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국 전 쟁

적고지를 탈환전에 우군 포사격을 보고 탈한 준비하는 국군
전쟁은 생과 죽음의 기로에 있는 순간
북한군의 남침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해방한후 나뉘어지고 6.25전쟁이 일어났고 휴전선(휴전=전쟁이 휴식상태)이 생긴겁니다.
38도선과 휴전선은 다른겁니다.

중국군이 한국에서 이룬 "승리"를 보여주는 중국의 포스터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항복 발표후 일본은 우리나라에서 물러가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인 미국(자본주의) 소련(사회주의)가 한반도를 가지기 위해 들어옵니다.
제1차 2차 세계대전이 생긴 이유가 제국주의때문인데요 (강대국이 식민지를 삼기위함) 여기에
이념대립이 생겨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와의싸움) 서로 자기네 이념에 넣으려고 한반도를 갖으려합니다.

1951년초 서울에 입성한 중공군과 북한군 병사들이 중앙청 앞에서 승리를 자축하고 있다.
먼저 소련이 김일성을 내세워 한반도에 들어오고 미국이 들어와서 38도선이라는것을 만들어 남과 북으로 나뉘어 행동하게 됩니다. 이때까진 38도선도 서로 넘어갈수있었습니다
그러다 점차 한반도 전체를 자기네 땅으로 하고자하는 소련과 미국은 서로 감정이 안좋아지게되고 38도선은 이제 넘을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서로 대립된상황으로 1948년 8월15일 남한에서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1948년 9월에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 북한에서 수립되어 한반도에
두개의 국가가 생기게 됩니다.

수많은 유엔군의 전사자들
이들은 이국땅에서 무엇을 위하여 목숨을 버렸느냐?
한국민의 반미소리를 그들이 듣는다면
그들은 어떤 말을 할까??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장면
한국 전쟁 |
 38도선을 넘는 차량들 |
|
|
결과 : |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 본격적인 냉전체제 돌입 | |
교전국 |
국제연합군
대한민국 [1]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
터키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벨기에
에티오피아
프랑스
그리스
필리핀
남아프리카 공화국
타이
해군지원국
일본
의료지원국
인도
이탈리아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
공산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소비에트연방
|
병력 |
UN군 사령부: [2]
대한민국 590,911명
미국 302,483명
오스트레일리아 2,282명
캐나다 6,146명
뉴질랜드 1,389명
영국 14,198명
필리핀 7,000명
터키 5,455명
네덜란드 1,700명
룩셈부르크 44명
콜롬비아 1,068명
벨기에 900명
에티오피아 1,271명
프랑스 1,119명
그리스 1,263명
남아프리카 공화국 826명
타이 1,294명 총: 933,845명
|
공산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60,000명[출처 필요]
중화인민공화국 780,000명
소비에트연방 26,000명 총: 1,066,000
|
피해 상황 |
대한민국:
- 전사 : 58,127명
- 부상 : 175,743명
- 행방불명 및 포로 : 80,000여 명[3]
미국:
- 전사 : 27,704명(비전투사망 8,370명 포함)
- 부상 : 79,526명
- 행방불명 : 4,442명
- 포로 : 6,656명 [4]
미국(중국 및 북조선 추정치):
- 전사, 비전투사망, 부상, 행방불명, 전쟁포로 포함 : 390,000명 [5]
영국:
- 전사 : 1,109명 [6]
- 부상 : 2,674명
- 행방불명 또는 전쟁포로 : 1,060명 [7]
터키:
- 전사 : 721명 [8]
- 부상 : 2,111명
- 행방불명 : 168명
- 포로 : 216명
총계: 474,000명 이상 |
북조선:
- 전사 : 215,000명
- 부상 : 303,000명
- 행방불명 및 포로 : 120,000여 명[9]
중국: (중국 추정):
- 전사 : 114,000명
- 비전투 사망 : 34,000명
- 부상 : 380,000명
- 포로 : 21,400명 [10]
(미국 추정): [9]
- 전사 : 400,000명
- 부상 : 486,000명
- 포로 : 21,000명
소비에트 연방:
총계: 1,190,000명 ~ 1,577,000명 이상. |
1 9 5 0년 6월 2 5일 새벽, 38선을따라 배치되어있던 북한군의 야포가 남쪽을 향해 일제히불을 뿜기 시작했다. 이어서
북한군기동부대가 서쪽의 옹진반도로부터 동쪽으로 개성, 전곡, 포천, 춘천, 양양에이르는3 8선 전역에서공격을시작했다. 또한유격대와 육전대가 동해안을따라 강릉 남쪽 정동진과 임원진에 상륙했다. 그때부터 정적에 휩싸여있던 3 8선과 동해안일대가 단숨에 아비규환의 전쟁터로 변했다.
6.25전에도 크고 작은 총격전이 있었는데요 1950년 6월25일 소련에서 무기를 지원받은 (신식무기) 북한이 남침을 해서 전쟁이 일어나게되었고 밀고 밀리는 상황에서 우리민족의 최대비극이었던 6·2 5전쟁은 이렇게 시작됐다.(서울은 4번 주인이 바뀝니다.)
휴전을 하자고 회담을 열게됩니다. 휴전회담에서 휴전 협정 조인 당시의 접촉선을 군사 분계선으로 하기로 합의하는데요 결국 서로 휴전하자고 도장을 찍기바로 직전까지의 땅이 맞닿은 곳을 휴전선으로 하겠다는 말입니다.
북한군의 남침과 국군의 대응
북한군의 기습남침이 시작되자 3 8선으로부터 불과 4 0㎞ 남쪽에 위치한 서울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았다. 사전에 치밀한 남침계획을 수립했던 북한군도 남한의 그같은 약점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그들은 서울 북쪽에 주공인 제1군단을 투입해 서울을 목표로 집중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중부전선의 춘천과 동부전선의 강릉 북쪽에서도
북한군 제2군단의 공격이 동시에 시작됐다.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3 8선 일대의 국군 장병들은 즉시 전투태세
에 돌입했으며, 주둔지에서 새벽잠을 깬 부대원들은 출동준비를 하기에 바빴다.
6 . 2 5 전쟁개시초기
그 동안 지속되었던 비상경계령이 불과 하루 전인 6월 2 4일(토요일) 0 0시부로 해제되었으며 주말을 맞이해 많은 병력이 외출·외박을 나갔기 때문에 부대에 남아 있는 병력은 많지 않았다.3 8선의 국군 방어진지에서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적부대와 치열한 접전이 이미 전개되고 있었다. 국군 부대들이 미처 준비태세를 갖추기도전에 방어진지를 기습한 북한군의 공격을 선도하고 있는 것은 소련제T - 3 4전차와 S U - 7 6자주포였다.그들의 전차와 자주포가 국군의 방어진지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으나,
당시 국군은 단 한대의 전차와 자주포도 갖지 못했다. T-34전차를 격파할 수 있는 대전차무기도 없었다. 따라서 북한군의 전차는 무적의 괴물이었다.전차의 위력을 보고 있는 국군 용사들은 공포의 도가니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많은 장병들이 전의(戰意)를 상실했다. 또한 포탄전쟁 발발과 초기전투남침 선봉에 선북한군 전차대.그들은 전차를 앞세우고 포병의 지원을받으며 조직적인공격을 감행했다. 일부 부대는 자주포를전면에 내세워 전차처럼 운용했다.
육군본부 상황실에는 전방사단으로부터 급박한 상황을 알리는 전화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 자택에서 상황보고를 받은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은 곧 비상을 발령하고 신성모 국방부장관을 직접 찾아가 전쟁 발발 상황을 보고했다.
북한군의 남침상황이 전파되면서 비상소집이 시작되었지만 장병들의부대 복귀는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의거리에는 방송 차량이 장병들의 부대 복귀를 독촉했고, 모인 극장과 운동장에도 비상사태를 알리는 방송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적과 맞서 싸울 병력이 부족한 대부분의 전방진지는 장병들이 투입되기도 전에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 1시 국방부는 전쟁 발발에 관한 공식 담화문을 발표했다.그 사실이 신문 호외로 전국에 뿌려지자 국민들은 충격과 불안에 휩싸이게 되었다.
중앙청 건물도 숯덩이가 되어 있었다.

국군 탱크를 앞세워 38선을 톨파 북진

어린 동생을 등에 업고 식량 구하러 간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머리엔 무엇인가 잔뜩 이고 지팡이를 짚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두 아줌마...
북한측의 남침 사실 은폐와 북침 주장
남침 전쟁의 기습 달성이 확실해진 것을 확인한 북한 정권은 오전 1 1시경 평양방송을 통해“남조선이 북침했기 때문에 자위조치로서 반격을 가해 전쟁을 시작했다.”는 내용으로 대한민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발표했다. 이어서 오후에는 김일성이 직접 방송을 통해“리승만 괴뢰정부의 군대가 침략전쟁을 일으켰으며, 공화국 경비대와 인민군대에게 반격을 실시하라고 명령했다.”는 내용을 발표했다.북한측의 주장은“대한민국이 북침했으므로 그들이 반격했다.”는 것으로 그들의 사전 치밀한 계획에 따라 도발한 침략전쟁의 실상을 은폐하고 그 책임을 한국측에 전가하려 했던 것이다. 그들이 공간사로 펴낸『조선전사』에도 그런 내용들이 상당히 장황하게 기술되어 있다.그 후 일부 인사들이 북한의 주장과 맥락을 같이 해“남측이 먼저 공격을 시작하였고, 북측이 이를 반격함으로써 전쟁이 확대되었다.”는 소위‘북침설’을 주장하기도 했다.북한을 비롯해 북침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국군의 해주 진입설을 그증거로 제시하고 있으나, 그것은 오보임이 판명되었고 사실적인 증거는발견되지 않았다. 실전에서 국군의 어느 부대도 3 8선 이북으로 공격 또는 진입한 사실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북한군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방어전을 실시했거나 후퇴한 적이 없었으며 오직 3 8선을 넘어 공격을 계속했을 뿐이다.

미군으로부터 초컬랫을 받고있는 어린이.

적이 후퇴하면서 많은 양민을 반동이라는 이름으로 무참이 죽였다.
당시 양민을 학살한 수의 통계는
12만2799명으로(1952년기준)
휴전이 1953년7월 협정되었으니
이숫자 보다 많을것임
이 처럼 많은 양민을 학살했는데도
왜 묵살하고 미군과 군의 발자취만 규탄하려는가?
규명은 공정해야 한다
전쟁의 인적 재산피해
6·2 5전쟁은 한민족의 유구한역사를 통해 치른 전란 중에서 가장 처참하고 엄청난 피해를주었다. 58년전그날 이 땅위에서는 한민족5천년 역사 이래 가장 많은 국가인25개국 약 1 5 0만 명의 군인이 한국전쟁을치렀다. 그 결과한국군62만명, 유엔군16만명,북한군93만 명, 중공군1 0 0만명, 민간인피해 2 5 0만 명, 이재민3 7 0만명, 전쟁미망인3 0만명, 전쟁고아10만명, 이산가족1,000만명 등 당시남북한인구 3,000만명의 절반을넘는 1,800여 만명이 피해를입었다. 이러한 천문학적인 숫자는 미국이 5년간 치른 남북전쟁에서도인구 3%에 해당하는100여 만명이었고, 제2차대전시 최대의 피해를 입었던 유럽도 인구의10%인 3,000만 명이 인명손실을 입었을뿐이다. 또한 물적피해도 전국토가 초토화 되는 과정에서 인명피해못지 않게 자못컸다.

서울 수복을 앞두고 노량진에서
한강 이북 서울을 감격스럽게 바라본다.

덕수궁

남대문로 한국은행 앞 아니면 지금의 명동 앞 쯤인 것 같다. 포격으로 부숴진 건물에 설롱탕이라고 적힌 간판이 보인다

포격으로 파괴된 한국은행 건물의 일부.

명동성당 주변
1950년 12월 4일 중공군의 대대적인 개입과 함께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유엔군의 大후퇴가 시작될 때 수천 명의 피난민들이 폭파된 대동강 철교를 타고 南(남)으로 향하고 있다. 유엔군은 중공군의 추격을 막기 위해 대동강 철교를 폭파시켰다. AP통신 종군기자 막스 데스포가 촬영해 1951년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6.25노래 박두진 작사/김동진 작곡

한국전쟁 사진 30편을 보내오니 자손들에게 물려 주세요
아래 제목마다 클릭 하면 당시상황 그림이 뜹니다..천추에 한맥힌 역사를
잘볼겄입니다..
*우리세데는 전쟁터에서 生死가 오락 가락 하였기에 더욱
이런사진을 내생전에 다시보게되니 이것을 보관해준 미국 관계기관에
끝없는 감사를 드립니다..
"사진보면서 음악 한곡.."
여기 실린 사진은 미국 메릴랜드 주에 있는 NARA(국립문서기록보관청,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5층 사진자료실에 보관된 'KOREA WAR(한국전쟁)' 파일의 사진들입니다. 날짜와 장소는 사진 뒷면에 있는 영어원문을 따랐음.이 사진이 기록물이 부족한 우리나라에 자료로 남기를 바랍니다. 생사가 교차되는 전선에서 귀한 사진을 남긴 카메라맨들에게 경의를 드립니다. 시리즈로 #1 에서 #30까지 연재로 작성한것을 한 화면에 올렸습니다. 특히 6.25를 겪은 6학년세대들에게는 직접 피부에 와 닿는 생생함 그대로입니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