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로애락 감정 숨김없이… '인간 이순신'에 놀라"
![](http://img.news.yahoo.co.kr/picture/2008/34/20080402/2008040201351231234_040524_0.jpg)
충무공 이순신(李舜臣·1545~1598) 장군과 관련된 기존 기록들을 뽑아 필사한 17세기의 문서 ‘충무공유사(忠武公遺事·재조번방지초)’는 지금까지의 ‘난중일기(亂中日記)’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일기 32일치를 담고 있다. ‘충무공유사’의 탈초(脫草·초서로 된 글씨를 풀어 씀)와 완역 작업을 수행한 노승석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대우교수의 번역을 토대로, 새로 발굴된 기록들 중 주요 내용들을 뽑아 소개한다. /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1595년(을미년) 정월 10일
순천 부사(=이순신의 부하 장수인 권준·權俊)도 공사(公私)간의 인사를 하려는 것을 잠시 보류했다가 조금 뒤에 불러들였다. 이들과 함께 좌석에 앉아 술을 권할 때 말이 매우 잔혹하고 참담했다.
順天公私禮, 姑留之, 而有頃招入, 同坐饋酒之際, 言辭極兇慘.
(이번에 발굴된 일기에는 부하 장수인 권준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이순신의 감정이 솔직하게 드러난다. 기존의 ‘난중일기’에선 찾기 어려운 부분이다. 당시는 전선이 교착 상태인 채 강화 회담이 전개되고 있었고,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은 군량 확보에 노력하면서 다시 닥칠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다.)
●정월 12일
삼경(자정쯤)에 꿈을 꾸니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오셔서 분부하시기를 “13일에 회( ·이순신의 맏아들)를 초례(醮禮·전통 혼례)하여 장가보내는데 날이 맞지 않는 것 같구나. 비록 4일 뒤에 보내도 무방하다”고 하셨다. 이에 완전히 평소와도 같은 모습이어서 이를 생각하며 홀로 앉았으니, 그리움에 눈물을 금하기 어려웠다.
三更夢先君來敎, “十三日送醮, 往似有不合. 雖四日送之無妨”爲敎. 完如平日, 懷想獨坐, 戀淚難禁也.
(돌아간 아버지 이정·李貞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기존 ‘난중일기’에는 전쟁 중에도 수시로 사자를 보내 어머니의 안부를 대신 묻게 하는 등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을 적은 부분이 많지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쓴 부분은 거의 없었다.)
●정월 15일
우후(虞候·수군절도사 밑에 두었던 무관직) 이몽구와 여필이 왔다. 이 편에 “이천주(李天柱)씨가 뜻하지 않게 갑자기 죽었다”는 말을 들으니, 경탄함을 이기지 못했다. 천리 밖의 땅에 던져진 사람이 만나보지도 못하고 갑자기 죽으니 더욱 애통과 슬픔이 심했다.
虞候李夢龜及汝弼來, 聞李天柱氏, 不意暴逝云. 不勝驚嘆, 千里投人, 不見而奄逝, 尤極痛悼.
(‘이천주’란 인물은 이순신의 지인으로 추정된다. 전란 중 벗을 잃은 애절한 심정을 표현했다.)
●정월 27일
오늘이 바로 (맏아들) 회( )가 혼례를 올리는 날이니, 걱정하는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장흥 부사가 술을 가지고 왔다. 그의 서울에 있는 첩들을 자기의 관부(官府)에 거느리고 왔다고 하니, 더욱 놀랍다.
乃 奠雁之日, 心慮如何? 長興佩酒來, 其京妾亦率來于其府云, 尤可駭也.
(전란 중에 혼례를 올리는 아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당시 관원들의 행태를 기록했다.)
●2월 9일
꿈을 꾸니 서남방 사이에 붉고 푸른 용이 한 쪽에 걸렸는데, 그 형상이 굴곡져서 내가 호로 보다가 이를 가리키며 남들도 보게 했지만, 남들은 볼 수 없었다. 머리를 돌린 사이에 벽 사이로 들어와 그림 용이 돼 있었고, 내가 한참 동안 어루만지며 완상하는데 그 빛과 형상이 움직이니 특이하고 웅장하다 할 만 했다.
夢西南間, 赤靑龍掛在一方, 其形屈曲, 余獨觀之, 指而使人見之, 人不能見. 回首之間 來入壁間, 因爲畵龍, 吾撫玩移時, 其色形動搖, 可謂奇偉.
●3월 24일
(전라)우수사(右水使=이억기)는 앉을 대청을 개수(改修)해 세우는 것을 나쁘게 여기고 헛소리를 많이 하며 보고해 왔다. 매우 놀랍다.
右水使以坐廳改立爲惡, 多費辭報來, 可愕可愕.
(‘우수사’는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이던 시절 함께 해전에 참가해 전공을 세웠고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했다. 새로 발굴된 부분에서 이순신은 세 번에 걸쳐 이억기에 대해 못마땅한 심정을 적었는데, 역시 기존 ‘난중일기’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부분이다.)
●4월 30일
아침에 원수(元帥=도원수 권율·權慄)의 계본(啓本·임금에게 제출하는 문서 양식)과 기(奇)·이(李)씨 등 두 사람의 공초(供招·죄인의 진술)한 초안을 보니 원수가 근거 없이 망령되게 고한 일들이 매우 많았다. 반드시 실수에 대한 문책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데도 원수의 지위에 둘 수 있는 것인가. 괴이하다.
朝見元帥啓本及奇李兩人供草, 則元師多有無根妄啓之事, 必有失宜之責. 如是而可置元帥之任乎! 可怪.
(무척 당혹스런 기록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전체를 통솔했던 도원수는 다름아닌 ‘행주대첩의 영웅’ 권율 장군이었다. 그는 당시 이순신 장군의 상관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각각 육군과 수군의 총사령관이었던 권율 장군과 이순신 장군 사이에 이와 같은 갈등이 있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순신의 일기가 대단히 솔직한 기록이었음을 알 수 있다.)
●7월 1일
내일은 아버지의 생신인데, 슬픔과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
明日乃父親辰日, 悲戀懷想, 不覺涕下.
●8월 22일
강을 건너 주인집에 갔다가 그 길로 체찰사(體察使)의 하처(下處·임시 숙소)로 가니 먼저 사천현에 와서 자고 있었기 때문에 맞이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고 변명했다. 우습다.
渡江入主人家, 因到體察下處, 則以先到泗川縣宿, 而不爲迎命爲言, 可笑.
(기존 ‘난중일기’에는 이 내용의 앞부분에 ‘오후에 진주 남강가에 이르니 체찰사가 이미 진주에 들어왔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체찰사는 비상시에 임시로 지방에 파견해 군대를 지휘 통솔하는 역할을 맡은 관직이다. 고위 관료의 행태를 비웃는 자세가 보인다.)
●10월 3일
오늘은 (맏아들) 회( )의 생일이다. 그래서 술과 음식을 갖춰 주도록 예방(禮房)에 당부했다.
乃 生日, 故酒食備給事, 言及禮房.
●10월 21일
정사립(鄭思立·이순신의 비장)을 통해 들으니 “경상수백(慶尙水伯=권준)이 모함하는 말을 거짓으로 꾸미는데 내키는 대로 문서를 작성하고, 문서로 적게 되면 오로지 알려지지 않게 했다”고 했다. 매우 놀랍다. 권 수사의 사람됨이 어찌하여 그처럼 거짓되고 망령된 것인가?
因思立, 聞“慶水伯飾誣陷辭. 倚指成文之, 而文之則專不聞”之云. 可駭可駭! 權水之爲人, 何如是誣妄耶?
●10월 28일
초경(밤 8시쯤)에 거센 바람과 폭풍우가 크게 일었다. 이경(10시쯤)에 우레가 치고 비가 와서 여름철과 같으니 변괴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初更狂風驟雨大作, 二更雷雨有同夏日, 變怪至此.
●11월 1일
조정에서 보낸 편지와 원흉(元兇·경상우수사 원균을 매우 낮춰 표현한 것)이 보낸 답장이 지극히 흉악하고 거짓되어 입으로는 말할 수 없었다. 기만하는 말들이 무엇으로도 형상하기 어려우니 하늘과 땅 사이에는 이 원균(元均)처럼 흉패하고 망령된 이가 없을 것이다.
朝報及元兇緘答則極爲兇譎, 口不可道. 欺罔之辭, 有難形狀. 天地間無有如此元之兇妄.
(이순신·원균 두 사람의 관계가 좋지 않았음 기존 ‘난중일기’에서도 드러나지만, 이처럼 커다란 혐오감을 보인 대목은 없었다.)
●11월 4일
우리 나라의 병사들이 쇠잔하고 피폐한데 이를 어찌하랴.
我國兵殘力疲, 奈如之何?
1598년(무술년) 7월 24일
복병장(伏兵將) 녹도 만호 송여종(宋汝悰)이 전선(戰船) 8척을 거두다가 적선 11척을 절이도(折爾島)에서 만나 6척을 통째로 포획하고 적군의 머리 69급(級)을 벴으며 용기를 발휘해 진영에 돌아왔다.
伏兵將鹿島萬戶宋汝悰, 斂戰船八隻, 遇賊舡十一隻于折爾島, 全捕六隻, 斬首六十九級, 賈勇還陣.
(전쟁 막바지에 조선 수군이 거둔 승리인 ‘절이도 해전’에 대한 기록이다. 절이도는 지금의 전남 거금도다. 이 승전은 지금까지 ‘선조실록’과 이순신의 조카 이분의 ‘행록’ 등에 단편적으로 등장했을 뿐 정작 ‘난중일기’에는 그 내용이 없었다.)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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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로애락 감정 숨김없이… '인간 이순신'에 놀라"
"《충무공유사(忠武公遺事)》를 번역하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난중일기(亂中日記)》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내용들이 있다는 것만은 아니었어요. 충무공도 보통사람들처럼 희로애락의 감정을 느끼는 '인간'이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난중일기》에서 누락됐던 32일치의 일기 내용〈본지 2일자 A1·A10면 보도〉을 밝혀낸 노승석(盧承奭·39)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대우교수는 여전히 상기된 얼굴이었다. 400여년 만에 세상에 공개된 일기는 돌아간 아버지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 전란을 치르면서도 흐트러짐이 없는 강직한 면모, 백성과 군사들을 아끼는 자상함이 잘 드러나 있다.
본지 단독 보도 직후 문화재청의 긴급 브리핑에 모습을 드러낸 노 교수를 보고 사람들은 다시 한번 놀랐다. 암호문과도 같은 초서(草書)의 내용을 모두 해독한 사람이 백발의 한학자가 아니라 30대의 젊은 학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 《난중일기》에 관한 한 국내 최고 수준의 전문가다. 성균관대 한문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던 지난 2004년 35세의 나이로 《난중일기》의 13만자(字) 전편(全篇)을 DB(데이터베이스)화하는 데 성공했고, 2005년에는 누락되거나 잘못된 글자를 모두 바로잡은 《난중일기》의 첫 완역본을 냈다. 이때 바로잡은 글자만 150자(字)가 넘는다.
![](http://img.news.yahoo.co.kr/picture/2008/34/20080407/2008040700021822634_035028_0.jpg)
그는 청명 임창순(任昌淳·1914~1999) 선생과 동문수학했던 부친 노상구(盧相九)씨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한학을 접하며 자랐다.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32일치의 일기가 실린 문서가 다름아닌 현충사 소장 《충무공유사》였고, 더구나 책 제목도 '재조번방지초(再造藩邦志抄)'라고 잘못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이 뜻밖이다.
"등잔 밑이 어두운 격이었다. 자료 번역을 위해《충무공유사》를 판독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그런 부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직도 초서로 쓰여진 우리 문서들 중 대다수가 밝혀지지 않은 진실을 묵묵히 담고 있는 셈이다."
―새로 밝혀진 일기 내용에 대해 '뒷담화 일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충무공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적은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도원수 권율을) 원수의 지위에 둘 수 있는 것인가. 괴이하다.' '하늘과 땅 사이에 원균처럼 흉패하고 망령된 이가 없을 것'이라는 부분들은 후세의 우리로서는 대단히 당혹스러운데….
"남에게 보여주려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적은 부분이라 그럴 것이다. 이 부분이 나중에 《이충무공전서》에서 빠진 것도 대단히 민감한 내용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인간 이순신'이 달랐던 점은 그 희로애락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내면에서 승화시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는 데 있다. 그것이 위인(偉人)과 범인(凡人)의 차이일 것이다."
―《난중일기》의 판본이 복잡하다는 것도 일반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부분이다.
"'난중일기'라는 제목은 1795년 정조 임금의 명으로 《이충무공전서》를 간행할 당시 편의상 붙인 것이다. 원래는 연도별로 〈임진일기〉 〈계사일기〉라는 제목이 붙어 있을 뿐이었다. 〈을미일기〉의 친필 초고본이 모두 유실돼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내용만 전해졌다. 새로 밝혀진 일기 32일치 중 29일치가 〈을미일기〉인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존 초고본에 없는 병신년(1596)과 무술년(1598)의 일기 3일치는 어떻게 된 것인가?
"충무공은 전란중에 일기를 적을 때 경황이 없어 대충 써 놓고는 나중에 다시 정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유일기〉의 경우 다시 정리한 〈속 정유일기〉가 따로 있을 정도다. 그 3일치는 충무공이 비망록 형식으로 따로 적어 놓았으나 지금은 없어진 부분으로 보인다."
―지난해 7월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전문위원 겸 대우교수가 됐다. 무슨 활동을 하고 있나?
"《충무공유사》를 비롯한 《난중일기》의 이본(異本)들을 번역하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충무공 관련 문헌사료들을 정리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번 학기부터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난중일기 강독'이란 강의를 개설했다. 《난중일기》를 텍스트로 삼아 충무공의 리더십을 가르치는 것인데, 학생들이 110여 명이나 수강하고 있어 자리가 부족할 지경이다. 이번에 새로 나온 자료를 바탕으로 다시 《난중일기》의 정본(定本)을 만들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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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李舜臣·1545~1598) 장군과 관련된 기존 기록들을 뽑아 필사한 17세기의 문서 ‘충무공유사(忠武公遺事·재조번방지초)’는 지금까지의 ‘난중일기(亂中日記)’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일기 32일치를 담고 있다. ‘충무공유사’의 탈초(脫草·초서로 된 글씨를 풀어 씀)와 완역 작업을 수행한 노승석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대우교수의 번역을 토대로, 새로 발굴된 기록들 중 주요 내용들을 뽑아 소개한다. /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1595년(을미년) 정월 10일
순천 부사(=이순신의 부하 장수인 권준·權俊)도 공사(公私)간의 인사를 하려는 것을 잠시 보류했다가 조금 뒤에 불러들였다. 이들과 함께 좌석에 앉아 술을 권할 때 말이 매우 잔혹하고 참담했다.
順天公私禮, 姑留之, 而有頃招入, 同坐饋酒之際, 言辭極兇慘.
(이번에 발굴된 일기에는 부하 장수인 권준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이순신의 감정이 솔직하게 드러난다. 기존의 ‘난중일기’에선 찾기 어려운 부분이다. 당시는 전선이 교착 상태인 채 강화 회담이 전개되고 있었고,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은 군량 확보에 노력하면서 다시 닥칠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다.)
●정월 12일
삼경(자정쯤)에 꿈을 꾸니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오셔서 분부하시기를 “13일에 회( ·이순신의 맏아들)를 초례(醮禮·전통 혼례)하여 장가보내는데 날이 맞지 않는 것 같구나. 비록 4일 뒤에 보내도 무방하다”고 하셨다. 이에 완전히 평소와도 같은 모습이어서 이를 생각하며 홀로 앉았으니, 그리움에 눈물을 금하기 어려웠다.
三更夢先君來敎, “十三日送醮, 往似有不合. 雖四日送之無妨”爲敎. 完如平日, 懷想獨坐, 戀淚難禁也.
(돌아간 아버지 이정·李貞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기존 ‘난중일기’에는 전쟁 중에도 수시로 사자를 보내 어머니의 안부를 대신 묻게 하는 등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을 적은 부분이 많지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쓴 부분은 거의 없었다.)
●정월 15일
우후(虞候·수군절도사 밑에 두었던 무관직) 이몽구와 여필이 왔다. 이 편에 “이천주(李天柱)씨가 뜻하지 않게 갑자기 죽었다”는 말을 들으니, 경탄함을 이기지 못했다. 천리 밖의 땅에 던져진 사람이 만나보지도 못하고 갑자기 죽으니 더욱 애통과 슬픔이 심했다.
虞候李夢龜及汝弼來, 聞李天柱氏, 不意暴逝云. 不勝驚嘆, 千里投人, 不見而奄逝, 尤極痛悼.
(‘이천주’란 인물은 이순신의 지인으로 추정된다. 전란 중 벗을 잃은 애절한 심정을 표현했다.)
●정월 27일
오늘이 바로 (맏아들) 회( )가 혼례를 올리는 날이니, 걱정하는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장흥 부사가 술을 가지고 왔다. 그의 서울에 있는 첩들을 자기의 관부(官府)에 거느리고 왔다고 하니, 더욱 놀랍다.
乃 奠雁之日, 心慮如何? 長興佩酒來, 其京妾亦率來于其府云, 尤可駭也.
(전란 중에 혼례를 올리는 아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당시 관원들의 행태를 기록했다.)
●2월 9일
꿈을 꾸니 서남방 사이에 붉고 푸른 용이 한 쪽에 걸렸는데, 그 형상이 굴곡져서 내가 호로 보다가 이를 가리키며 남들도 보게 했지만, 남들은 볼 수 없었다. 머리를 돌린 사이에 벽 사이로 들어와 그림 용이 돼 있었고, 내가 한참 동안 어루만지며 완상하는데 그 빛과 형상이 움직이니 특이하고 웅장하다 할 만 했다.
夢西南間, 赤靑龍掛在一方, 其形屈曲, 余獨觀之, 指而使人見之, 人不能見. 回首之間 來入壁間, 因爲畵龍, 吾撫玩移時, 其色形動搖, 可謂奇偉.
●3월 24일
(전라)우수사(右水使=이억기)는 앉을 대청을 개수(改修)해 세우는 것을 나쁘게 여기고 헛소리를 많이 하며 보고해 왔다. 매우 놀랍다.
右水使以坐廳改立爲惡, 多費辭報來, 可愕可愕.
(‘우수사’는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이던 시절 함께 해전에 참가해 전공을 세웠고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했다. 새로 발굴된 부분에서 이순신은 세 번에 걸쳐 이억기에 대해 못마땅한 심정을 적었는데, 역시 기존 ‘난중일기’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부분이다.)
●4월 30일
아침에 원수(元帥=도원수 권율·權慄)의 계본(啓本·임금에게 제출하는 문서 양식)과 기(奇)·이(李)씨 등 두 사람의 공초(供招·죄인의 진술)한 초안을 보니 원수가 근거 없이 망령되게 고한 일들이 매우 많았다. 반드시 실수에 대한 문책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데도 원수의 지위에 둘 수 있는 것인가. 괴이하다.
朝見元帥啓本及奇李兩人供草, 則元師多有無根妄啓之事, 必有失宜之責. 如是而可置元帥之任乎! 可怪.
(무척 당혹스런 기록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전체를 통솔했던 도원수는 다름아닌 ‘행주대첩의 영웅’ 권율 장군이었다. 그는 당시 이순신 장군의 상관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각각 육군과 수군의 총사령관이었던 권율 장군과 이순신 장군 사이에 이와 같은 갈등이 있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순신의 일기가 대단히 솔직한 기록이었음을 알 수 있다.)
●7월 1일
내일은 아버지의 생신인데, 슬픔과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
明日乃父親辰日, 悲戀懷想, 不覺涕下.
●8월 22일
강을 건너 주인집에 갔다가 그 길로 체찰사(體察使)의 하처(下處·임시 숙소)로 가니 먼저 사천현에 와서 자고 있었기 때문에 맞이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고 변명했다. 우습다.
渡江入主人家, 因到體察下處, 則以先到泗川縣宿, 而不爲迎命爲言, 可笑.
(기존 ‘난중일기’에는 이 내용의 앞부분에 ‘오후에 진주 남강가에 이르니 체찰사가 이미 진주에 들어왔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체찰사는 비상시에 임시로 지방에 파견해 군대를 지휘 통솔하는 역할을 맡은 관직이다. 고위 관료의 행태를 비웃는 자세가 보인다.)
●10월 3일
오늘은 (맏아들) 회( )의 생일이다. 그래서 술과 음식을 갖춰 주도록 예방(禮房)에 당부했다.
乃 生日, 故酒食備給事, 言及禮房.
●10월 21일
정사립(鄭思立·이순신의 비장)을 통해 들으니 “경상수백(慶尙水伯=권준)이 모함하는 말을 거짓으로 꾸미는데 내키는 대로 문서를 작성하고, 문서로 적게 되면 오로지 알려지지 않게 했다”고 했다. 매우 놀랍다. 권 수사의 사람됨이 어찌하여 그처럼 거짓되고 망령된 것인가?
因思立, 聞“慶水伯飾誣陷辭. 倚指成文之, 而文之則專不聞”之云. 可駭可駭! 權水之爲人, 何如是誣妄耶?
●10월 28일
초경(밤 8시쯤)에 거센 바람과 폭풍우가 크게 일었다. 이경(10시쯤)에 우레가 치고 비가 와서 여름철과 같으니 변괴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初更狂風驟雨大作, 二更雷雨有同夏日, 變怪至此.
●11월 1일
조정에서 보낸 편지와 원흉(元兇·경상우수사 원균을 매우 낮춰 표현한 것)이 보낸 답장이 지극히 흉악하고 거짓되어 입으로는 말할 수 없었다. 기만하는 말들이 무엇으로도 형상하기 어려우니 하늘과 땅 사이에는 이 원균(元均)처럼 흉패하고 망령된 이가 없을 것이다.
朝報及元兇緘答則極爲兇譎, 口不可道. 欺罔之辭, 有難形狀. 天地間無有如此元之兇妄.
(이순신·원균 두 사람의 관계가 좋지 않았음 기존 ‘난중일기’에서도 드러나지만, 이처럼 커다란 혐오감을 보인 대목은 없었다.)
●11월 4일
우리 나라의 병사들이 쇠잔하고 피폐한데 이를 어찌하랴.
我國兵殘力疲, 奈如之何?
1598년(무술년) 7월 24일
복병장(伏兵將) 녹도 만호 송여종(宋汝悰)이 전선(戰船) 8척을 거두다가 적선 11척을 절이도(折爾島)에서 만나 6척을 통째로 포획하고 적군의 머리 69급(級)을 벴으며 용기를 발휘해 진영에 돌아왔다.
伏兵將鹿島萬戶宋汝悰, 斂戰船八隻, 遇賊舡十一隻于折爾島, 全捕六隻, 斬首六十九級, 賈勇還陣.
(전쟁 막바지에 조선 수군이 거둔 승리인 ‘절이도 해전’에 대한 기록이다. 절이도는 지금의 전남 거금도다. 이 승전은 지금까지 ‘선조실록’과 이순신의 조카 이분의 ‘행록’ 등에 단편적으로 등장했을 뿐 정작 ‘난중일기’에는 그 내용이 없었다.)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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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로애락 감정 숨김없이… '인간 이순신'에 놀라"
"《충무공유사(忠武公遺事)》를 번역하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난중일기(亂中日記)》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내용들이 있다는 것만은 아니었어요. 충무공도 보통사람들처럼 희로애락의 감정을 느끼는 '인간'이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난중일기》에서 누락됐던 32일치의 일기 내용〈본지 2일자 A1·A10면 보도〉을 밝혀낸 노승석(盧承奭·39)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대우교수는 여전히 상기된 얼굴이었다. 400여년 만에 세상에 공개된 일기는 돌아간 아버지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 전란을 치르면서도 흐트러짐이 없는 강직한 면모, 백성과 군사들을 아끼는 자상함이 잘 드러나 있다.
본지 단독 보도 직후 문화재청의 긴급 브리핑에 모습을 드러낸 노 교수를 보고 사람들은 다시 한번 놀랐다. 암호문과도 같은 초서(草書)의 내용을 모두 해독한 사람이 백발의 한학자가 아니라 30대의 젊은 학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 《난중일기》에 관한 한 국내 최고 수준의 전문가다. 성균관대 한문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던 지난 2004년 35세의 나이로 《난중일기》의 13만자(字) 전편(全篇)을 DB(데이터베이스)화하는 데 성공했고, 2005년에는 누락되거나 잘못된 글자를 모두 바로잡은 《난중일기》의 첫 완역본을 냈다. 이때 바로잡은 글자만 150자(字)가 넘는다.
![](http://img.news.yahoo.co.kr/picture/2008/34/20080407/2008040700021822634_035028_0.jpg)
그는 청명 임창순(任昌淳·1914~1999) 선생과 동문수학했던 부친 노상구(盧相九)씨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한학을 접하며 자랐다.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32일치의 일기가 실린 문서가 다름아닌 현충사 소장 《충무공유사》였고, 더구나 책 제목도 '재조번방지초(再造藩邦志抄)'라고 잘못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이 뜻밖이다.
"등잔 밑이 어두운 격이었다. 자료 번역을 위해《충무공유사》를 판독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그런 부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직도 초서로 쓰여진 우리 문서들 중 대다수가 밝혀지지 않은 진실을 묵묵히 담고 있는 셈이다."
―새로 밝혀진 일기 내용에 대해 '뒷담화 일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충무공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적은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도원수 권율을) 원수의 지위에 둘 수 있는 것인가. 괴이하다.' '하늘과 땅 사이에 원균처럼 흉패하고 망령된 이가 없을 것'이라는 부분들은 후세의 우리로서는 대단히 당혹스러운데….
"남에게 보여주려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적은 부분이라 그럴 것이다. 이 부분이 나중에 《이충무공전서》에서 빠진 것도 대단히 민감한 내용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인간 이순신'이 달랐던 점은 그 희로애락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내면에서 승화시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는 데 있다. 그것이 위인(偉人)과 범인(凡人)의 차이일 것이다."
―《난중일기》의 판본이 복잡하다는 것도 일반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부분이다.
"'난중일기'라는 제목은 1795년 정조 임금의 명으로 《이충무공전서》를 간행할 당시 편의상 붙인 것이다. 원래는 연도별로 〈임진일기〉 〈계사일기〉라는 제목이 붙어 있을 뿐이었다. 〈을미일기〉의 친필 초고본이 모두 유실돼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내용만 전해졌다. 새로 밝혀진 일기 32일치 중 29일치가 〈을미일기〉인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존 초고본에 없는 병신년(1596)과 무술년(1598)의 일기 3일치는 어떻게 된 것인가?
"충무공은 전란중에 일기를 적을 때 경황이 없어 대충 써 놓고는 나중에 다시 정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유일기〉의 경우 다시 정리한 〈속 정유일기〉가 따로 있을 정도다. 그 3일치는 충무공이 비망록 형식으로 따로 적어 놓았으나 지금은 없어진 부분으로 보인다."
―지난해 7월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전문위원 겸 대우교수가 됐다. 무슨 활동을 하고 있나?
"《충무공유사》를 비롯한 《난중일기》의 이본(異本)들을 번역하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충무공 관련 문헌사료들을 정리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번 학기부터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난중일기 강독'이란 강의를 개설했다. 《난중일기》를 텍스트로 삼아 충무공의 리더십을 가르치는 것인데, 학생들이 110여 명이나 수강하고 있어 자리가 부족할 지경이다. 이번에 새로 나온 자료를 바탕으로 다시 《난중일기》의 정본(定本)을 만들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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