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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에 생산된 유천소주와 1960년도의 청도소주

朴正培(박정배) 2010. 6. 14. 20:13

 

 

1960년대 청도소주    

 

1960년 청도에도 소주공장이 있었다.

생산된 소주이름 신풍소주와 왕로 소주였다.

 

신풍소주는 정확하지 않지만 김형권씨가 운영한것으로 보인다.

공장이 위치한것은 지금의 청도시장 근처인것으로 추정된다.

 

또 하나의 왕로소주는 유천에서 생산된것이다.

누가 만들었는지 그유래에 대해서는 알수느없다.

 

1920년대 유천소주

 

 역사적으로는 청도에는 유명한 증류소주가 있었다.

바로 유천소주이다.

1920년경 부터 유천에서 생산되었다

 

조금만 혀로 음미해도 화근내가 확나는 미묘한 그향기가

일품이고 도수가 매우높다. 많이 마셔도 뒤탈이 없는

순수 쌀곡주로   이름난 민속주이다.

 

 유천원주막에 예부터 전해온 전통기법은  불명하고 

근세에 양조과정에서  누룩의 원료인 효모균을 꼬드밥에

고루썩어 하루정도 띄우면 암록색으로 변한다

 

약1주일동안 18도의 온도에서 온실 발효과정이 제일 중요하다.

발효된 원료는  일정의 화력으로 계속불을 지펴 속에서 증발하는 증기가 맺혀서  쏱뚜껑 꼭지를 타고 냉각기를 거쳐  항아리로 모아진 유천고유의 민속주이다.

 

발효과정과 화력에 조절되어 소주빛깔이 맑아 찬물같이 투명하고 화끈한 그향미는 특이하고 애주가들의 천하일품 명주라 했다. 

 옛날 유천원 주막에서 이곳명산물인 은어와 민물고기는 맛이특이해

유천식향 먹거리에 널리 알려졌다.

여기에 또한 반주로 없어서는 안될 유천소주 다른고장과 비할수없는 명주라 했다.

 

 일제때 각종물자통제 가 극심했을때도 전통기법으로 이어왔다.

당시 가내 음주로 증류능력 3되-한말 정도의 증류기는 유천주변 30리 이내100여호이상 확산되고 증류한 그소주는 전국각지로 거래되어 한때 상권이 형성되어 소주생산 대명사역활을 해왔다.

 

당시국가적 공산품생산이 전무한 상태이고 특히 식량부족에 원조물자로 연명하던  때 순수 쌀로 만든 소주는 주민의 유일한 생계수당 보탬이고 밀조주로 성행했다.

 

처음에는 각가내에서 증류양조하다가 후에단속이 심해지자 은밀한곳으로 이전하고 급기야 패업하고 일부는 산중오지로 피해생산하다 완전패업되었다.


유천소주양조장은 성업중일때 종업원10여명으로 하루 양조능력30말정도를 생산했다.

대형봉일러 방식으로 생산되고 있었으나 전통기법보다 다소 질이 떨어졌다.

 

 

1966년 전국 양곡 양조금지령에 의해 현 금복주회사로  통합되었다.

쌀로 빚는 증류소주에서 옥수수에 추출한 알코올 을 희석하는 희석소주로 전환되었다.

 

청도는조국근대화를 이룩한 새마을 운동과 함께 국민들의 애환을 달래는 술로서도

유명세를 떨친곳이기도하다.