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유능한 해군장교가 없었다는것이다.

    조선 수군 장수 이순신은 5000명도 안되는 군사와 50척도 안대는 함대를 이끌고
    40만의 왜군과 1,300대의 일본함대와 맞서 싸워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모두 승리를 이끌어 조선을 구할 수있었다.
    당시 조선은 청국과 같은 처지였다.

    당파싸움에 휩싸여 있었고 병력이라야 5만도 안되는

     그러한 조선을 이순신장군이 지켜낸 것이다.
    그리고 그 승리의 내면에는 바로 이 거북선 전투함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러분들이 말한 영웅들은 모두 육지에서 뛰어난 자들이다.

    그것은 우리 중국 역사에는 세계에 내놓을 만한 수군 장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중국은 대륙국가였다. 하지만 대륙만큼이나 우리 중국은 바다가 넓다.
    그러자 한 학생이 손을 들며

    '교수님 그렇다면 주유가 있지 않읍니까? '라고 말하였고

    나는 그에 질문에 주유는 훌륭한 지휘관이다.

     그러나 주유는 이순신장군과는 격이 다르다.

     주유는 양쯔강에서 활약한 장수지 진정한 해상지휘관은아니다.

    영국을 보라.

     네덜란드를 보라 스페인을 보라.

    그들은나라는 작아도 바다를 가졌기에

    그리고 그바다를 점령하였기에 세계 최고의 국가로 일어설 수 있었다.

    그와 반대로 청나라는 거대한 대륙국가이었지만
    바다를 몰랐기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여기 거북선을 보라.

    누가 이 배가 400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믿겠는가?
    여러분들은 눈을 떠야 할 것이다.

    바다로 바다로 눈을 떠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학생들에게 일본에서 열렸던 임진왜란 모의전쟁에서 만일
    이순신 장군이 일본 장수였다면 당시 명나라는 물론이고

    태국과 베트남 인도네시아까지 일본국에 점령되었다

    라는 결과를 말해주자 모두들 놀라는 눈치였다.

    세계 어느국가도 한 인물의 존재에 따라서 이렇게 역사가 뒤바뀌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한 번 거북선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나는 왜 이순신이 위대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덧붙여 설명 해주었다.
    이 거북선은 내가 여러분에게 이순신 장군이 만들었다고 했으나,

    사실은 그가 직접 만든 것은 아니었다.
    이 거북선은 나대용이라는 사람이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있었기에 거북선을 생각하고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조선수군은 인진왜란 1년 전만 해도 허약한 병사들이었으나

    그 허약한 병사를 단 1년만에 40만대군과 1,300척을 거느린 일본군과 맞서

    이길수 있는 군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리고 나서도 1시간 정도 더 이순신장군에 대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기를 해주고 강의를 끝마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강의가 끝났을 때

     난 처음으로 전 학생이 일어나는 기립 박수를 받아 보았다.

    어떤 학생은 눈물을 흘리기까지도 하면서.... 


    내가 처음 이순신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을 때

    그 감정을 나의 제자들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쟝웨이린 교수님은 1989년에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일을 맡는 주요 책임자 중 한 분이셨으며,

    1990년 이 학술회를 시작으로 해서 연구하시던 중

    1995년 고구려 역사를 편입하는 작업에서 스스로 물러나셨다고 한다.

     

    쟝웨이린 교수님은 이 책 머릿말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다.

    역사학자란 후세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일을 해서는 안된다.

    역사학자에게는 두 가지의 부끄러움이 있다.
    한 가지는 숨기는 것이다.
    히틀러가 200만 유태인을 죽인 것보다

    그 역사를 감추려하는 역사학자들이 더 부끄러운 것이다.
    나의 조국의 부끄러움보다 역사 앞에서 그 진실을 숨길 때

    그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짓이다.

    또 한 가지의 부끄러움을 말한다면,

    진정한 위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찾지 못하는 역사학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진정한 위인은 자기 가족만을 위해서 자신의 조국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다.
    진전한 위인이란 모든 만인을 위하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위인이며
    나는 그 위인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6. 일본의 아리모토라는 역사가가 본 이순신  

    세계의 전쟁 영웅은 피로 만들어진다.

     전쟁 영웅은 만인들이 우러러 보게끔 만든다.
    알렉산더 대왕도 그러했고 케사르도 그러했고,

    징키스칸도 그러했고, 나폴레옹도 그러했다.

    하지만 이순신장군은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게 한다.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한다.
    이러한 표현이 맞는 지는 모르겠다.

    나는 크리스챤인이다.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그 분.
    이순신장군을 볼 때면 문득 그분이 떠오른다.
    두 분 다 나의 고개를 숙이게 한다.

    이순신장군은 단순히 조선을 구한 영웅이 아니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은 피로 혁명을 일으키기보다는 바로 십자가를 선택하셨다.
    모든것을 홀로 짊어지시고 가셨다.

    2000년 전의 한 청년이 그래했듯이....

    이순신 장군은 그 처절한 전쟁 속에서 忠.孝.義.愛.善 을 가르치신 분이셨다.
    그러고보니 한국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을 영웅 이순신이라 말하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성웅 이순신'이라고.... 

     


     7. 장군의 혁명과 죽음에 대한 논란 

    1996.4월 이케다 하야토 교수의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중에서 14부인

    (이순신의 혁명과 죽음) 중에서.....



     < 혁 명 과 죽 음 > 

    이순신의 혁명

    우리들은 왜 이순신은 혁명을 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 하였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어보았다.
    수많은 전공에도 불구하고 조선 조정으로부터의 의심과 질투를 받은 그에게는
    단 한 번이라도 혁명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먼저, 우린 만일 이순신장군이 혁명을 일으켰다면 과연 성공하였을까?
    하는 부분부터 토론을 해보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 12명의 학자 모두 이순신장군은 혁명의 성공과 함께
    조선의 멸(滅)과 새로운 이순신의 나라가 세워졌을 거라고 의견을 모았다.

    이순신 장군에겐 2만여 명의 수군과 약 5천여 명으로 추정대는 의병,

    그리고 전라도와 충청 이남, 경상도 부근에 이순신을

    따르는 군(軍)의 수는 1만여 명에 이른다.
    총 3만 5천여 명에 달하고 

    이 군대에 대응할 조선의 군대는 없다고 봐야할 것이다.
    이와 함께 이순신에겐 두 가지의 또다른 무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민심과 명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명나라의 군대였다.
    명나라 군대 역시 이순신에 대한 반감이 컸으며,

    명나라의 장수 유정은 바로 곧 명나라의 황제를 대신하는 것이기에

    이순신에겐 유정을 넘어서야 1차적인 혁명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며.

    혁명 후 명나라 황제의 질타를 과연 극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도 간단하였다.

    조선의 왕 선조는 이순신이 혁명을 일으켰을 때 바로 명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구원을 청했을 것이다.


    명나라의 황제가 도와준다면 이순신의 군대는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
    생각했기에....
    하지만

    조선의 왕 선조는 자신을 도와줄 군대가 올 거라 생각 했지만,

    뜻밖에도 명나라에서는 군대가 아닌 사신이 온다.


    조선 조정으로가 아닌 명나라의 장수 유정에게
    명나라의 황제는 조선의 왕 선조가 아닌 이순신 통제사의 편을 들어준 것이다.


    왜였을까?

    이 역시 답은 간단하였다.
    그 당시 명나라의 국력은 임진왜란(정유)으로 인하여

    국력이 크게 약하게 되었으며,

    게다가 북으로의 오랑캐(훗날 청)의 견제가 심해져 있었으니

    전란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한 번 강력한 이순신 군대와 전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명나라는 새로운 전략을 세울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조선의 민심 역시 이순신에게 있는 것을 알기에)
    바로 이순신의 손을 들어주는것,

    이것은 또한 명나라에게도 커다란 이득인 것이다.

    힘 없는 선조가 조선의 왕이 되기 보다는 강력한 군대를 가진

    이순신을 도와 그에게 왕의 자리를 주고 그 이순신의 군대로 하여금

    후에 명(明)을 위협하는 오랑캐를 견제하자는 것이다.



    명나라의 문록(文錄)을 보면,


    (조선으로 건너간 명나라 장수 진린이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 글에 의하면
    '폐하 이 전란이 끝나면 즉시 조선의 수군 통제사 이순신으로 하여금 요동으로
    부르소서. 그로 하여금 북의 오랑캐를 견제토록 하게 하소서.

    이순신 통제사는 능히 우리 명(明)의 후환을 없애줄 것이라

    신(臣) 진린은 굳게 믿사옵니다.'....등등)


    이에 명(明)에서는 전란이 끝나면 이순신으로 하여금 그의 군대를
    요동으로 이동시키자라는 대신들의 논의(論議)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이미 명나라에서는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왕 선조에게 우리 명(明)의 도움을 받았으니 조선도 명(明)을 도우라.

    이순신으로 하여금 요동으로 오라 하라.

    이미 각본은 짜여져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이 혁명을 하든 안하든

    이미 명나라에서는 훗날의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이 혁명이 아닌 죽음을 선택한  것이었다.

    왜였을까?
    중국 역사, 조선의 역사 

    아니 고금을 통틀어서 이와 비슷한 일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에는 반드시 쿠테타든 혁명이든 일어나게 마련이다.
    아니면 '토사구팽'이라도

    그런데 이순신은 쿠테타도 혁명도 토사구팽도 모두 거절하였다.

    이순신은 오직 죽음만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순신 그는 과연 모든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이 내용에서는

    명나라가 이순신장군을 끌어들여서

    북의 오랑캐(훗날 청나라)을 견제시키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들은 단순히 이순신장군께서 혁명을 이룩하면

    조선이 발전되었을 거라고 단정을 내리곤 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국제 정세란 매우 이해관계가 복잡한 일이다.

    이순신장군께서는 어쩌면 그러한 모든 것을 다 아셨는지도 모릅니다.

    만일 이순신장군이 혁명을 일으키고 명나라가 이순신을 도와줘서
    낭떠러지에 몰린 조선왕 선조와 조정대신(이순신의 반대파 세력)들이 뜻밖에도
    일본과 손을 잡게 되고 비밀협약을 한다면 과연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혹시 이순신 장군은 그러한 모든 과정까지도 생각하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이순신장군은 너무나도 치밀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드라마를 보고 흥분해서 가설을 내세우지만
    이순신장군은 끝까지 냉정함을 잃지 않고 내가 무엇을 해야 되는가를
    정확이 아셨던 분이십니다.

    400년이 지난 지금 장군님께 질문을 던져 봅니다
    장군님 당신은 다 알고 계셨던 겁니까?
    그리도 두려우셨읍니까?
    조선이 피로 물들여질 거라는 생각에 그리도 두려우셨읍니까?
    그래서 죽음을 선택하신 건가요?

    2000년 전의 예수 그리스도처럼 

     장군께서도 홀로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셨던 건가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모든 일을 주관하셨지만 
    미약한 인간의 몸이셨던 장군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였으며

    얼마나 외로웠을까....


    당신 앞에서 한 줄기 눈물을 흘립니다. 

     

    이 순 신 장군님  

     



    이순신 장군에 대한 책이 총 32권, 
    그것도 한국 학자가 아닌 일본과 중국학자들에 의해 지어진 책....
    그들은 우리를 알려고 하는데....
    적어도 우린 저들을 모른다고 해도

    우리 역사에 대해서 만큼은 더 알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그분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
    그분이 우리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 .

    x-text/html; charset=EUC-KR" autostart=":true" x-x-allowscriptaccess="never" volume="0" loop="-1">

     

     

    물론 모르고 그랬겠지만 '난중일기'에서는 여산 사람들이 한양으로 압송되는

    이순신 장군의 수레에 돌을 던졌다는 기록이 있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